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전봉석 2024. 6. 30. 03:28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 1:3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2:1

 

 

계시록의 서론(1:1-8)과 결론(22:6-21)은 조화를 이룬다. 문안 인사로 시작하고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1:4-6).”

 

축복기도로 끝을 맺는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2:21).”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1:7).” 때가 가까움을 말씀하신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3).” 이 예언의 말씀을 사자에게 보내어 종들로 알게 하셨다. 이를 요한은 첫 구절로 언급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1).”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22:13).”

 

이를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1:3).” 이에 ‘요한 계시록’이란 제목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해야 한다. 계시는 ‘말(言)을 벗긴다’는 뜻이다. 묵시는 하나님이 계시로 그 뜻과 진리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은 편지이며 지역의 교회에 읽혀지도록 쓰였다. 바로 은밀히 될 일과 속히 될 일을 알게 한다. 교회의 핍박을 가리키며 역사의 종말을 포함한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막 13:33).”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고 듣는 일은 복되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언급하며 시작한다. ‘본래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 보인다.’ 이는 ‘진리에 대한 통찰력’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를 바라고 구하여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보고 듣고 느끼고자 함은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살후 1:7).”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곧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이를 예수님은 우리로 알게 하셨다. 성부는 모든 섭리로 계획하셨고, 성자는 일을 성취하셨으며, 성령은 우리 안에 이를 열어 보이신다. 하여 ‘속히 될 일’은 하나님의 계시가 성취될 사건임을 알게 한다. 하나님의 갑작스런 개입을 통해 이루어지는 계시의 성취와 확실성이 우리 삶에 있다.

 

어제도 한 아이가 왔다. 벌써 서른 살, 초등학교 4, 5학년 때 만난 아이가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 몸에 문신을 하고 사는 데 별 의미가 없이 ‘되는 대로 산다.’ 아이의 그런 태도에 나는 여러 것을 권면하나 소용이 없다. 늘 건성으로 듣는 것 같으면서도 잊을 만하면 다시 이어지고 연결되어 여기까지 왔다. 같이 예배를 드리자고 권해보지만 그저 듣고 만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와의 이와 같은 연결이 언젠가 하나님의 개입이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지실 것을 안다.

 

오늘 말씀에서 이를 읽고, 듣고, 지키는 자로 주 안에서 살고 죽는 일에 대하여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4:13).”

 

그리하여 ‘깨어 옷을 지키는 일’에 대하여,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6:15).” 곧 주어진 삶을 정결하고 경건하게, ‘혼인 잔치’에 초청된 자로 사는 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19:9).” 이는 곧 첫 부활에 참여한 자로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20:6).”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22:7).”

 

어제 저 아이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누구보다 나의 전과 후를 같이하면서 내가 어떻게 주 앞에 다른 삶이 되었는지, 오늘을 살고 있는지 아이는 곁에서 다 보고 듣고 안다. 아이와의 이런저런 대화가 서슴없는 것도 그리하여 저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 하는 일도 머뭇거릴 게 없다. 아직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그렇듯 느닷없이 개입하실 것을 믿는다.

 

여기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에 대하여는 개개의 일로 우리 각자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시 89:27-29).

 

주께서 이루시고자 할 때 나 같은 자로도 주 앞에 돌이켜 세우셨다. 나는 그런 점에서 아이의 그런저런 태도나 생활에 조급하지는 않았다. 이는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그에 따라 나는 아이에게 혹은 곁의 한 영혼에게 있어 증인이 된다. 어제도 이런저런 아이의 이야기를 듣다 나 역시 그러했던 것을 인정하며 돌이켜 아이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였다. 이에 성경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 4:2).” 이를 받기까지 어쩌면 오랜 시간이 혹은 속히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나는 아이에게도 그러한 사실을 말하였다. 더 가까웠고 훌륭하고 실제 사회구성원으로 한가락 하며 살고 있는 아이들보다 저 아이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다. 하여 나는 오늘 말씀에서도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이 의미를 되새긴다.

 

요한 계시록은 자칫 너무 가까이 접근하여 나무도 숲도 보지 못하는 엉뚱한 데에 시선을 잃기 십상이다. 두 개의 주석을 같이 살피면서도 나는 그 의미를 너무 깊이 따라가지는 않는다. 다만 내 삶에서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일에 대해 묵상하며, 실제 내 곁의 저 아이와 같은 실체를 두고 나의 한 날을 살피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말씀은 살아 역사하는 힘이 실제 나의 삶에서 드러나신다. 이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나의 삶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이에 나의 하루는 죽음으로 향하지 않는다. 주가 이어가시는 한 영혼을 두고 나로 하여금 저를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심이다. 이를 위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19-20).”

 

이에 오늘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이와 같은 말씀을 곁에 두고 나의 한 날은 물론 내 곁의 한 영혼을 위해서도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14).” 이를 위하여 증인이 된다.

 

하여,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그러므로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시 112:1-2).

 

시간은 흘러 어느덧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아이가 나이 서른이 되어 여전한데, 은연중에 우리는 서로가 달라진 것을 안다. 나로 저에게 산 증거가 되길 기도한다. 줌으로나마 예배에 참여하길 권하고, 오늘의 이런저런 일에서 보다 나는 삶을 살기를 채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이 앞에서는 기꺼이 ‘꼰대’가 되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한다. 이에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7).” 주가 이루실 것이다.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에 대하여 나는 그리 대한다. 나는 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곁에 두심을 그리 이해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그러는 동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하여 나는 오늘도 일찍 눈을 뜨고 달려와 말씀 앞에 나를 앉힌다. 그렇게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이에,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4-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