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전봉석 2023. 9. 21. 05:17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

암 6:1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 132:13-14

 

 

자만한 지도자는 자신은 물론 그가 다스리는 이들에게도 화가 된다. ‘화 있을진저’ 이는 슬픔과 탄식을 나타내는 감탄사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4).” 그러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5:11, 18).” 심판이 선포된다.

 

저들은 결국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암 6:6).” 곧 우리의 안일함은 스스로 ‘마음이 든든한 자’로 자기 마음에 이끌려 산다. 그러는 동안 죄악을 깨달을 능력이 없다. 곧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포악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는 것이 안일함이다(3). 그리고는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4-6).” 그야말로 겁 없이 사는 삶에 대한 경고다.

 

안일에 빠져 방탕과 쾌락을 탐닉하는 실상을 보여준다. 쾌락에 탐닉하고,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특별한 규칙이나 질서도 없이 혼수상태로 살아가는 영혼이다. 희희낙락하며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한다.’ 나름은 창조적인 예술성을 발휘하지만, 인간 중심의 모든 제조와 위로와 평안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사 5:11-12).” 이를 ‘대접으로 마시며’ 즐긴다. ‘대접’은 성전에서 제사를 위해 사용하는 대야를 가리킨다. 곧 그들이 얼마나 무분별한지를 알게 한다. 방탕한 태도란 가눌 수 없는 영혼의 혼미함이다. 현재를 누리는 방탕한 풍요를 묘사한다.

 

어느 훗날 정작 더는 돌이킬 수 없을 때에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마 22:12-13).” 그러므로 오늘, 아직은 기회가 있을 때에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우리가 이를 부정하고 거부한다해도 반드시 그날은 온다.

 

어느새 훌쩍, 더위는 가시고 바람이 차졌다. 인생의 노년에 이르러 가눌 길 없는 몸을 이끌고 생의 막바지를 살아가는 장모와 같이 살다보니 여러 생각이 많다. 나는 요즘 가정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를 살핀다. 몸에 밴 긴 세월 동안의 고집과 자기주장을 삼가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함으로 부디 평안하기를. 것도 어려운 게 몸은 따르지 않으나 마음은 여전하고 총기는 밝아서 여러 일에 간섭이 많다. 늘 아내와 부딪치는 일도 그것이다. 말씀으로 이를 진정시킨다고 하지만 항상 자기 말이 맞다. 그럴수록 서운한 마음만 커지는가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 저는 결코 사람이 아니심으로 우리와 같을 것이란 생각이 우리로 착각하게 한다. 이에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그러므로 때는 온다. 그때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7).” 이를 전하며 남은 생을 부디 세상의 것들로 그 마음이 오락가락하지 않기를. 사람은 늙어도 자기 셈은 바라서,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 욕심에 서러운 것처럼 셈이 능하여 얼마 내고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하나님 앞에서도 이를 잊지 않는 듯하다. 나는 장모에게 그 마음을 놓으시라해도 혹여 저를 붙들어주는 게 정확히 치르고 받는 셈에 있는지… 듣다보면 것도 모두 자기중심적이라! 사람은 결국 자기 위주로 판단하고 따를 뿐이다. 참된 안정과 평안이 주를 경외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가능하다해도 이는 사람이 자기 임의로 취하기 어려운가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 4:8).

 

요즘 우리가 저녁마다 나누는 말씀의 핵심이 그것이었다. 곧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8-19).” 이를 말로 전하여 알게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 정도로 기껏 예배를 드리고 난 후 도로 나누는 대화는 온통 다를 게 없어서 나는 회의한다. 주께 아뢴다. 결국 우리가 사는 동안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약 5:5).” 몸에 밴 이와 같은 어린아이 적의 일은 아흔이 되어서도 떨칠 수가 없는가보다. 나는 오늘의 내가 늘 그래서도 두렵다. 내가 제일 어렵다.

 

이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5-8).”

 

이 분명한 사실 앞에서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엡 4:19-20).” 나는 내가 혹여 언제든지 그럴까 하여 두려운 것이다. 누구에게 무슨 말로 권면하다 나의 한 날을 돌아보며 내가 마음이 내려앉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내가 아는 나는 내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되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장모에게 어떤 말을 권하다 그 말씀에서 내가 두려워지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내가 아는 나는 그러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밝히는 안일함과 그에 따른 죄악 됨을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다. 예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라고도 말할 수가 없다. 나는 수시로 흔들리고 넘어간다. 이처럼 말씀 붙들고 씨름한다고 하지만 아차, 싶을 때 본 모습을 마주할 때가 있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 심정이 내 것이다.

 

아모스는 당시 지도자들이 방탕한 생활을 지적하고, 근심 없이 지낸다고 하나 해도, 어김없이 다가오는 심판의 날을 주시하게 하고 있다. 그때에는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암 6:7).” 기어이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그동안 안일하여서 자신만만했던 모습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이를 ‘주 여호와가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였노라.’ 나는 오늘 이 말씀이 무섭다. “…주 여호와가 당신을 두고 맹세하셨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에 가득한 것을 원수에게 넘기리라 하셨느니라(8).” 곧 “하나님의 맹세” 곧 저의 절대적인 신실하심 앞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없다.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복이겠다.

 

아, “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9).” 이 최후에 대하여 과연 우린 얼마나 두려워할 줄 알면서 살고 있을까? ‘완전한 파멸’ 곧 그날이 오면 ‘여호와의 이름을 일컫지 못한 자들의 최후는 암담하다.’ 그것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더는 여호와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도록 하신 그때에, “보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므로 타격을 받아 큰 집은 갈라지고 작은 집은 터지리라(11).” 크든 작든, 인간의 단편적이고 어리석은 눈에는 정의를 무시하며 산 것들의 최후는 동일하였다. 저들은 사는 동안에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13).”

 

아, 우리가 허무한 것을 좋아하고 우리 힘으로 그 뿔을 잡으려고 허비하였던 생에 대하여… 가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을, 허무한 것을 추구하며 이를 기뻐하였던 어리석음을 그때에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더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곳에서!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39:6).

 

그럼에도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그러니 환장할 노릇이다. 바울의 절규와 같이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그러니 아직은 가다리심으로 긍휼을 베푸실 때에,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그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132:1-5).

 

이 간절함으로 나는 오늘도 주의 이름을 부른다. 화들짝 놀라 알람을 듣지 못하고 있던 나를 일으켜 주 앞으로 서둘러 나올 때의 그 마음이랄까? 바울의 심정으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내 안에 이는 어떤 염려, 그 두려움을 사랑한다. 남들은 낫고자 하나 나는 그것으로 주의 쓰심에 합당하기를. 나의 거짓되고 나약함이 말씀으로 붙들려 있기를. 그리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 14:26-27).” 됐다, 이것으로 붙들려 살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7-8).

 

할 때에,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13-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