[묵상글]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전봉석 2023. 5. 2. 04:51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이사야 64:6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시편 148:13
 
 
 
하나님이 임재는,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1).” 곧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 3:22).” 그러하여서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요 15:26-27).” 그러하기를. 이는 그리하여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6).”
 
오늘 이사야의 증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으실 때에 우리로서는 고통과 절망뿐인 것을. “너희는 삼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출 23:21-22).” 한데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81:11-13).
 
이와 같은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주를 바라고 섬긴다는 일에서도 행여 나의 어리석음으로 주를 마다하고 주의 임재가 사라질까하여 두렵다. 우리가 곧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2).” 오늘 이사야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게 한다. 주의 권능이 불로 연상되어 강력한 불길 앞에서 모든 것이 소멸함을 느낄 수 있다.
 
오늘 우리로 평안하게 하심은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으리요 진실로 그들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아니하니 우리의 원수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다(신 32:30-31).” 우리로 저들과 다른 것을.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6-37).”
 
우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것도 도살당하는 양 같이 무력할 따름이다. 그런 우리에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 곧 우리 안의 죄성을 이기고 우리 밖의 온갖 유혹을 이기려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이와 같은 주의 생각과 하나가 되는 것. 그러므로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12-13).” 이 확실한 증거를 말씀으로 되새길 수 있고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신다. 오늘 3, 4절,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은 기대하지도 못했다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항상 뜻밖의 일이 생겨난다. 우리 생각 밖의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그리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멈추게 된다. ‘고통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시다.’ 이는 누구라도 선뜻 바랄 수 있는 게 아닐 테지만 또한 우리에겐 다른 이와 다른 안목이 있었다. 이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눅 12:56-57).” 하고 꾸짖으셨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어찌하여 우리가 그러해야 하는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3-36).”
 
우리가 바로 사는 길은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준하여 오늘 내게 부여하신 생을 다하는 것. 비록 어떠하다 해도 이에 주를 인정하며 주와 함께 하는 삶으로,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수 10:14).” 곧 날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을 앙망함으로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33:20-22).
 
우리의 간구가 오늘 우리로 주의 길을 가게 한다. 주를 바람으로 주신 날을 산다.
 
요즘은 아내를 우려하고 격려하는 일이 크다. 늙으신 장모로 인하여 아내가 심신이 많이 피로하여졌다. 어제는 뜬금없이 자신도 정신과 약을 좀 먹어야겠다며 지나가는 말처럼 호소하였다. 마치 늙은 아이를 돌보는 일처럼 장모의 고집도 엄청나다. 그렇다고 장모의 성품이 고약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온순하게 고집스럽다. 아내와 같이 점심을 먹고 가까운 곳을 산책하며 말하였다. 너무 안달부리지 말고, 주께 맡김으로 그러려니 하고 넘겨야지 안 그럼 당신이 먼저 죽을 지경이다! 일일이 돌보고 위하여 마찰만 가져오느니, 어지간한 것은 그냥 두라 덧붙인다. 아내의 어려움은 자기 마음의 이중성이다. 불쌍하고 안 됐고, 속상한데 자꾸 화가 난다. 평생을 그리 살아온 것을 알지만 휴지 하나, 입던 옷 가지 빨래하는 것에 그리  고집이다.  그게 쉽게 고쳐질 일인가? 나의 염려의 말은 공허하다. 알면서도 아내 역시 어쩔 수 없이 간섭하고 참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오직 주께로만’ 그 마음을 토로하고 기도하기.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애 3:24-25).” 생각을 달리하면 장모의 처지도 이해는 간다. 그 마음이 우울하고 속상하겠다. 마음과 달리 몸은 가눌 수 없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겠다고 한 것이 자꾸 일을 어렵게 하는 셈이니. 늙고 병든다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이에 우린 일찍이 주를 바라며 말씀을 가까이 하고 일심으로 주를 바라는 습관이 필요하다. ‘환난으로 인내를 인내로 연단을’ 몸에 익혀야 한다. 하루가 너무 길고 괴롭다. TV 앞에 앉아 있기도 한두 시간이지, 침대 위 생활이란 게 고립 그 자체 아니겠나? 그러니 아내도 장모도 모두 이해가 간다.

