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 2:4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 113:2
일곱 교회 앞으로 편지가 보내진다. 먼저는 각 교회의 사자들에게이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20).”
편지를 보내시는 이는 ‘인자 같은 이’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힌다. 일곱 교회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각 교회를 방문하고 쓴 보고서와 같다. 교회들의 행위를 검토하고 판단한다. 여기에 행위라는 말로 삶의 태도와 관습과 습관과 활동 등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각 교회마다 인내할 것을 권면하고 회개를 강조한다. 승리하는 자에게는 약속이 있다. 마치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하여,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이는 예수 재림의 때까지이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1:7, 22:7).” 그때에 우리의 승리에는 ‘생명의 면류관’이 약속되었다.
각 교회는 시대마다의 교회 특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에베소 교회는 1세기의 사도의 교회로 100년까지 이어져오며 부흥하다 열심이 식어졌다. 서머나 교회는 4세기 초 콘스탄틴 대제가 국교화 할 때까지 박해받은 교회이다. 버가모 교회는 콘스탄틴 황제의 후원으로부터 4, 5세기 국교 시대의 교회로 교황권이 형성될 때까지이다. 두아디라 교회는 교황 시대로부터 15, 16세기의 종교개혁 시대까지이다. 사데 교회는 16, 17세기의 생기 없던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18세기의 복음주의 부흥과 개혁으로 19세기 대선교 운동의 시대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의 계속될 미지근한 교회들을 의미한다.
보편적으로 모든 교회에게 강조하는 내용으로 적용이 가능하겠다. 일곱 교회는 이미 사도 요한 당시 실제 동시대에 다 존재한 교회들이다. 부활의 주님께서 친히 교회의 머리로 계신다. 그 사실이 각 교회의 첫 부분에서 강조된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서 각자 자신들의 행위에 답변해야 할 책임이 있다. 본질적으로 교회는 인내가 필요하다. 이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교회에 부여된 사명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을 두고 그리 강조하였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먼저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한다.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신다. 저는 교회의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을 아신다. 교회가 이를 참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도 아신다(2-3). 그러나 책망할 것이 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 하여 경고하신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5).”
에베소 교회는 에베소 도시와 관계있다. 요한은 그의 생애 말기에 에베소에서 살았다. 그 교회에서 가르쳤고, 그곳에서 장수하다가 죽었다. 에베소에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밧모섬에 유배되었다. 에베소는 아시아에 있는 로마 정부의 행정 중심지이다. 그만큼 찬란한 건물과 도로 여러 민족과 제의들이 혼합된 도시였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대동하고 고린도 2차 전도 여행 중인 주후 52년에 에베소에 세웠다. 바울은 에베소에 다시 와서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해 2년 이상 머물기도 했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행 18:18-19).”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오가시는 이는 교회의 사자들에 대한 그의 권세를 상징한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1:20).” 곧 그리스도는 에베소 교회에 전달되는 이 메시지의 저자이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되심과 자신이 활동적이며 역동적으로 은혜를 주시고 심판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알리신다. 그가 교회의 상태에 직접 관심을 가지시고 그것을 예의 주시하고 계시다는 것을 가리킨다. 주는 다 아신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즉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 하신다. 모든 교회에 그리 이르시고,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주가 모르심이 없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 2:24-25).”
이는 성경의 일관된 말씀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1-4).
주는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하신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신다. 자신들을 복음의 수종자, 자칭 사도라 하며 악한 자들을 용납하는 것을 에베소 교회를 통해 일깨우신다. 때가 그러하여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이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막 13:22).”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사칭하는 행악자들과 싸웠고, 디모데에게 거짓과 외식을 경계하라고 했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베드로 역시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인 거짓 선생들에 대해 주의를 언급하였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 2:1).” 요한도 다른 곳에서 많은 적그리스도가 이미 나타났다고 선언하였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음을 부인하는 것, 복음의 핵심을 위협한 이원론적인 시각과 이단의 특징, 기독교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거짓 선생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1-3).”
