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전봉석 2023. 6. 21. 04:4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모압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닥치나니 두려움에서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떨어지겠고 함정에서 나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내가 모압이 벌 받을 해가 임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48:43-44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시편 48:9

 

 

 

모압은 사해 동쪽에 위치하여 암몬과 더불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자손들이다. 이스라엘과는 매우 가까운 혈육이라 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갈 때 모압은 적대적이었고, 우상숭배와 신앙적 타락의 온상으로 두고두고 이스라엘에 영향을 끼쳤다. 이 예언은 B. C. 582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면서 성취되었다. 본문이 긴 내용으로 이어지듯 이스라엘에게는 악영향이 지속적이었다. 인본주의의 안일함에 빠져 있었고, 우상숭배의 온상이었으며, 저들의 교만은 극에 달하였다. 살육과 파괴를 일삼았고, 자국민은 물론 이스라엘 역시 저들의 영향에 늘 시달려야 했다. 이에 따른 멸망의 이유와 목적이 오늘 본문에 담겨 있다.

 

더욱이 교만은 자기 파멸의 지름길이다. 특히 오늘 1절, “모압에 관한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오호라 느보여 그가 유린 당하였도다 기랴다임이 수치를 당하여 점령되었고 미스갑이 수치를 당하여 파괴되었으니.” 할 때 느보, 기랴다임, 미스갑은 모압의 주요 산들인데 전략적 요충지로 자신들을 방비하는데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천혜의 요새로 그들의 교만은 하늘을 찌를 듯 두려울 게 없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자랑을 우선 언급하시며,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사 16:6).” 이는 성경의 기본 진리로,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시 18:27).

 

이에,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31:23).

 

곧 우린 미래를 건설하는 듯하나 실은 현재를 더럽힐 때가 많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는 미래는 소망이 없다. “보라 나는 오늘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은 마음과 뜻으로 아는 바라(수 23:14).” 여호와는 늙어서 더는 생을 마감하려 할 때 이와 같이 당부하였다. 이는 솔로몬의 당부와도 같다.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통하여 무릇 말씀하신 그 모든 좋은 약속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아니함이 없도다(왕상 8:56).”

 

우리가 살면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당시 자신을 통해서는 잘 모르겠다 해도 오늘 모압과 같이 우리 주변의 여러 현상으로 알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들’과 ‘친절한 타인’의 궁색한 결말은 어려서부터 학습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물질적인 것으로 모든 즐거움이 좌지우지 되는 세상에서, 오늘 본문 3절, “호로나임에서 부르짖는 소리여 황폐와 큰 파멸이로다.” 여기서 호르나님은 앞서 느보와 미스갑처럼 헤스본, 맛본과 같이 모압의 주요도시였다. 소알에 가까운 고원 기슭의 도시로 그 어떤 도시라도 하나님의 칼날을 피할 수는 없었다. “모압이 멸망을 당하여 그 어린이들의 부르짖음이 들리는도다(4).” 이것이 저들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우리가 위의 것을 생각하고 이를 찾고 산다는 일은 물질적인 이 땅의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다. 다 늙고 병들어 곧 오늘내일 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셈을 하고 주께 바치는 것에 대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볼 때면, 어제 장모와 같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바울이 연보(헌금)에 대해 설교하는 대목에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이에 대해 장모는 구구절절 말이 길어졌다. 더 맞는 말이고 이치에도 옳다. 내 것을 먼저 챙기고, 혹시 모르니 얼마를 더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러다보니 드릴 것은 궁색한데 ‘그런 것’이라 단정 짓는 말에 더는 뭐라 덧붙일 말이 없었다.

