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요이 1:6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시 109:26-27
요한은 이 글을 읽는 자들에게 친근한 어조로 말한다. 다른 서신과 달리 본서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장로’라 한다. 장로는 자신이 나이가 많은 연장자로서 존경을 받을 만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감독과 같이 교회에 영향을 행사한다. 이단의 거짓 교리에 항거하고 사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권위를 가진다.
오늘 요한은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한다.’ 여기서 부녀와 자녀는 실제 믿음의 가정을 지칭하면서 지방 교회와 여러 작은 단위의 기독교 공동체를 가리킨다.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개인에게, 포괄적으로 이해하면 교회 공동체에게 보내는 교훈이다.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요이 1:1-2).”
우리의 최대 특징은 택하심을 받았다는 데 있다. 성경에서 주의 백성들 가리켜 신부나 여성, 딸로 자주 비유하는 것을 본다. “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앉을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사 52:2).”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62:4-5).”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렘 2:2).”
우리가 택하심을 받은 것에 대하여는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벧전 5:13).” 바벨론은 세상이고 우리는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결국,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 3:2).”
이를 묵상할 때 오늘 이렇게 우리로 말씀 앞에 앉히심이 구별되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우리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성경은 누누이 가르치신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그러므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에 오늘 요한은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에 대하여 ‘진리 안에서’와 ‘사랑과 진리의 상관관계’를 통하여 ‘진리 안에서 사랑으로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요이 1:5-6절).”
이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하는 바울의 눈물어린 마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곧 이 사랑은 주의 사랑을 전하는 것으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곧 사랑은 우리 성도의 사귐이고 우리의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다. 그러므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우리 모두는 장로된 자로 ‘서로 사랑하라’는 명제를 앞서 준행하는 자들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2:7, 3:23).” 곧 우리의 사랑은 세 계명으로 예수를 믿고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다.
이 사랑에 대하여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3:34, 14:21).”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오늘을 사는 원동력이고 날마다 주의 새 계명으로 사는 바른 길이다. 이는 곧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으로 종말론적인 의미와 본향에서의 영원한 사귐이고 안식이 된다.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 2:7-8).”
곧,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요일 3:11).”
요한은 사랑의 사도답게 이와 같이 사랑을 자주 언급하면서 증거한다. 이 사랑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의 산물이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인 우리에게 ‘거저 주시를 호의’다. 선물이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긍휼’은 죄인인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이에 ‘은혜와 긍휼’의 근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그 결과는 ‘평강’이다.
우리는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함께 있다. 요한은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인사한 것과 달리 ‘진리와 사랑 가운데’를 강조한다. 이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진리와 사랑’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진리이신 예수의 생을 통해 계시되었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드러난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진리와 사랑을 통해 이단자의 거짓 교리에 대처하고, 진리와 사랑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를 ‘진리 안에서’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사랑으로 진리를 유지할 수 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3:23).” 특히 요한은 이 진리를 예수께서 직접 본을 보이시고,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예수님의 진술로 강조하였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요 13:34, 15:12, 17).”
‘서로 사랑하라’ 하심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부터 주어진 의무이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15, 21).”
이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사랑의 시금석이 계명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2-3).” 그러므로 사랑은 구체적이며 실질적이고 일상의 하나로 말씀과 함께 우리로 붙드신다.
하여,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요이 1:8).”
곧 우리가 사랑함은 우리가 일한 것으로 온전한 상이 있음을 알게 한다. 이 땅에서의 좋은 감정 내지는 자신의 기호에 따른 것을 사랑으로 여기지 않고 주의 명령, 곧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이에 따른 상급이 있음을 알린다. 이에 ‘우리의 일한 것’은 온전한 상으로 돌아오는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11).” 이에 저는 이 사랑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통’으로 표현하며 해산의 고통이 따를 것을 암시한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19).”
오늘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이와 같이 해산의 수고가 따르나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행 13:25).” 이에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이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소망이 있어 오늘의 ‘해산의 고통’ 같은 사랑함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시대가 아무리 혼탁하여 이단이 득세하고 미혹하는 영들이 난무하다 해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우린 곧 사랑의 선택으로 한 날을 산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하여, 우리를 택하심은 증명된다.
이어서,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 109:1, 4).
주께 나의 연약함을 아뢰며,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26-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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