오늘도 여전하여 이와 같은 시험을 잘 견지해야 한다.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 인내와 오래 견딤으로 증명해야 된다. 고통스러운 압제와 환난과 억압에 포기하지 않는 것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1).” 이것은 교회를 향한 세상의 세상 됨으로써의 역할이다. 우린 이와 같은 시련으로 내실을 다지고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자라간다. 하여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하여 오늘의 이 상황 속에서 주를 바람으로 견디며 교회와 함께 하는 일, 이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이를 알고 우리는,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그러므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그런 가운데 자칫 우리가 처음 사랑을 잃기 쉽다. 내 곁의 많은 이들이 교회를 다녔었다고 과거형으로 말한다. 저들을 괴롭게 하는 뿌리가 어디에 있나? 했더니 모두가 공통되다. 주의 자녀라면 고통이 필연이다. 주를 멀리하고는 살 수가 없다. 곧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사느라 사는 데 정신 팔려 자신의 영혼이 죽어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에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에 대해 언급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죄 가운데서 누구도 스스로는 생명나무로 갈 수 없는 것을 안다(창 3:22-24).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이 기업으로 받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풍성함이다.
서머나 교회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말씀하신다. 하고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계 2:9).” 그러니 장차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10).” 곧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하신다. 둘째 사망은 육신의 죽음 너머 영원한 죽음의 영벌이다.
서머나 교회는 에베소에서 약 5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서머나에 있다. 서머나는 신약 다른 곳에 언급되지 않는 도시이나 고대의 기록에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디모데의 형제, 스트라데와 함께 서머나에 머물렀다. 2세기 중엽 순교의 죽음을 당한 서머나의 유명한 감독 폴리갑은 젊은 시절에 사도 요한과 주님을 뵌 그 밖의 다른 사람들과 친분 관계가 있다고 한다.
외적으로 고난당하는 교회로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e주가 아신다. 서머나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 닥친 환난을 연민하시며, 참아 내는 시험과 환난에서 전적으로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신다. 교회 지체들이 세상적인 번영과 부요를 자랑하는 도시에서 소외된 것을 아신다. 그러나 ‘실상은 부요한 자니라.’ 하고 인정하신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다. 이를 배설물로 여겼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우리에게 주가 약속하신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버가모 교회는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이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 2:14).” 어쩌다 그리 되었을까?
버가모 교회는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버가모 시에 있는 교회이다. 황제 숭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잡다한 이교의식 속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한 교회이다. ‘사단의 보좌가 있는 데에 교회가 있다’는 것은 버가모에 마귀의 영향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악한 환경 속에서 ‘복음의 능력’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곧 심한 박해의 시기를 맞이하게 될 서머나 교회와는 달리(2:10) 버가모 교회는 기독교 메시지에 적대적인 사단의 잔인한 횡포를 이미 경험하였다. 버가모의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의 시험을 당할 때 보여 준 흔들림 없는 태도에 대해 주님의 칭찬을 받았다.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이 계속해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었을지라도 그들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은 그들 가운데 교훈과 행실에 있어 일관성 없는 것으로 인해 그들을 꾸짖을 필요가 있음을 아셨다. 우상 숭배와 성적 부도덕과 관련된 것이다. 성도들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몇몇 사람이 이러한 죄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이에,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 2:16).”
오늘 네 번째 교회 두아디라 교회는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하신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 2:19).”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20-21).”
두아디라 시는 버가모에서 동남쪽으로 약 65킬로미터 떨어진 내륙 지방에 위치하였다. 옷감 염색이 활발한 무역 중심지였다. 유럽에서 바울이 맨 처음 개종시킨 두아디라 성읍 출신의 옷감 장수 루디아였다(행 16:14). ‘내가 네 사업을 안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은 칭찬할 것과 꾸짖을 것을 정확히 알고 계신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로 인하여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당시 이세벨 숭배와 니골라당 발람당(6, 14, 15)은 유사성이 있다. 각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사교적인 모임과 사회활동으로 비일비재하였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허용하는 사회생활의 면모를 보게 하신다.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한다.’ 다들 사회생활을 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논리에서 성령을 욕되게 한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9).”
오늘 말씀은 이르신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계 2:25-28).” 이를 오늘 우리에게도 알게 하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9).”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으로,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 113: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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