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전봉석 2023. 7. 17. 05:27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에스겔 17:24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편 73:28

 

 

 

두 독수리와 백향목과 포도나무를 비유로 유다 멸망 전후의 사건과 회복을 예언한다. 한 독수리는 크고 털이 많고 화려하다. 한 독수리는 털만 많고 화려하지 않다. 이중 화려한 독수리가 백향목 높은 가지 연한 가지를 꺾어 장사하는 땅에 이르러 상인의 성읍에 두었다. 또한 그 땅의 종자를 꺾어 큰 물가 옥토에 심자 그것이 자라 포도나무가 되었다. 그 가지가 독수리를 향하였고 그 뿌리는 독수리 아래에 있었다(3-6). 화려한 독수리가 포도나무를 큰 물가에 심은 것은 그 포도나무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포도나무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8). 그런데 그 포도나무는 가지를 뻗어 화려하지 않은 독수리에게만 물을 받기 위해 그를 향해 뿌리를 내렸다(7). 결국 포도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시들어버리게 될 것이다(9-10).

 

이어 11-15절은 저 비유에 대한 설명이다. 화려한 독수리와 다른 독수리는 각각 근동의 바벨론과 애굽을 상징한다. 바벨론이 여호야긴 왕과 유다 상류층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좋은 종자를 그 옥토에 심은 것 같이 느브갓네살이 시드기야를 유다 왕으로 세웠다. 그런데 저가 바벨론을 저버리고 애굽을 향하였다가 자신은 물론 유다가 파멸에 이른다. 이어 유다 패망을 알리고 시드기야는 급기야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끌려간다. 그때 애굽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였다(16-21). 끝으로 백향목을 비유로 하나님이 그 높은 곳의 연한 가지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심으로 각종 새들이 깃드는 아름다운 백향목이 되게 하셨다(22-24).

 

예언은 일어날 일은 일어난 듯 전한다. 단지 추론이나 상징으로 그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신실하심을 반영하여 하나도 남김없이 모든 게 다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를 믿고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으로 우리 삶은 하나님의 견고하신 뜻에 따라 든든하게 세워져간다. 곧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기 원하신다.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끌려가고 시드기야가 왕으로 임명되었을 때, 저가 주의 뜻을 알았더라면 애굽으로 기울지 않았을 텐데… 이를 보면서 더욱 확실해지는 것은 말씀을 바라고 구하는 데 전심을 다해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잠 2:4-8).”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왜 이토록 성경은 우리로 말씀 가운데 살기를 바라시는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께 향한 자세가 생애의 여러 갈림길에서 화와 복을 결정하는 것을 본다.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신 11:27-28).” 하여,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시 115:13).

 

이 명료한 진리 앞에 우리의 간절함은 어떠한지? 필요에 의한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구하고 그의 도우심을 바라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럴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증상을 오늘 시편은 알려준다. 곧 우리 스스로 알고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우리의 노고에 비해 악인들의 형통함이 우리로 좌절하고 넘어뜨린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73:1-3).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마음이다. 실제 저들은 이상할 정도로 잘만 산다. 저들을 보면 우리의 신앙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4-6, 9-11).

 

곧 저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일에서 하나님을 운운하며 믿음을 가지고 사는 우리를 비웃는다. 이는 하나님을 업신여김이다. 오늘 에스겔이 전하는 비유에서도 기껏 좋은 가지로 옥토에 심은 바벨론을 배반하고 애굽으로 그 가지를 뻗은 것과 같다. 그래서들 아는 사람은 아는 말이 고통이 축복이다. 만족스러울 때는 하나님을 저버리기 일쑤다. 성경은 누누이 말씀하시길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잠 3:11).” 이는,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94:12-13).

 

우린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없다. 아무리 기도한대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되돌리지 않으신다. 다만 그러는 동안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뜻을 바꾸어놓는다. 이는 우리의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잠 21:30).”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3:10-11).

 

어느 지점에서 왜 하나님은 그리도 냉정하게 나의 기도를 외면하셨는지, 실은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결과로 보답하려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와 생각하면 셀 수도 없이 나의 생은 모두 그러하였다. 나는 중학교에 올라가서 부적응자로 서서히 도태되었다. 같은 초등학교 친구들은 2학년이 되었고, 1년 쉬고 들어온 나로서는 ‘그 문화’에 적응할 수 없었다. 당시는 군사교육이 주된 상태여서 한 학년 선배가 곧 하늘같았다. 하루는 등굣길에 목 단추가 하나 풀렸다는 이유로 선도부 하나가 불러 세워 따귀를 갈겼다. 그때 곁에 있던 아이는 6학년 때 같은 학교 아이였다. 저가 싸늘하게 눈길을 돌릴 때 나는 결심했다.

