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계 4:1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 115:11
고난 속에서도 우리, 교회는 보호하심을 받는다. 역사 속에서 여러 예언의 장면이 그때마다 주어지듯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계 4:1).” 하고 주가 보이심을 확실히 하고 있다. “나팔 소리 같은” 말씀으로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하신다.
그리고 하늘의 왕좌를 보이신다.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다.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다.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을 켠 것이 보인다.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다. 앞 뒤에 눈이 가득하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다.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다.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다.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다.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다.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다.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찬송한다.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돌릴 때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경배한다.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말한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심을 알 수 있다. 일곱 교회를 통해 편지를 주심으로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늘에 열린 문이 있다. 첫 번째 문은 ‘기회의 문’이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 3:8).” 우리로 구원에 참여할 수 있게 문을 열어 놓으셨다.
두 번째 문은 ‘마음의 문’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마음 문 앞에 서서 두드리신다. 세 번째 문은 ‘계시의 문’이자 ‘위로의 문’이다. 열어 보이시며 우리로 오늘 당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위로가 있음을 보여주신다. 곧 말씀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심을 알고 우리가 위로를 받는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이에,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 22:14).”
우리가 이를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증거가 있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이로써 우린 기회를 붙들고 마음의 문을 열어 위로를 삼아 계시를 본다. “보라 나는 오늘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은 마음과 뜻으로 아는 바라(수 23:14).” 고로,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우리의 ‘하늘에 열린 문이 있다.’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겔 1:1).” 우린 저마다 소명을 받았다. ‘이리로 올라오라.’ 하는 부르심에 응하였다.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이후에 마땅히 될 일’ 알게 하신다. 우리가 이를 알면서 세상을 사는 이유와 목적이 달라졌다. ‘마땅히 될 일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이를 우린 성령의 감동으로 안다. ‘마땅히 될 일’의 중심에는 ‘보좌위에 앉으신 이’가 계시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시 47:8).
우리가 듣는 ‘반드시 될 일’에 대하여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하여 우리는 이 땅의 눈물을 하늘 보좌에서 씻는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103:19).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이 귀하다. 이를 알 때에 우리는 주께 구하여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대하 14:11).” 이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오늘도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았고, 주신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나의 삶의 모습을 비춰 바른 길로 인도하심을 받는다. 아이는 그렇게 매일 한 장씩 성경을 필사하며 이를 묵상한다. 또 아이는 성경을 읽다 일주일에 한 번 그 뜻을 더욱 알고자 하여 나누길 바라며, 오늘 두 구절을 내게 보냈다.
첫 번째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막 7:18-19).”
먼저 우리의 ‘깨달음이 없느냐?’ 하고 물으신다. 곧 우리의 무지를 드러냄으로 ‘깨닫지 못함’을 꾸짖기도 하신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8:17).” 또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4:13).” 또는 물위를 걸으신 기적에서도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6:52).” 등등.
이어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함을 모르느냐?’ 하고 반문하심은 우리를 더럽게 하는 본질적인 원인이 ‘밖에서 들어가는 것’ 곧 음식이 아님을 강조하시고,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20).” 이 말씀을 강조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음식은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갈 뿐이다.’ 그것은 다시 배설될 뿐이다. 마음과 관계가 없다.
마음은 우리가 살면서 근본을 이룬다. 우리로 인격적인 존재라 하는 것은 ‘지. 정. 의’가 우리 내면의 비물질적인 정신 곧 영혼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음식은 우리 영혼의 일과 무관하다. 그것을 탐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마음에 도덕적, 영적 문제가 달렸다. 음식은 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이어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0).” 이를 알려면 지혜자의 교훈을 찾아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곧 우리가 수군거리는 것은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고후 12:20).” 한다. 곧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두 번째 구절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6-37).”
예수님은 어린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신다. 당시 ‘어린아이’는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다. 방자하고 무분별하여 엄격한 교육이 필요한 존재다. 전쟁이나 노역에 별가치가 없다. 신분적으로도 낮아서, ‘가장 낮은 자’로 대표된다.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심을 설교하실 때 그리하여 어린아이를 데려다 안으시며,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하고 설명하신다.
즉 가장 낮고 천하며 약한 자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어린아이를 예수님 자신과 동일시하고 계시다.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7).” 가장 낮은 자를 동일시하시는 말씀은 어느 훗날에 의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심으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이는 오늘 우리가 살면서 누구를 또는 무엇을 행할 때에 가장 낮고 천한 혹은 사소하고 개인적인 일이라 해도 ‘주의 이름으로’ 이를 받을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도 말씀으로 혹은 사소한 일 가운데서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우리가 주를 알게 하신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6).”
고로,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 4:22).”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하시는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115:1).
하고 오늘도 이와 같이 주께 영광을 올린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11, 13, 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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