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전봉석 2024. 7. 5. 02:42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계 6:1-2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 117:1-2

 

 

각각의 인을 뗄 때마다 네 종류의 말 탄 자가 나온다. 흰말, 붉은말, 검은말, 청황색말을 탄 자들이 말세에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역사한다. 네 말을 탄 자들은 사분의 일만 해할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심판한다. 그러니까 전면적인 심판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아직까지는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는 심판이 남아 있다(1-8). 다섯째 인을 뗄 때에 순교자나 무죄한 자의 피에 대해 보응하신다(9-11). 여섯째 인을 뗄 때에 앞서 그 규모와 힘이 더욱 강력하여져 직접적으로 남은 전체를 상대하여 극심한 고통을 가한다.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고 산이 옮겨지며 대혼란과 공포에 빠진다. 때문에 재앙을 피하려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호소하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12-17).

 

죄가 들어오면서 우린 축복에 돌이키지 못하고 심판까지 간다. 하여 우리의 지혜는 주를 경외함으로 두려워할 줄 아는 데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말씀에 순종’한다. 가령 어제 설교 원고를 작성하면서 나는 앞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계기를 살펴보았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창 5:21-23).”

 

므두셀라의 이름의 뜻은 ‘창 던지는 자’로, ‘므두(죽다)+셀라(보내다)’로 ‘이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이 심판을 보내신다’는 의미다.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5:25, 27).” 곧 므두셀라가 죽던 날,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7:12).” 하나님은 홍수심판을 보내셨다.

 

이사야가 아들을 낳을 때에도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임이라 하시니라(사 8:4).” 하여 우리가 축적하며 쌓아온 인생은 허무하게 무너질 때가 온다는 것을 알게 한다. 곧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가 낳은 아들 ‘마헬살랄하스바스’가 아빠, 엄마라고 부르기 전에 다메섹과 사마리아 곧 아람 나라와 북이스라엘를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하신다. 마헬살랄하스바스의 뜻은 ‘노략이 속히 온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으로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서 모든 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거나 거두신다.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단 4:17).” 그리하여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35).”

 

이에 지혜자는 말하였다.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전 7:15).” 때론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렵다 해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13).” 우리가 미천하여 알지 못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끝까지 자기 고집대로 살거나, 돌이켜 회개할 수 있을 때 회개의 영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16-17).”

 

이로써 <지나치게>는 자신의 뜻과 의로 무엇을 선택하거나 정죄하는 일을 말한다. 하여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곧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이에 주를 경외함으로 올바른 삶을 살며 주의 인자하심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 구원은 영육간의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를 알고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하고 선포하였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교만이다. 교만은 자신이 어찌 하려고 하는 조바심으로 측정된다. 이에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사 8:6).” 곧 우리의 조급함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 교만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보다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더 기뻐한다. ‘실로아 물’은 기혼 샘물에서 발원하여 예루살렘 도성의 동편을 끼고 흐르는 ‘작고 가느다란 시냇물’을 가리킨다.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곧 급변하는 사회에서 하나님을 바라는 일은 자꾸 더디고 느리다. 세상은 상대적으로 모든 것을 경쟁하게 한다. 우리 ‘유다’는 지금도 ‘앗수르’의 침공을 받는다. 언제든지 우리의 환경은 우릴 공격하고 꺼꾸러뜨리려 한다.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로는 조바심이 나서 안 되겠다. 주의 도우심을 기다릴 시간이 없다. 이러다 도태되고 마냥 인생을 허비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르신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세상의 도움은 빠르고 확실한 것 같다. 그러나 ‘이김은 여호와께 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하고 지혜자는 선언하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하고 시인은 찬송하였다. 즉 모든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이렇듯 모든 성경이 지시하는 방향은 한 곳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내 안의 교만은 조바심나서 나의 선택, 나의 의지를 찾아간다.

 

“너희 민족들아 함성을 질러 보아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사 8:9).”

 

당장 모든 게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같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 같지만 “앗수르 왕과 그 모든 위력들”을 주가 덮으실 것이다(7). 그것이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쳐 임마누엘이여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였으나(8), ‘끝내 패망하리라! 패망하리라! 패망하리라!’ 하고 세 번씩이나 말씀은 강조하시고 있었다(9). 그리고 덧붙이시길, “너희는 함께 계획하라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해 보아라 끝내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니라(10).” 이 세상 주관자 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설교 원고를 정리하고, 이처럼 묵상하며 말씀을 되새기다 말씀 가운데 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마주한다.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시 96:10).

 

여기서 나는 ‘임마누엘이여’ 하고 주를 부른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결국 세상은 다 멸망하지만 주의 영원한 나라는 온 세상에 세워질 것이다. 그리하여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계 11:15).”

 

오늘 나의 확실한 평안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이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모든 성경이 주목하는 것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20).” 이를 위하여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18).”

 

이른 새벽 자다 일어나 교회로 나와 설교원고를 뒤지고,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새삼 되새긴다. 곧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이로써 오늘의 어떤 어려움 혹은 실패나 좌절로 우리에게 더해지는 기회는 회개였다. 아직 우리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있고, 돌이켜 주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평안할 수 있다. 오늘 시편의 전문은 이를 명료하게 찬송한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117:1-2).

 

이를 알 때에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후변화나 각종 사건 사고들이 외쳐 소리치는 게 무엇인지 들을 수 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4-5).”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4-8).”

 

눈이 껄끄럽고 희미하다. 시계를 보니 아직 세 시도 안 됐다. 나는 요즘 잠들었다 눈을 뜨면 그대로 씻고 교회로 온다.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바람이 세게 불어 길가의 나무들이 요동치고 쓰레기가 굴러다녀 을씨년스러웠다. 20여 분을 달려 교회로 오면 순간 모든 게 고요하다. 시간과 상관없이 나는 늘 같은 동선을 따라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앞서 빌립보서 3장 12절의 말씀은 어제 점심 때 친구와의 통화에서 무슨 의미인가? 하고 친구가 물은 것이다. 모든 상황과 일상의 소소한 것들은 물론 말씀과 말씀이 서로 연관을 이룬다. 나의 매순간이 설교 원고가 되는 것 같다. 오늘도 읽고 묵상하고 글을 쓰는 이 모든 내용이 누구에게 전해야 할 말씀으로 내 안에 고인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이것으로 새로이 허락하신 한 날을 산다. 몇 날이 더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때가 차기까지 나는 늘 이와 같은 시간 속에서 살기를 소원한다. 더는 뒤로 물러설 수 없다. 어제도 친구에게 물었다. 억만금을 준다고 해서 옛 생활로 되돌아가고 싶은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멀리하며 살던 그 시절, 우리가 살았다 하나 정작은 죽은 자로 살았던 때에 주가 우릴 위해 죽으셨던 것이니….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우린 복이 많다. 나는 복 있는 자이다. 하여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