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전봉석 2023. 8. 17. 04:26

 

곧 너희가 여호와께 드려 예물로 삼을 땅의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이라

에스겔 48:9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시편 104:33-34

 

 

 

에스겔은 글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을 생명수와 땅의 분배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심을 알린다. 에스겔은 앞서 하나님이 성전에서 떠나가시는 것을 보았다(11장). 그리고 새로운 성전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43:4, 44:2). 이제 하나님께서 영원히 성전에 거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48:35).”

 

성의 출입문들이 12지파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이는 공동의 소유임을 암시한다. 한 성읍을 ‘여호와 삼마'’라 하셨다.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새 이스라엘 공동체와 함께하시리라는 사실이다. 그 날 후로, 곧 하나님의 모든 구원 사역이 완성되고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이 성취되는 날에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43:4).”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새 성전에 거하시면서 다시는 당신의 백성을 떠나지 않으시리라는 약속으로 귀결하기도 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들의 왕들이 음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7).”

 

결과적으로 모든 사역이 ‘여호와 삼마’로 종결되었다. ‘삼마’는 ‘거기에’라는 뜻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전 이스라엘의 공동 소유인 성전에 여호와의 처소를 두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라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거기에’라 하였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기업이며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 자리 잡으심을 알린다. 하나님의 임재 여부에 관심두는 이유다.

 

오늘 본문은 일곱 지파의 땅 분배에 대하여 묘사하고(1-7), 하나님께 속한 땅 분배에 대해 기록하였다(8-22). 그리고 나머지 다섯 지파들의 땅 분배를 묘사하고(23-29), 성읍의 출입구에 대한 할당을 묘사하고 있다(30-35). 땅 분배는 중간에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땅에 대한 것으로 거룩한 땅, 곧 성전이 있는 땅을 기준으로 하여 가장 먼 곳에 있는 단 지파를 시작으로 한다. “모든 지파의 이름은 이와 같으니라 북쪽 끝에서부터 헤들론 길을 거쳐 하맛 어귀를 지나서 다메섹 경계선에 있는 하살에논까지 곧 북쪽으로 하맛 경계선에 미치는 땅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단의 몫이요(1).”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유다 지파(7)로 나온다. 성전 남쪽에서 보았을 때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베냐민에서부터(23)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최남단 갓 지파(27)에 이르기까지 순서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전에 여호수아 시대에 땅을 나누었던 순서와 다르다(수 13:8-17:18). 여호수아 시대의 땅 분배는 출생의 순서가 기준이었다. 오늘의 땅 분배는 가장 하나님께 반하던 단 지파를 성전에서 멀리 배치하였다. 이는 창세기에서 단에 대하여 평가하고 있는 내용으로도,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창 49:17).” 반면 베냐민 지파는 분열 왕국 시대에도 유다 지파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겼다. 북이스라엘 지파들처럼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전 가까운 곳에 위치할 수 있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다. 그 행위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약의 교훈과 일치한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4).”

 

이러한 땅 분배는 역사적으로 성취된다기보다 영생의 기업에 참여한다는 사실의 예표다. 성도는 마지막 날에 천국의 유업을 상속받아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땅의 위치는 차서를 두었으나 땅의 규모는 평등하였다. 동일한 양식으로 땅을 분배하고, ‘동편에서 서편까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땅을 분배함에 있어 매우 공평하시다는 사실은 알게 한다. 어느 누구도 땅의 크기를 제한하거나 초과하지 않게 하셨다. 공평한 분배는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차별이 없음을 알게 한다. 차별은 없으나 차등, 차서는 두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바울은 말하길,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또한 땅-하나님의 나라 중심부에 성전이 있다. 좌우편에 왕의 기업이 있다(21-22). 북쪽에 레위인의 땅이 있다(13-14). 남쪽에 성읍이 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도면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사독 제사장들에게 주어지는 거룩한 땅에 대해 서술하고(8-12), 레위인의 땅을 밝히고(13-14), 성읍의 규모를 소개하고(15-20), 왕의 땅을 소개한다(21-22). 거룩한 땅의 분배는 45장과 비교할 때 약간의 차이가 있다(45:1-8, 48:8-22). 그 구조는 제사장-레위 지파-성읍-왕의 순서로 땅이 분배되고, 규모에 대한 표현은 동일한 크기의 단위를 사용하였다.