 

이후 6개월은 수면제를 모았다. 5학년 때 자살하였던 어느 형의 선택이 부러워서 나는 자살충동을 무슨 비상구처럼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후 계속 되는 폭력과 괴롭힘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보란 듯 저들에게 돌을 던지고 싶었고, 이는 마음 바탕에 하나님께 대한 반감도 컸다. 나는 큰 걸 바란 게 아니다. 있는 듯 없는 듯 모두에게서 숨고 싶었다. 어린 게 기도랍시고 구한 것이 사람들이 나를 모른 채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으니, 가끔은 어린아이였던 내가 안쓰럽기도하다. 그렇게 수면제를 모았으나 결국은 엉뚱하게도 모든 게 발각되고, 집에서는 부모에게 슬픔이 되었다. 좋았던 것은 학교에서 모두의 기피학생이 된 것이다. 선생들도 뭐라 하지 않을 정도로 나의 그러했던 소문은 나를 보호하는 듯하였다. 우습지만 그때 나의 기도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치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은 더 어릴 때부터 나의 기도에는 아예 관심도 없는 듯 외면당하는 것 같았다.

 

그때 만난 아이, 당시 우리가 서로 할 수 있는 것은 편지쓰기였다. 둘이 같이 붙어 다닌다고 목사 아들이 장로 딸과 연애질이라며 온 동네에 소문이 나면서부터, 나의 글쓰기는 그야말로 돌파구였다. 그 아이 또한 나환자인 아버지와 심한 절름발이 엄마 사이와의 생활이라, 나를 만나기 전에는 공부밖에 할 게 없었다고 하니… 내 생전 처음으로 그 아이 따라 의정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고, 그때 여러 소설과 그 아이가 권해주는 시집을 읽으면서 3년 반 정도의 시간을 버텼던 것 같다. 후에 어른들의 세계란 게 아이들보다 옹색하여, 인천으로 이사하고도 편지 왕래가 이어지자 우리 부모는 물론 그 아이의 삼촌은 인천까지 찾아와서 더는 연락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아니면 데리고 살던가! 저의 위협적인 말에 고작 열네 살 아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증발’, 원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아이처럼, 나는 더 이상 답장할 수 없었다.

 

그 아이는 그런 사실을 몰랐는지 아무런 답장이 없던 나를 염려하다 기어이 인천까지 왔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그 내용을 말하면 당장 쫓아내 인천으로 보내버릴 것이니 책임지라는 말에 겁을 먹었다.) 결국 그 아이는 내가 너무 잔인하다며 울었고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비겁하게 저를 돌려보냈다. 이후 고등학교 생활을 생각하면 지옥이다. 하루하루가 죽지 못해 살았다. 그러니 내 하나님께 내가 구할 수 있는 기도란 원망과 돼도 않는 소원이었다. 결국 고3 때 실내교련시간에 교련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늙은이 군인 출신 교사에게 두 대 맞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그리고 만난 그 아이, 그 때를 생각하면 안 만났으면 더 좋았을 뻔했는데…. 결국 둘은 술을 잔뜩 마시고 내차 울기만하다 이른 아침에 나는 부산으로 줄행랑을 쳤다. 물론 이틀 만에 포기하고 돌아왔지만. 신기한 것은 여러 번 죽을 기회였다. 그때마다 희한하게 지옥은 무서웠고 하나님마저 더는 부를 수 없다는 게 무서웠다.

 

구구한 나의 이야기는 오늘 유다의 실정이나 시편의 정황에서 애굽을 향하는 유다나 악인들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는 시인이나 나의 구구한 이야기나…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참 놀라운 사실은 지금 와 생각하면 모든 게 다 감사할 것이란 사실, 오늘 시인과 같이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73:16-17).

 

나는 생각하였다. 일찍이 나의 생각하기는 특기가 아니라 살기 위해 숨는 바위틈 같은 곳이다. ‘생각하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그렇듯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도 늘 나로 곤란하게 할 뿐 답이 없었다. 내가 지금도 ‘그 아이’를 생각하면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는 사람처럼 그리움인지, 씻을 수 없는 미안함인지… 이젠 주께 아뢸 뿐. 결국 ‘하나님의 성소’에서 깨달았다. 그도 그때 주가 세우셨던 내 곁의 고마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다. 기도한다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절대 바꾸실 리 없다. 그럼에도 지겹도록 그 일을 두고 기도하게 하시는 이유는 기도하다 어느 순간 나의 구하던 뜻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이를 알면서 나는 기도로 나를 알게 되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 누구의 기도부탁을 들을 때 기도한다고 될 일이 아닌데, 하는 것을 알면서도 저를 위해 기도함은 저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는 데 목적이 있다. 결국

 

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지 마시며

그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가 자고할까 하나이다(셀라)

(140:8).

 

하면,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73:20-21)

 

나의 ‘특별하였던 나날들을’ 사랑한다. 때론 소설 같고 온통 다 거짓말 같은 날들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하였다. 하나님은 기어이 나의 하나님이셨고, 그래서 때론 무심하고 아주 잔인할 정도로 침묵하시면서도 내 곁에 두시었던 ‘고마운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나는 항상 사랑에 빚진 자로 산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28-31).”

 

하면,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2-23).

 

이를 알 때,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24-25).

 

그리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