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전봉석 2024. 6. 28. 03:39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3

 

 

요한의 세 번째 편지는 가이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담겨있다. 마치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냈던 빌레몬서와 유사하다. 오늘 이 수신자 가이오는 흔한 이름으로 그 뜻은 기쁨, 환희이다. 가이오는 세 사람으로 압축된다. 한 명은 바울이 세례를 주고 후에 데살로니가의 첫 감독이 된 고린도의 가이오다.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고전 1:14).” 곧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23).”

 

두 번째 인물은 바울과 데살로니가와 아리스다고 그리고 에베소에서 고난을 같이 한 마게도냐의 가이오다.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행19:29).” 그리고 한 명은 바울의 마지막 선교 여행 그리스로부터 마게도냐를 지나 드로아까지 동행한 더베의 가이오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행 20:4).”

 

저들 가운데 세 번째 가이오가 나중에 요한 사도에 의해서 버가모의 첫 감독으로 임명되어진 것으로 보아 오늘 이 글의 수신자 가이오일 것이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하는 요한의 표현에서도 그리 추정된다. 이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개인적이고 따뜻한 마음의 표현을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빌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범사에 무엇을 어떻게 헤아리고 있는가? 하는 점을 알려준다. 이에 나는 엊그제 아이와 성경공부를 한 ‘헤아림의 원리’에서,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막 4:24-25).”

 

우리의 헤아림이 우리로 헤아림을 받는 척도이다. ‘헤아리다’는 동사로 단지 남을 이해하고 어떤 상황에 대해, ‘짐작하고 가늠하거나 미루어 생각한다’는 뜻의 사전적 의미 그 이상의 것이다. 새로운 시각으로 미뤄 이를 이사야의 <임마누엘>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이를 마태가 인용하여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하고 더욱 구체화시켰다.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영역이 우리의 헤아림의 범위가 아닐까?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하시는 말씀은 “어떻게 듣는가”로 발전한다. 마가에 앞서 누가는 이 동일한 말씀을,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눅 8:18).” 이를 직역하면 ‘조심하여 들으라’는 것인데, 그 안에 숨은 뜻은 똑바로 듣고 깨달으라는 의미다. ‘무엇’은 모르는 사실이나 사물에 대해 가리키는 지시대명사이고, 뒤에 붙은 조사 이목격조사 ‘을’이 그 주체의 목적을 묻는 듯하다. ‘어떻게’는 부사로 ‘어떤 방법이나 방식으로’를 뜻한다.

 

사도 마태는 이를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무엇을’에 대한 의미를 확실히 하였다. 곧 마태는 ‘남을 비판하는 것’으로! 누가는 ‘나눔의 원리’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곧 ‘어떻게’에 따른 지시를 ‘주라’는 행동지침으로 더욱 명확히 하여 강조하였다.

 

마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남을 ‘비판하는 것’에서, 마가는 ‘듣는 것’을 통하여, 누가는 나눔에 있어 ‘주는 것’을 주목하여 우리의 헤아리는 이 헤아림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남은 비판하면서 제대로 듣지는 못하고 행함이 없는 우리 자신에 대해, 바울은 직설적으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곧 스스로 헤아림으로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이와 같은 내면의 받아들임, 그 수용의 원칙을 세운 후에 바울은 ‘심음과 거둠의 원리’로 발전시켰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곧 우리의 헤아림으로 우리가 헤아림을 받는 이 원리는, 심은 대로 거두는 이 땅의 원리에서 장차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영원히 누릴 그 영광의 자리로까지 우리를 이끌어 간다. 이에 예수님은 우리의 ‘있고 없음’에 대하여,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 하신 것은, 그리하여 천국 복음을 전하실 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눅 19:26).”

 

이것은 ‘천국의 비밀’이다. 막연하게 천국에 것으로 우리의 구원의 목적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를 알고 성경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았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어떻게’ 그런 지경에서도 참고 인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풀리는 것이다. 곧 저들은 믿음으로 그 자신의 헤아림의 지렛대를 분명히 하였다. 이때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어제도 친구와 대화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설명하는데, 이렇듯 누가 물은 것을 내가 답을 위해 찾아보다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묵상하게 된다. 이것은 한 주간의 일로 무엇을 보고, 듣고, 느낄 때, ‘어떻게’ 그것을 전해야 할 설교로 연관 지어 설명할 수 있게 되는지 알 수 있다. 흔히 우리가 성경을 계시라 하여 그 언어를 계시언어로 하나님이 열어보이셔야 하는 것을 안다. 그러려면 우리가 흘려보내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실은 무심할 수 있는 게 없다. 바울의 표현으로 재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그러니까 친구나 아이와 나누는 말씀과 일상의 가벼운 이야기 속에 주의 진리가 숨겨져 있다. 우리 곁의 악한 권세로도 이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오늘 요한이 간구하는 ‘강건하기’는 우리 생애와 그 영혼에 부음 바 된다.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딤전 1:11).” 하여 우리가 허투루 일상을 담아 살 수는 없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3-5).” 여기서 핵심은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6).” 자족이었다.

 

곧 우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는 일체 자족의 비결의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그런 가운데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 믿음을 지킬 수 있었고, 이는 천국에 소망을 두는 삶으로 사는 그 한 날이 온통 자족함으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아, 나의 날들이 그러할 수 있기를. 이는 우리 주님이 먼저 그러하심인데,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2:11).” 그리하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된 영적인 생명’으로,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주가 날 위해 죽으심을 헤아려 바로 알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우리의 헤아림으로 우리가 어떤 헤아림을 받았는가는 자명해진다. 그러므로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 21:13).”

 

우리의 헤아림은 삶의 습관을 고치고, 서서히 변해가는 삶은 인격이 되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가 예비되었나니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지니라(미 6:8-9).”

 

하여,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오늘의 이런저런 사정이 끝은 아니다. 오히려 시작이고 어떤 의미이다.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이를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의 천국은 확장된다. 나는 나의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한 날의 이런저런 대화나 생각이나 말씀을 나눔에 있어 그러한 것들 속에서 주께서 전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경로를 알게 된다. 그것으로 이처럼 묵상글을 쓰고, 한 주간이 지나면서 설교원고가 작성된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빌 2:29).”

 

이에,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2-3).”

 

그러할 때에,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