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다니엘 1:8-9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시편 105:3-4
다니엘서는 ‘구약의 계시록’라 불린다. 하나님 나라의 대한 최종적 승리에 집중적으로 예언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파괴되었고, 이를 어려서 지켜본 다니엘은 바벨론포로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한다. 저는 일찍이 ‘뜻을 정하였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다니엘 1:8-9).” 다니엘은 뜻을 정하였고 하나님은 이를 얻게 하셨다.
에스겔서와 동일한 시대적 배경을 가졌다. 하지만 에스겔서는 제사장의 관점에서 성전의 회복에 집중한다. 다니엘서는 선지자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고 이방 나라를 통치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이행한다.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에 이어 다니엘서는 4대 선지서에 속한다. 다니엘은 유다 왕족으로 느부갓네살의 1차 침공(B. C. 605) 때 바벨론으로 끌려왔다. 민족적 주체성을 말살하려는 느부갓네살 왕국의 집중적인 교육을 3년이나 받았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신실하게 지켰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니엘을 축복하심으로 탁월한 지혜를 허락하셨다. 그리고 이방 국가에서 정치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도록 하셨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보호하신다는 단순명료한 사실을 교훈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상황은 끔찍하였다. 이어지는 2차(B. C. 597년), 3차 포로들이 유입되고 예루살렘은 기어이 멸망하였다(B. C. 586년).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어린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모습이 돋보인다. 이는 바울이 돌이켜 주를 의지할 때,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이는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관자로 인정할 때 가능하다. 곧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6-27).” 그러므로 모든 일의 진행은 주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말씀은 우리를 단련하신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 33:9-11).
그러므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이와 같은 말씀을 붙들고 주를 의지할 수 있을 때,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 견고한 의뢰만이 우리로 주어진 상황을 초월하게 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일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사 39:7).” 오늘 다니엘은 환관이 되어 바벨론의 일원으로 동화시키려는 교육을 받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니엘은 굳건한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이해하였다. 오늘 본문 2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곧 이 모든 일은 ‘주께서’ 하신 것이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잘 적응하여 생명을 연장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려 하지 않았다. 저들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일체의 타협을 거절하였다. 이런 태도는 당시 포로들이 이방 신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사실과 비교할 때 특이한 현상이다.
다수가 그럴 때 의외로 우리의 타협은 쉽다. 여기서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특별한 지혜를 주신다.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살면서 인본주의에 휩쓸리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럴 때 다니엘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알고 있었다. 아무도 모를 때 은밀하게 주의 뜻을 알고 이를 붙들고 살 수 있다는 것,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우리가 세상에 동화되면 안 되는 이유,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 17:15-16).” 주가 날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이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곧 우리가 뜻을 정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지혜, 분별력을 주신다. 뜻을 정한다는 것, 결단하여 마음을 새롭게 다지지만 쉬 무너지고 넘어지기 일쑤라 해도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느끼고 누릴 수 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을 안다는 것,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당장의 형편과 처한 상황에 눈이 가려지면 영적으로 우린 침체하게 된다. 마음은 무너지고 자기 의지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이를 인정할 때 우린 다시 결단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도우심을 바란다. 할 때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우리가 시험을 참을 수 있는 능력도 주가 주실 때 가능하다는 사실, ‘빈손 들고 앞에가’ 주를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하였다.
빈손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 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 주소서
(세찬송가 494장, 3절).
그럴 때 우리 곁에 신앙의 동행자를 붙이신다. 다니엘에게는 그의 친구들이 있었다.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단 1:11-13).” 같이 있었으나 함께 하는 사이는 적었다. 다른 소년들은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지만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그럴 수 없었다. 이는 “너는 그것을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으라(신 12:24).”
왜냐하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실 때 무엇을 먹고 안 먹고 하는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문제였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율법의 규례를 따라(레 11:2-8)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이를 이방인들에게 보여야 했다. 우리 삶의 원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단 1:8, 9절).”
그럴 때 신앙의 동반자가 같이 있다는 것은 은혜다. 보면 늘 우리 곁에 늘 믿음의 동지를 붙이신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저로 나를 말씀으로 가까이 하게 하셨다. 지혜자는 말한다.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잠 27:9).” 그저 모두가 ‘친절한 타인’의 관계로 살아가는 이 시대에 교회에서마저 신앙으로 서로 의지할 상대가 없다면 이보다 더 황량한 믿음 생활이 어디 있을까? 기도를 부탁할 사람도 없이, 자신의 침체된 영혼을 드러내어 함께 주 앞에 나갈 수 있는 친구도 없이, 그러하다면 이는 역설적이게도 현재 자신의 신앙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울리는 사람이 나의 실체다. 함께 나누는 말이 현재 나의 실상이다.
스스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좋은 영향력은 나쁜 영향력에 비해 더디다. 나쁜 습관은 스스럼없이 우리 몸에 배고 좋은 습관은 연단이 필요하고 오래 걸린다. 본질적으로 우린 죄의 속성으로 살기 때문이다. 그럴 때,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 돌이켜 나에게는 신앙 안에서 고마운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 때론 저들을 공격하고 멀리할 때도 있었는데, 저들은 나의 외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오늘에 이르러 스스럼없이 신앙의 민낯을 서로 드러내어 고백할 수 있고, 같이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동지가 있다는 것은 그 어떤 복보다 복되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32:6-7).
하나님은 말씀대로 사는 자를 높이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
(37:30-31, 37).
누구와 곁을 두고 사는지에 따라, 어떤 말로 위로와 충고를 들으며 사는지에 따라. 같이 어울리는 자들을 살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8-19).” 그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서로의 버팀목이며 격려이고 동료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이는,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105:1-3).
할 때,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로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이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내 곁에 믿음의 사람 하나만 있어도 주를 바라고 주만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동역자가 된다. 우리가 사는 날, 이 잠시 동안의 동행에서 우리는 함께 영생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17-19).
오늘도 말씀으로 단련된다는 일, 무엇보다 서로의 기도와 지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다들 도움을 구하여 산을 향해 두리번거릴 때,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하시는 주의 말씀을 곁에서 같이 증거할 수 있는,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이와 같은 신앙은, 어쨌든 욥에게는 욥의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는 너와 나로 서로 같이 주를 경외할 수 있도록 곁을 지켜야 한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
(119:63).
그러할 때,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내가 듣게 하려무나(아 8:13).”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주가 나의 친구시라, 내 곁에 주가 계시는 것이었다. 뜻을 정하면,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다.
그의 백성이 즐겁게 나오게 하시며
그의 택한 자는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땅을 그들에게 주시며
민족들이 수고한 것을 소유로 가지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43-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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