 

결국 땅은 하나님의 것으로 규모와 크기를 묘사하는 데 있어 제사장의 땅 분배를 기준으로(8-12), 하나님의 거룩한 땅의 구분에서 제사장이 먼저 언급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분을 잘 감당했기 때문이다. “이 땅을 사독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구별한 제사장에게 돌릴지어다 그들은 직분을 지키고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될 때에 레위 사람이 그릇된 것처럼 그릇되지 아니하였느니라(11).” 하여 각 지파들의 신앙적인 행위를 하나님은 선악 간에 공정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한다. 곧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다시,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1).”

 

또한 레위인의 땅에는 엄격한 제한이 뒤따르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즉 레위인들은 자신들의 땅과 그 땅에서 나는 열매에 대한 권리 주장을 할 수가 없다. 이러한 권리 제한은 레위인들이 그 땅에 살지만, 땅의 소유자는 하나님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를 확대해서 보면 모든 성도의 모든 소유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임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다만 성실한 청지기로 살 뿐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 12:42).”

 

성읍의 중심적인 역할은 백성들이 삶을 유지하는 공간이다. 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땅이지만, 동시에 백성들의 일상적인 생활의 터전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하나님께서 영과 육을 포함하는 전인격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우리의 성스러움과 속됨이 서로 나뉜 게 아니라, 하나의 관점에서 신앙으로 표현돼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우리 실생활에서 보여진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곧 우린 그리스도의 향기로 누군가에게 복음의 냄새가 되고, 또한 그리스도의 편지로 누군가에게 우리 이야기는 읽혀져야 한다. 냄새로 맡고, 이야기로 읽혀져서 우린 하나님을 나타내는 사명을 다한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2:15-16, 3:3).” 우리는 하나님의 처소, 성전으로 산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누구도 잃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설령 단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에 어그러진 지파였다 해도, 먼 곳에 있을 뿐 저가 받은 땅 곧 하나님의 유업은 공평하였다는 것을 주목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이는 곧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4).” 그러므로 우린 이를 알면서 더욱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것이 우리 일상이 되고 삶의 전반을 주도한다. 곧 나에게 부여하신 직분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 6:10).” 그러므로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0-11).”

 

실제 우린 누구나 현재에 만족할 수 없다. 이는 우리 안에 소욕이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 결국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6).” 이 무서운 나의 나 됨을 인지하고 산다는 일, 나는 선을 원하나 선을 바라지 않는 나 역시 공존함으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7:19).” 이 싸움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여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 이를 두고 나는 애통해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나의 한계를 인정한다.

 

이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하였어서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3-4).”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어둠인가? 영적으로 어둠에 가려져 산다는 것,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삶이라니! 그럼에도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이 오늘 본문에서 희망적으로 읽힌다(겔 48:30-35). 곧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길은 없다는 데서 안도감이 든다.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이 은혜로 오늘을 살지만 우리의 영원한 장래의 소망도 있다. 어제 저녁예배로 드리면서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5).” 하는 데서 오늘 이처럼 말씀으로 의지하고 말씀 가운데 살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주신 것에 감사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언약,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신 29:9).” 그러할 때,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13).” 오늘에서 나의 하나님이 영원토록 나의 하나님으로 내가 거할 땅이 되고 나는 그의 소유가 된다. 이로써,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거기서’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사 26:1-2).”

 

오늘 본문은 ‘여호와 삼마’ 곧 하나님이 거기 계신 곳에 우리도 거기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이를 오늘 우리 일상에서 우린 느끼고 맛보고 충만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놀라운, 엄청나게 감사하고 신기하게 놀라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이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 46:7).

 

고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104:1)

 

오늘 시편도 오늘의 은혜로 주를 송축하게 한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2, 24-25).

 

이를 위하여,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30-31).

 

이에,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33-34, 35b).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