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전봉석 2023. 8. 25. 05:02

 
이에 나 다니엘이 지쳐서 여러 날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환상으로 말미암아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
단 8:27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시 112:6-7
 
 
 
다니엘이 두 번째 환상을 본다. 2장에서의 환상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갈등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계시하고 있다면, 7장에서의 환상은 이 세상 나라가 누구에 의해 심판받을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2-7장까지 열방에 대한 환상이었고, 8장에서 12장까지는 이스라엘 선민에 대한 환상이다. 2장이 심판의 목적을 밝히는 반면, 7장은 심판의 주체를 묘사하였다.
 
세상 세력을 금 신상으로 계시하여,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단 2:31).” 웅장하고 화려한 것을 보이고 있다면 7장에서는 네 짐승으로 계시함으로 잔인하고 포악한 것을 드러내었다.
 
이어 오늘은 세상 세력을 숫양과 숫염소로 묘사함으로 제국의 운명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할 가혹한 시련을 구체적으로 계시하고 있다. 곧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역사적인 시련이 예시되고 있다. 오늘 표현에서 ‘이상’이란 말을 사용하고(1, 2, 13, 15, 16, 26), ‘나타나다’, ‘보다’라는 동사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7, 15, 20). 이러한 사실은 그만큼 묵시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다니엘이 첫 번째 이상을 본 후 2년 뒤에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이상 중에 이 내용을 기록하였다.
 
먼저 두 뿔을 가진 숫양이 나타나고, 그 뒤 숫염소가 나와서 숫양을 짓밟고 강성해지는 모습을 보았다. 이것은 메대와 바사 제국이 그리스 제국의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당하는 모습에 대한 예언이다. 또한 작은 뿔의 출현은 성전 제사를 폐지하고 성소를 더럽히며 하나님을 모독한 안티오쿠스 에피타네스의 박해 사건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미래의 환란에 대한 예언은 하나님께서 세계 역사를 직접 섭리하심을 알게 한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것도 실현될 수 없다. 어떤 일을 상대할 때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하나 분명 그 일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을래 강변의 묵시’로 불리는 오늘 말씀은 바벨론의 멸망과 메대와 바사 제국의 등장, 이후 헬라 제국의 분열로 네 왕국이 형성되는 것을 묵시한다.
 
하나님의 뜻이 가려진 듯하나 이를 비추어 알게 하시는 말씀으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마 24:45).” 이에,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시 101:6).
 
일련에 말도 안 되고 어이없는 처지에 놓여 주님 앞에 씨름하고 있는 동생을 생각한다. 또는 생의 막바지에서 등을 구부리고 성경을 읽는 늙으신 장모의 꾸부정한 허리를 떠올린다. 내 나이 또래의 누가 맞이한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 남은 가족들을 생각하기도 하고… 우리의 어려움이 우리로 주를 가까이 하게 한다. 이는 공식과 같다. 그럴 때의 말씀이란,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우리가 붙들고 의지할 생의 최전방에서의 지혜였다.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9-10).” 살면서 주가 나와 함께 하셨던 사실을 두고 묵상하게 한다.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우리가 살면서 무엇을 향해 눈을 뜨고 살 것인지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고로 성경이 말씀하신 바,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이에 나는 어떤 접촉점을 얻고자 교습소를 다시 신고하여 글쓰기를 중심으로 보내시는 사람들과 접촉하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을 두고 그 접점을 찾는 것으로 우선은 지금 있는 곳에서 다시 활동하는 게 옳은 것 같았다. 하나님의 계획은 어떠하신지 알 수 없으나 나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여전히 묵상글을 쓰고,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사람들과 접하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할 필요를 느꼈다. 누가 죽고, 어떤 일이 말도 안 되게 일어나고, 아이들은 방황하고, 사람들은 멋대로 사는 세상에 대하여 나는 어쩌면 방관자로 멀찍이 숨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든 생각이라고 하나 ‘돼도 않는 것을 붙들고 씨름하느니, 할 수 있는 걸 다시 하는 것으로.’
 
그때 생각한 사람이 노아였다. 저 또한 얼마나 생각이 많았을까? 당장 멸망의 날이 임할 것으로 여겨 긴장하고 방주를 만드는데 그 시간이 무려 120년이란 긴 기다림으로 이어질 줄이야… 앞서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창 5:21-23).” 앞서 65년의 삶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그 이름의 뜻은 멸망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한 것으로, 그때에 에녹은 주를 경외함으로 남은 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24).”
 
이후 계산해보면 노아 홍수의 첫 빗방울이 떨어질 때 므두셀라는 죽었다. 저는 969세에 죽었고, 그 죽음으로 홍수 심판은 진행되었다. 노아는 인류 최악이었다 할 수 있는 라멕의 아들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는 뜻을 가졌다(29). 세상은 죄악이 가득하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6:2).” 그럴 때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 추측해보면 노아 당시에 므두셀라는 살아있었고, 저는 자신의 이름이 가진 뜻을 알고 어린 노아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여주었을 것이다.
 
