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암 5:4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이스라엘을 위해 부른 애가다. 애가는 슬픔을 표현한 노래나 시이다. “인자야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겔 28:12).” 그러나 “너의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 벗은 산 위에서 통곡할지어다 여호와께서 그 노하신 바 이 세대를 끊어 버리셨음이라(렘 7:29).” 할 때의 그 의미가 숨겨지지 않았다.
오늘 1절,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곧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심정을 표현한다.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2).” 처녀라 하며 이스라엘을 수식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되었다.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사 37:22).” 또는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함이라(렘 14:17).” 이런 표현으로 이스라엘을 마치 남자에게 짓밟힌 적이 없는 여인을 대하듯 하신다.
성결을 의미하며, 연약성의 표현이고 “이르시되 너 학대 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사23:12).” 아직 적군에게 유린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엎드러졌음’을 나타내고, ‘처절한 죽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삼하 1:19).” 엎드러지다, 던지워지다. 이는 사정없이 내팽개쳐진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리하여 ‘일어나지 못하리로다’와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하는 표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알게 한다.
우린 주변의 여러 일들을 통해 애가를 부르는 사람들이다. 저들의 죄가 어떠한지 알면 알수록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사 22:4).” 오늘 날 이런저런 악한 현실 앞에서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이 우리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렘 4:19).” 단지 나의 일, 나의 문제로 씨름하고 좌절하는 수준이 아니라, 주의 자녀들로 주의 날이 가까워질수록 여전히 교회 밖을, 또는 이단과 사이비의 극성을 두고 애가를 불러야 한다.
실제로 요즘 부쩍 ‘하나님의 교회’, ‘유월절’을 아시냐며 길거리 여기저기에 흩어져 전도지를 돌리는 이들이 눈에 자주 띈다. 한동안은 ‘신천지’가 그리 극성이더니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끔히 차려입은 여신도들이 포교에 열을 올린다. 저들도 어떤 조짐을 느끼는 것일까? 예수께서 이르시길,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4-5).” 이는 오늘도 여전하여서 우린 이로써도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니 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더라(렘 28:16-17).”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을 떠난 자보다 더욱 끔찍하게 주의 일을 훼방한다. 오늘 4절,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우리로 주를 찾으라 하신다. 6절에서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하신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하나님은 말씀의 주체시고, 아모스가 이를 선포한다. 그렇지 않으면 ‘염려컨대~ 없을까 하노라’ 하심은 우리의 분명한 선택을 요구하심을 알 수 있다.
이 선택은 여호와를 찾아서 그로 말미암는 은혜를 누리든지, 아니면 심판을 당하든지, 예수께서 이르시기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찾는 것은 ‘아는 것이 영생’이기 때문이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우리로 그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두셨다.
오늘 5절,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이는 저들에게 종교적인 곳이었고 가나안 입성 때 할례를 치른 곳이고,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선지학교가 세워졌던 곳이다. 특별히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하시는데 이는 북이스라엘뿐 아니라 남유다 역시 그곳으로 가서 하나님을 찾고자 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심으로 바른 신앙은 그 길을 알아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곧 오늘의 나는 그 누구보다 은총의 수혜자란 사실을 인정한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앞서 나의 죄에서 나를 끌어내셨다. 모든 것을 끊게 하셨고 그러기까지 여러 고통의 시간이 따르기도 하였다. 그렇게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 곧 ‘치워버리고, 섬기라’ 하시는 말씀 앞에 순복한다. 순복은 체념이 아니다. 순응으로 받아들임이다.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겔 20:7).” 그런데 그리 “하였으나 그들이 내게 반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진노를 이루리라 하였노라(8).”
그러니 나는 가끔 하나님의 강제하심이 복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실 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 누군 오히려 더욱 완고하여져 주를 멀리하고 외면하지만 누군 두 손 들고 순복함으로 주의 역사하심을 받아들인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시 33:6-7).
우리 안에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어떤 회로가 있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승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고 그의 지식으로 깊은 바다를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잠 3:19-20).” 이를 모두가 보면서도 아무나 알지는 못한다. 모두가 알면서 아무나 인정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어떤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우린 안다. 그래서 책망을 미워하면 파멸이 온다는 것도 안다. 오늘 10절에서 12절,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암 5:10-12).”
‘책망하는 자를 미워한다.’ 여기서 ‘책망하는 자’는 히브리어로 ‘모키아흐’ 곧 ‘불의에 맞서 대항하는 사람’을 뜻한다. 예레미야는 문(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가서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에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렘 17:19, 19:2).” 문은 통로다. 왕래의 출구다. 문은 닫히면 벽이지만 열렸을 때는 들어오고 나갈 수 있다. 우리 안의 어떤 ‘문’이 닫혔거나 열렸는지, 스스로를 들여다봐야 한다. 말씀을 들어도, 혹은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은 닫힌 상태다. 닫힌 문은 벽이다. 우리 곁에 ‘책망하는 자’가 있는지, ‘정직히 말하는 자’가 있는지… 저들의 말을 또는 글을 우린 듣고 읽고 받아들이려 하는지, 아니면 배척하는지!
또한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우리가 사는 일이란 싫든 좋든 이런 상하관계의 수직적인 형태를 띤다. 나아가 ‘너희가 ~밟고’ 또는 ‘취하였은즉’ 이를 위해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없으면 없어서, 있으면 있어서, 우린 우리 자신도 모르게 계속적이고 습관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으레 그래왔듯이 다들 그러고 사는 세상에서 스스로 종교인이 되어 종교적인 삶을 살려 ‘벧엘’과 ‘브엘세바’로 가는 사람들이다. 만성적으로 ‘가진 자의 지위’를 추구하며 사는 일에 익숙하다.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 10:7, 29:1).” 그러니까 듣는 자와 듣지 않는 자의 차이, 닫힌 문과 열린 문의 차이. 참된 믿음으로 신앙을 바라는 자와의 차이는,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141:5).
이에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한 가지 더 분명한 자세를 일깨운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31:1).
주신 바, 한 날의 삶으로 족한 줄 알고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가끔 나는 내가 가진 그 이상의 어떤 꿈(?) 허망한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 이 말씀을 되뇐다. 주신 날을 감사함으로 살 때, 한 팔로 두 팔 가진 사람보다 더 감사함으로, 한 발로 두 발 가진 사람보다 더 감사하면서, 가난도 복이라 여기며….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2).
이와 같은 평안은 주의 위로다. 주의 위로는 애통할 줄 아는 사람이 소유하였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애통한다함은 슬퍼함이 아니요, 그리 더하시는 주의 은혜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하나님을 아는, 영생으로의 문이었다. 이를 알면 누가 높이려 해도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나의 아버지, 은혜와 긍휼하심이 충만하신 나의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할 때에,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3).
이때 바랄 수 있는 것도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가능한 주의 권능으로였다. 그러므로 오늘도 여러 생각이 나를 짓누른다 할지라도,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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