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 7:14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 118:6-7
바람을 붙잡아 두신 것은 주의 진노가 아직 붙들려 있어 회개의 기회가 살아있음이다. 이는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6:17).” 하심에 대하여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7:1).” 하심을 따라 심판이 아직 수행되지 않도록 하셨음을 알게 한다.
그런 가운데 14만 4천의 숫자는 구원 받는 하나님의 ‘충족수’로 상징적이다. 하나님은 이 땅의 존재여부를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준으로 하신다. 사방을 가리켜며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사 11:12).” 이는 주만이 하실 것이다.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31).” 그러므로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바람은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이다. “그 때에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전할 자가 있어서 뜨거운 바람이 광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 하리라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하게 하려 함도 아니며(렘 4:11).” 그것으로 “그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그의 근원이 마르며 그의 샘이 마르고 그 쌓아 둔 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로다(호 13:15).” 그러므로 바람은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의 의미다.
“하늘의 사방에서부터 사방 바람을 엘람에 오게 하여 그들을 사방으로 흩으리니 엘람에서 쫓겨난 자가 가지 않는 나라가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엘람으로 그의 원수의 앞, 그의 생명을 노리는 자의 앞에서 놀라게 할 것이며 내가 재앙 곧 나의 진노를 그들 위에 내릴 것이며 내가 또 그 뒤로 칼을 보내어 그들을 멸망시키리라(렘 49:36-37).”
세상이 우릴 어떻게 여기든지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오늘 우리가 사는 동안 주의 나라, 주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으로 모든 게 대수롭지 않다. 세상 귀할 게 없다. 남들 다 추구하는 가치나 생의 즐거움을 두고,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 2:8).”
곧 우릴 범할 수 있는 세상 그 어떤 권세도 없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내 편이시다. 오늘 시인은 이를 노래한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 118:6-7).
막내가 모처럼 전화를 하여 이런저런 근황을 말하며 조만간 개척을 해야 하지 않을까, 여태껏 부교역자로 사역하다 더는 나이 들기 전에 이제는 결정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였다. 그런 마음을 주시는 데 따른 굳건한 확신이 필요하다고 말해주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로 나의 어떤 궁리와 나름의 방식이 아니라… 나로서는 뭐라 단정 지어 권하기 어려운 일이나 개척교회는 견디는 게 90이다.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할 때 그릇된 길로 가기 딱 좋은 길목이다. 각자 주가 주시는 여러 환경과 그 사정이 다르고 나름은 달란트를 가지고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겠으나… 기존의 성도들조차도 큰 교회로 흡수되는 판국이다. 개척이 어려운 시절이다. 같이 뜻을 합하는 이들을 얻기가 쉽지 않다. 수평이동이 아무렇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속된 말로 같은 값이면 큰 교회, 다양한 교류와 혜택이 있는 교회들이 점점 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늘어간다.
아무리 형제라 해도 뭐라 감히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내 이야기만 주로 했던 것 같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이게 맞나? 하는 회의와 갈등으로 혼자 씨름하는 게 개척교회 목회자의 숙명인 듯 싶다. 그럼 나는 어찌 견디는가 물어서 이렇듯 묵상글을 쓰는 하루와 설교 원고 한 편을 작성하는 일주일로 대표된다. 주가 붙이시는 한 영혼으로 마음껏 사랑하다 바람을 쥔 것 같이 어느 순간 또 사라지고 없는 게 흔한 일이라, 나처럼 들어앉아 스스로 소외된 목회자로서는 뭐라 일러줄 말은 없었다. 늘 보면 한 달 임대료와 교회 운영은 빠듯하고, 목회자 사례는 염두에 둘 형편도 안 된다. 그러니 온 가족이 교회를 이뤄가는 장점도 있다.
나는 오늘 말씀에서 오직 이 모든 행사가 주의 은혜로 이뤄지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사 45:22-23).” 나는 이 일을 ‘막장’이라 여긴다. 더는 앞으로 나갈 길이 없다. 뒤로 돌아 나와야 할 막다른 길에 서는 일이다. 그때 광부에게 막장은 앞으로 가로 막은 벽을 뚫어 길을 내고 그 길을 따라 탄광이 열리는 것과 같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로 자란다는 말처럼 척박한 땅은 농부의 숙명이다. 매순간 다시 갈아엎고 흙을 고르며 돌을 파내고 거시덤불과 잡초를 거둬내는 일은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거두기까지 거듭 되풀이 되는 일상이겠다. 그 일은 사뭇 지루하고 또 일정하여서 나의 하루 일과가 같은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같은 일을 두고 씨름하듯이 농부의 손길도 그와 같은 반복의 연속이다. 거기에 다른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볼까, 하고 들쑤시다가는 뿌린 씨앗도 채 싹이 돋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많은 목회자들이 곁가지를 치고 주객이 전도되어 산다. 그때야말로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학원으로 운영하며 교회를 이루려는 경우에는 학원으로의 일이 다반사라 그것에 들이는 시간과 열정이 사역의 길에 걸림이 된다. 누구는 카페나 작은 도서관 같은 일과 결합하여 교회를 또 운영하는데 그 또한 가만히 보면 말씀으로 씨름하고 있는 게 사치스러울 정도로 부산하고 바쁜 사업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호 13:4).”