나는 요즘 여러 생각이 많았다. 갑작스런 이사에 당장 교회 이전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점으로도 벅찬데 동생 일과 그 일련의 사건이 건네는 죄악 됨을 전해 들으며, 또한 내가 아는 어느 전도사의 죽음과 교통사고 등등. 일상이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에 나의 등덜미를 부여잡는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어쩌면 나는 늘 예외이길 바랐고, 주목 받는 생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처럼 혼자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심정으로 은둔 아닌 은둔의 시간 속에서 살기를 바랐다. 나는 사람이 싫었고 그 이중적인 악함을 멀리하고 싶었다. 아이들은 더욱 영악하였고, 서로가 친구라고 하나 좋을 때나 좋은 사이지 다들 자기 살 궁리나 하는 관계에서 거리를 두고 떠나 있고 싶었다. 실은 아직 잘 모르겠으나 나는 동생을 고소한 아이와 아이엄마를 생각한다. 누가 저들을 괴물로 만들었을까?
 
글방을 하면서 교회로 함께 예배드릴 때 나는 아이들의 문제에 깊은 공감으로 살았다. 자살충동에 시달리다 정신과에 입원하였던 아이와 거식증으로 힘겨워하는 아이와 부친에 대해 사무치는 미움으로 증오하며 생을 허비하던 아이들과 같이 울었다. 저들은 그 아픔을 글로 썼고 나와 같이 읽으며 그 깊은 속내를 밖으로 표출하기까지 서로가 용기를 냈어야 하는 시간을 생각하였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동생이 겪는 ‘악의적인 아이’와 그 모친을 생각하다 어떤 책임감을 느꼈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 일일까?
 
우리 교회가, 우리 믿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을 때 세상에 죄악은 급속도로 증가하고 악랄해진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아직은 할 수 있으니까, 정식으로 다시 교육청에 교습소 신고를 하고 글쓰기를 통하여 어떤 접촉점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주신 덴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두려움으로 먼저 오고, 그냥 있던 대로 있고 싶은 마음도 매우 강렬하게 나를 잡아끄는 것을 느낀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셀라)
(47:2-4).
 
다신 지겨워서 안 한다고 했던 일을 왜 다시 들추시는가,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더는 아이를 받지 않은 게 두어 해 전 ‘자해 아이’로 끝이었다. 앞서 ‘감당할 수 없는 거짓말하는 아이’는 끝내 자기 거짓말에 돌아갔다. 겹치듯 이어 온 ‘자해 아이’는 그 아이엄마도 아는 사이라, 어쩌면 나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은둔형 외톨이’로 집에만 있는 아이를 이곳으로 나오게 하기까지 두 달이 걸렸다. 속엣 이야기를 하기까지 또한 두 달이 걸렸다. 그것을 글로 쓰는 데도 두 달이 걸렸다. 어째서 자해를 하고 심지어 자살기도로 입원까지 하게 됐는지, 아이 입으로 그 말을 듣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결정적으로 아이가 주일에 나와 우리와 같이 예배드리기로 했을 때, 난데없이 아이엄마가 정색을 하고 반대했다. 저도 믿는 사람이라 오히려 쉬울 줄 알았다. 아이는 오겠다고 한 주에 아이엄마가 돌연 아이를 그만 보내겠다고 한 것이다.
 
어쩌면 그때였을 것이다. 물론 나는 아이를 만날 때면 평소보다 안정제를 더 먹어야 했다. 낭자한 아이의 팔뚝을 볼 때면 예리한 것에 베이듯 가슴이 저몄다. 어떤 두려움이 동일하게 나를 짓누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안정제를 두 배, 세 배 먹어가면서도 나는 아이를 사랑했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좌절되었고, 누구보다 믿고 의지한다고 여겼던 아이엄마의 거절은 나를 좌절시켰다. 이후 더는 어떤 일도 시도하려 하지 않았다. 다시는 누구의 속엣 이야기를 같이 안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주 토요일 딸애의 한 마디, 아빤 벌써 은퇴한 목사님 같아! 하는 말에 어떤 위기감을 느낀 것일까?
 
세상이 허망하다 하여 우리의 삶도 허무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악해지고 사람들이 끝 간 데 없이 죄악에 빠지는 것은 우리 믿는 자들의 방관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무관심이 복음을 묵혀둔다. 나는 오늘 다니엘의 환상과 묵시에서, 또한 일련의 나를 둘러싼 여러 현상과 상황들로 하나님이 내 마음을, 나로 다시 감당하게 하시려는 ‘어떤 일’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멈추고 움직이게 하려 하심을 안다. 하여 나는 기도한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19:36-37).
 
이에,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12:1).
 
나는 진정 주의 계명, 그의 말씀, 그 계시를 즐거워하는가? 하는 아주 원론적인 질문이 내 앞에 던져진 것 같다. 악한 것에 대하여는 주가 상대하실 것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73:18-20).
 
그렇다면 나는 다만 주를 의뢰할 뿐,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112:6).
 
내가 의인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주를 믿는 믿음으로다. 그렇다면 오늘 나에게 두시는 일련의 다양한 사건이니 상황이 그저 지나가는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가 범사에 주를 인정한다는 것은,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사 40:15-16).” 그러므로 세상 일, 그리 심각할 거 없다.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7-8).
 
오늘 시편에 또 오늘 하루의 행로가 드러나고 있다. 이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