 

내려놓고 주께 모든 걸 맡긴다는 일은 사람의 의지로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처지가 그러해서 더 악착같이 쥔 것을 놓을 수 없어 바동거리는 어느 친구의 이야기에서부터 그런 가운데서 또 드릴 것은 충분히(?) 바쳤다며, 전의 교회에 나가지도 않으면서 언제까지 얼마를 바쳤는지를 다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저가 그곳에 더는 헌금을 안 하는 이유는 교회가 크고 목사가 부자고 많은 신도들이 다들 하니까 그렇다는데… 주께 드리는 것이 사람을 보고, 교회 형편과 사정을 살피면서 마치 적선하듯이 얼마씩 얼마동안을 냈는지 다 기억하고 있는 것에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곤 늘 덧붙는 말이 그렇게 냈는데, 저들은 뭘 해줬고… 하는 식의 계산법이 그야말로 물질주의가 몸에 밴 까닭이라 하겠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3-4).” 하신 주의 말씀이 무색할 따름이다. 이 땅의 모든 물질은 불에 타 없어질 것들이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롯이 그러하여 그 길로 갔던 게 오늘의 현실이 되었다. 아브라함과 롯의 식솔들이 많아지고 서로 번창함으로 각기 제 길로 가려 할 때,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서 먼저 선택권을 주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8-9).” 그러자 롯은 주저함도 없이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10).” 그리하여 저는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훗날 모압 땅이 되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우리가 찾는 위의 것은 모든 물질의 세계 그 이상의 것이다. 손에 쥔 것으로 안도하고 그도 모자라 이를 권력으로 삼아 휘두르는 자들에 대하여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사 5:8-10).” 사람 욕심 끝도 없다. 저는 그만하면 됐는데도 여전히 불안하다. 평생 일가를 이루며 부모가 물려준 집 한 칸으로 4, 5층 건물주로 살면서도 여전히 돈을 사랑한다. 성경은 경고하시길,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하시는 이 말씀은 현실과 괴리가 크다. 있으면 있어서, 없으면 없어서도 돈을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다. 모압의 결국이 어떠한지? 그 처음 롯의 선택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이를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에서 들어보면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9-22).” 누굴 탓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우린 결국 어쩔 수 없는 존재로 산다. 주의 영이 아니시면 사리분별이 불가능하다. 드리는 데 인색한 것이 정상이다. 드린 것을 기억하고 생색내듯 그만하면 됐지, 하고 스스로 자신할 때… “네가 네 업적과 보물을 의뢰하므로 너도 정복을 당할 것이요 그모스는 그의 제사장들과 고관들과 함께 포로되어 갈 것이라(렘 48:7).”

 

우리의 파멸은 어쩜 모두가 자처한 것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네게 명령하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와서 너를 따르고 네게 이르러 마침내 너를 멸하리니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징과 훈계가 되리라(신 28:45-46).” 어떤 어려움 혹은 직간접적인 주변의 일들이 우리를 훈계한다. 모압에 대해 이처럼 길게 지면을 할애한 것은 하나님의 칼이 우리들로 깨닫게 하려 하심에 있다. 이에 지혜서에서는,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1-12).”

 

이러한 모든 일련의 사태가 우리에게 보이시는 계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이를 보고도 깨닫는 게 없다면 더는 가르칠 것이 없다.’ 이 말은 중국의 어느 학자의 말로 하루는 아내가 자식의 일을 두고 뭐라 핀잔하고 있을 때 저는 밥을 다 먹고 그리 말했다. ‘이 아비가 사는 것을 보면서도 배우는 게 없다면 내가 뭘 더 가르친단 말이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104:24).

 

이를 보고,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6-28).”

 

이와 같은 말씀을 들으면서도 배우는 것이 없다면… 오늘 모압의 결국은 우리로 보고, 듣고,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로다(렘 48:10).” 이에 “모압으로 취하게 할지어다 이는 그가 여호와에 대하여 교만함이라 그가 그 토한 것에서 뒹굴므로 조롱거리가 되리로다(26).” 하고 오늘 우리로 말씀 앞에 자세를 고쳐앉게 하신다. 이로써 오늘 시편으로 묵상하면,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48:1).

 

우리가 아는 분명한 사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국의 모든 신은 헛것이나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도다(대상 16:25-26).” 그러므로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145:3).

 

곧,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로다 (셀라)

(8).

 

하여,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9).

 

이보다 복된 날은 없다. 더욱이 죽음이 가까움을 알수록 또는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당할 때, 우리는 말씀 앞에 자복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삼상 2:10).”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8).” 정작 두려운 것은 돈이 있고 없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들어가고자 해도 더는 들어갈 수 없는 ‘좁은 문’이 닫힐 때이다. 하여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48:13-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