그래서도 부쩍 드는 생각이 늙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 노인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 혼자 가만히 있는 연습을 해야 한다. 말을 줄이고 들어주는 훈련도 돼야 한다. 자기 말만 하기 좋아하는 노인의 습성은 사람을 곁에서 밀어낸다. 또한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필요하다. 천국을 사모하며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몸에 깃든 버짐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 ‘습관을 따라’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기도하였다. 예수님은 아침 일찍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곧 기도는 습관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일종의 수다다. 기도란 게 늘 바라고 구하여 청구서만 남발하는 게 아니다. 대화다. 간청 외에 듣기도 익숙해야 한다. 묵상이 삶이어야 하는 이유다. 욥의 경우 그와 같은 고통 중에서도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나는 이 말씀을 자주 쓰고 생각한다. 죽이실 걸 알지만, 고통 가운데서도 나는 하나님과 대화할 것이다! 하는.
 
수다란 게 하던 사람과만 하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는 외려 의무적인 할 말만 하게 된다. 굳이 이런 말을 해서 뭐하나…  생각되는 것은 접어둔다. 그러니 할 말이 별로 없다. 어제도 수다 떤 사이는 다르다.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끝이 없는지, 말이란 말 이상의 교류다. 보면 늘 만나는 사람만 만나는 이유다. 설명이 필요없고 서로의 관심은 나란히 확장하여서 교제의 세계는 무한정이다. 우리가 늙어간다는 것, 나이 들고 병들어 혼자 있어야 할 때 충만할 수 있는 것은 오늘에 달렸다. 나는 이를 의식하며 억지로라도 같은 동선을 따라 움직인다.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한다. 최소한 단순하게, 그러려고 때론 의식하면서 그럴 수 없을 때를 생각한다. 시선을 놓고 가만히 주와 마주하고 앉는 일, 나의 묵상은 따로 준비된 게 없다. 늘 아침이면 뭘 쓰지? 하고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가는 것, 말씀이 이끄시는 대로 때론 듣거나 때론 내 말만 하거나. 우리가 나눌 이야기는 무한대이다. 어제도 누구에게 연락해서 모처럼 어찌 지내나 물을까? 하다 그만두었다. 그저 잘 지내려니 하고, 나는 평소처럼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고, 월요일에 늘 하는 다음 설교 본문을 펼쳐두고 주의 영이 이끄시는 대로 읽다 말다 다른 설교자의 책을 뒤적거리거나 딴 짓을 하거나…. 단순하다는 것은 자유로울 수 있는 범위가 확장되는 일이다. 애써 뭘 해야 할 게 없다. 하던 대로 혹은 손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내버려두기. 그래도 되는, 자유. 온전히 주를 바란다는 것, 그래서 시편의 세계는 무한정하다. 하나님 앞에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은 소리도 서슴지않는다. 그래도 되는 사이, 그걸 더 좋아하시는 하나님의 세계.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130:3-4).
 
때로는,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50:21-22).
 
하여 왜 바울이 그 나이에, 늙고 병들어 옥에 갇혀서도 왜 이런 것인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진정으로 두려워할 줄 알 때, 우리는 이를 대비한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했구나.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15:31).” 내가 나를 복종시킴도, 날마다 죽여 나의 아집과 고집을 꺾는 일도, 엄밀하게는 자유를 확보하는 길이다. 우리가 대비해야 할 노후준비다. 가장 우선되는 일이었다.
 
오늘 이사야는 기도한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사 64:9).” 이는 스스로를 다시금 바로 하려는 의지로 읽힌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지 않고 사는 일, 당장, 현재를 사는 ‘욜로’는 늙음과 병듦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당장, 지금의 일보다 더 귀한 것은 우리의 영생이었다. 어찌됐든 이 땅의 모든 끝은 정해져있다. 하면,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148:1, 2-5).
 
우리 인생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면,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12-13).
 
곧,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135: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