무엇을 겸하여 같이 교회를 이뤄간다는 것은 이상처럼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 누구는 그러다 목회를 놓고 사업을 택하였다. 어디쯤에서 살펴보니 자신은 장사꾼이 되어 이문을 남겨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더란다.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하심이 더러는 야속하게 들린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유혹은 생활에 쫓겨 살면 다 그럴 수밖에 없다. 교회는 요행이 통하지 않는다. 대박날 리 없다. 한 영혼을 두고 씨름하는 일은 손해뿐이다. 그럴수록 주의 도우심은 투명해진다. 그럼에도 나는 늘 권하는 게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신다. 어떻게 표현하기 어려운데 하나님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데서 영광을 받으신다. 곧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눅 21:17-18).”
주가 이루시는 게 너무 선명하다. 말씀이 말씀으로 이어지고 그 어떤 자명한 수학 공식보다 말씀이 현실이 되는 사실 앞에서 기이해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그러므로 날마다 혼자인 가운데서도 주가 더하시는 일로 씨름한다. 나로서는 아픈 것도 일이라고 여기는 것은 주어진 한 날의 삶이 그것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내 곁의 아무개나 누구는 같은 아픔을 호소하거나 아름 아름으로 다른 이를 소개한다는 게 다들 상한 영혼이어서 이상하다 싶을 정도이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게 있다면 나는 의사가 아니라 환자로서 내가 아는 전능하신 의사를 소개하고 주를 찬송한다. 나도 같이 성경을 필사하거나 소리 내어 읽으며, 이와 같이 묵상을 글로 쓰거나 나의 일상이 설교로 녹아나도록 일주일 내내 하는 일이란 게 별 것 없다. 그러므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때로는 성경이 침묵하시는 지점에서 몇 날 며칠을 머물기도 한다. 가령 오늘 그 숫자 14만 4천의 의미를 무리하게 해석할 수 없다. 다만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겔 9:5-6).” 하실 때에도 그 의미를 어찌 이해하고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인침이 성령의 인치심이라면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1:13, 4:30).” 때로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더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지점에서도 주의 섭리를 인정하는 일이다. 받아들임으로 순종하고, 순종함으로 순응할 때, 생활은 연신 묻기를 ‘이래도 계속 갈래?’, ‘이 길이 맞나?’ 하는 회의와 갈등을 쏟아 붓는다. 이를 우리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신음하듯 주의 이름을 부르며 엎드린다.
오늘 요한은 이를 묘사하면서,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9-10).” 이는 놀라운 확신을 더함으로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11-12).” 결국 우린 주의 보혈로 흰 옷을 덧입었다.
스가랴가 본 것처럼,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사탄은 매순간 우릴 고소하듯 주 앞에 세운다. 그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2).” 주는 언제나 나의 편이시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3-5).”
나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덮으시고 “해 돋는 데로부터” 그 놀라운 역사는 이루어져서 말씀 앞에 나는 새롭다.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고관들을 석회 같이,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음 같이 하리니 누가 처음부터 이 일을 알게 하여 우리가 알았느냐 누가 이전부터 알게 하여 우리가 옳다고 말하게 하였느냐 알게 하는 자도 없고 들려 주는 자도 없고 너희 말을 듣는 자도 없도다(사 41:25-26).”
그러므로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계 7:12).”
또한,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14).”
나로서는 그럼에도 개척교회를 권하고 주 앞에 서길 바라는 것은 다른 그 무엇, 나의 어떤 궁리나 다른 살 길이 없음으로 넘쳐나는 풍성함을 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사는 날 동안 주와 대면하고 사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절실하고 간절한 자리는 없을 것이다. 그럴 때면 신기하게도,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18:1).
하는 찬송이 저절로 내 것이 되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5-6).
다른 그 무엇으로도 확신할 수 없는 한 가지,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7).
이와 같은 찬송과 고백이 날마다 솟아난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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