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 1:3-4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시 111:10
우리 안에 ‘가만히 들어온 자’의 특징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유 1:14-16).” 이 사람들의 특징이 우리의 속성이어서 죄란 유한한 가운데 무한대 같다.
저자인 유다는 두 가지 칭호를 사용한다. 신약에서 유다는 모두 여덟 명이 등장한다. 본서의 저자는 예수님과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표현하면서 피 값으로 자신을 사셔서 종으로 삼으셨음을 상기시킨다. 더는 사람의 종이 아니라 주의 종이 되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야고보의 형제이면서 동역자 중의 한 사람으로 형제인 자신을 소개한다. 유다와 야고보가 혈연적 형제로 표현되고 있는 곳은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3).” 하며 사람들이 배척할 때 거론하면서이다.
유다가 자신을 주의 형제인 야고보의 형제임을 강조한 것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혈연적으로도 형제임을 알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갖는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즉 ‘부르심을 입은 자’인데, 그리스도인 모두를 지칭한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사 41:9).”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은 것은 부르심을 받았다는 증거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보내심도 받아야 한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6-7).”
친구는 이 대목에서 마음이 불편하다고 하였다. 제자반성경공부에서 무슨 교제의 책을 읽는데 그 내용이 온통 ‘교회만 나오는 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마음이 불편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의 불편함을 ‘거룩한 부담’으로 표현하면서 그러한 부담감을 회피하지 말고 씨름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내 누구는 보내심을 받고 누구는 보내심을 거부한다. 주저하고 망설이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사 48:12, 15).”
부르심을 받은 데서 족해하는 성도들도 대다수다. 믿음으로 천국 가는 것으로 안주하는 정도로 거기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르심은 받았으나 여전히 우상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도 여럿이라,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호 11:1-2).”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우리는 보내심을 받을 때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생활 속의 모습으로 나타낼 수 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7).” 바울은 유독 이를 강조하는데,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2-3).”
어쩌면 저는 자신이 앞서 따랐던 너무 먼 길을 돌아 주를 배척하고 예수 믿는 자를 정죄하다 돌이켰던 것을 앎으로 이와 같이 말씀을 전할 때마다 그 소원은 간절하였다. 하여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이후 저는 곧 순교를 당할 노인의 몸으로 감옥에 갇혀서도 이와 같이 권하고 증거한다.
베드로도 역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하고 간절한 마음은 저로서도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던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그 마음의 바탕이 애절한 게 아닐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이에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계 17:14).”
곧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일은 위대하며 그 일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보내심을 받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나는 마음이 어려운 친구에게 잘하고 있다고 저를 칭찬하며 올해 제자반 성경공부가 끝나면 내년에 권함을 받은 바 평신도 지도자반에서도 공부할 것을 지지하였다. 전에는 주저하더니 어제는 불쑥, 해야지! 하고 답을 하는 것이 내 마음이 다 후련하였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에 의해 사랑을 받는 자’들이다. 곧 사랑을 얻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그렇듯 우리가 어떤 자격에 의해 주의 부르심과 그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8-9).”
이어지는 말씀이 이스라엘을 향한 것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을 알 때,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하면서 이어지는 말씀으로 감격스럽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사 5:1).” 곧 주가 우릴 부르심으로,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4-7).”
이와 같은 말씀에서 오늘 새삼 나로 부르신 그 부르심의 은총에 대해 감격스러워한다. 어제 저녁에는 문득 아이에게 전화를 하여 어찌 지내는가 안부를 묻다 오늘 오기로 하여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제 서른이 되기까지 아이와의 시간도 참으로 길다. 이 시간이 헛되지 않을 것인데 저가 무기력하게 자신의 삶에 끌려 다니듯 살고 있는 것이 늘 마음 아프다. 무얼 좀 하려 하면 뭔가 터지고, 지난번에도 기껏 신앙을 붙들고 함께 예배드리려고 할 때 보이스피싱을 당해 몇 천을 날리고는 다시 예배에 나오지를 못하고 있다. 잊을만하면 다시 연결되고 하는 것이 아이의 영혼을 주가 사랑하시고 부르심일 텐데….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호 14:1).”
나는 저를 생각할 때면 늘 마음이 휑하다. 어떻게 하면 저를 부르심을 바르게 전하여 권하고 손을 잡을 수 있을까 하고, 오늘 본문의 표현과 같이 우리가 ‘지키심을 입은 자들’인 것을 알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오늘까지 우리가 안전한 것을.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1, 15).”
주가 날 위해 기도하신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우리가 서로를 위해 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4, 5).”
부디 이를 저 아이에게 혹은 친구에게, 곁의 한 영혼에게 전하여 저들로도 주의 부르심과 그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가 넘쳐나기를. 이에 우리에게는 긍휼의 하나님이 계시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다. 예수의 구원을 얻고 그를 의지하는 가운데서 우린 사랑을 한다. 그리하여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유 1:2).”
하시는 오늘 말씀으로 고개를 조아린다. 유다는 이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3).” 우리가 힘써 싸운다?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4).”
내 안에 늘 존재하는 유한 속의 무한대 같은 죄의 속성으로 나이가 들고 신앙이 깊다 하나 여전하여서 경건하지 아니하며, 불안과 불만으로 경건을 상실하게 하는 것들에 대하여 나는 사투를 벌인다. 내가 내 안에 들끓는 이와 같은 속성을 앎으로 나는 누구와 성경을 나누거나 서로의 일상을 이야기하다 기꺼이 나의 속됨과 어리석음을 강조한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은 그것으로 나는 더욱 주의 긍휼하심이 필요하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유 1:17).”
유다의 마음도 간절하였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0-21).”
우리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우리는 지켜야 한다. 이 은혜가 귀함을 알수록 부르심에서 머물 수 없다. 보내심에 응해야 한다. 받아들임은 귀하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그리하여 저에게 난, 나에게 저는 서로가 주를 생각하고 자신을 약함을 인정하는 데서 은총을 구한다. ‘거짓 교사들’이 너무 많다. 저마다 유튜브에 너무 빠졌다. 자신들이 보고 듣고 싶은 것만 고른다. 그것으로 사고도 세계도 굳어진다. 서로의 완고함은 공격의 대상을 혼동하게 한다.
유다는 간절하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유 1:17).” 거짓이 우리를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로 이끈다.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18, 19).” 이에 대응하는 능력은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0-21).” 기도함으로 긍휼하심을 기다린다. 하여,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22).”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25).” 여기에서 ①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의 궁극적인 본질로의 것으로, ② 위엄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신적인 본질이며 우리가 경외할 초월성이다. ③ 권력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④ 권세 곧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를 나타낸다. 이에 우린 보내심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
(시 111:2-3).
그리하여,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10).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0) | 2024.07.01 |
---|---|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0) | 2024.06.30 |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0) | 2024.06.28 |
또 사랑은 이것이니 (0) | 2024.06.27 |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0) | 2024.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