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전봉석 2024. 7. 8. 03:41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계 9:6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 119:49-50

 

 

이어서 다섯째 나팔을 불자 하늘에서 떨어진 별 곧 무저갱의 열쇠를 받은 사탄이 무저갱을 연다. 그곳에는 빽빽한 연기와 전갈과 같이 고통을 가하는 권세 가진 황충 떼가 올라온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고통 중에 있다. 황충들의 이름은 아바돈, 헬라어로 아불루온이다.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12).”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난다.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자,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다. 마병 수는 이만 만이다.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온다.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한다. 그럼에도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한다.

 

이상의 오늘 본문을 살펴보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두려움이 든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이를 느끼고 경계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게 힘이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7).” 그곳은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48).” 그 고통이 오죽한가 하면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49).” 이를 오늘 여기에서 느낀다!

 

이에 주어진 삶에 충실할 뿐이어서,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눅 16:20-21).”

 

그런 가운데서도 그 이름의 뜻과 같이 묵묵히 하나님을 바람으로, 종말의 때에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시가 된다. 저가 한 일이 없는 것 같으나 예수님의 모든 비유의 말씀은 익명이었는데, 특별히 저의 이름은 앞서 부르시고 시작하는 그 내용에서 단서가 있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가만히 또한 무던하게 견디며 살 수 있는 비결은 그 이름의 뜻과 같이 히브리어로 엘아자르 곧 엘르아살과 같은 뜻으로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자’이다. 그 형편은 어떠했을지라도 이를 붙들고 바람으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곧 오늘을 사는 그 자체가 씨름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날마다 이를 실감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오늘을 사명감으로 산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 9:16).” 그러니 때론 오늘이라 하는 이름의 날이 모든 날들보다 어렵고 힘들다 해도 주가 이 모든 날의 주인이심을,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12).”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그러므로 나의 이 한 날의 수고로 족하였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주와 함께 함을 여실히 느낄 때는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어렵고 힘들 때,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아무리 죽을 것처럼 힘들다 해도 주가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노아도 나사로도 묵묵히 같은 한 날을 살아내고 지켜냈을 것이다. 당최 소망이 없는 것 같고 하나마나 한 일 같은 때에도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9).” 그러므로 어떤 날은 아프고 또 어떤 날은 슬픔이 엄습하여도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오늘 이 자체로 주 앞에서 사는 일, 그렇게 하여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잠 24:1).” 이를 인정할 때에 감사로 받는다. 오늘도 이처럼 어지간하여서 주 앞에 나올 수 있었음을 알고,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사 57:19).”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0-21).”

 

그러므로 내가 어떠한가는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 주가 허락하시는 날동안 주 안에서 주와 함께 무던히 또 하루를 감사하는 것, 그러할 때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 14:32).” 오늘 이 한 날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이와 같은 믿음으로라면 못할 게 없다. 내가 감당하는 게 아니었다. 그럴 수 있는 힘도 노력도 주가 더하시는 것으로였으니 나는 다만 묵묵할 뿐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 곧 오늘의 이런저런 어려움이나 어떤 고통이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주를 바라고 천국을 사모함으로 이미 우리의 한 날은 천국에서의 하루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4-6).”

 

그렇게 눈을 뜨고 몸을 움직여 오늘도 같은 동선을 따라 주를 신뢰함이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하여 더러는 우릴 넘어뜨려 하는 권세 앞에서도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살후 2:8).”

 

이를 알고 또한 믿음으로 전한다.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아내에게 전하여야 할 말을 설교 중에 말씀으로 전하는 것이어서 나는 뒤로 물러나고 주가 하시기를 기도한다. 주께 맡김이란 나의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도 내가 어찌 하려 하는 의지나 노력보다 주를 바라는 데 더 유용하게 나의 고통을 받아냄으로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계 12:12).”

 

마음은 저 혼자 들썽거려 어떤 이의 선택이나 그의 행함을 두고 때론 서운하고 또는 답답하여도 나는 입에 담지 않는다. 속으로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내가 말하지 않고 내가 나서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봐야 달라질 게 없고 나는 저를 변화시킬 수도 강제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저로 인하여 나를 돌아본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어렵고 힘들지 않은데 어찌 기도가 나오던가? 우리의 간절함이란 참으로 간사할 따름이어서, 나사로는 그리하여 고통 가운데서도 한 날을 지켜내고 살아내는 일로 감사하였을까? 노아는 또 하루를 방주 짓는 일에 무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무도 같이하지 않고 누구라도 돌아보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저들의 환경이 저희로 주만 바라게 하였을 것이다. 세상이 아니라, 가깝고 또 새로운 어떤 일로 마음을 빼앗기기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그럴수록 주를 바람으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현실은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모두는 나를 어찌 여긴다 해도, 오늘의 기도가 오늘도 나로 주를 바라게 하고 주만 바라게 하며 주께로 모든 것을 맡기게 한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6).”

 

이에,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1).”

 

나는 오늘도 하루치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듯이 말씀을 찾아 말씀을 따라가며 되뇐다. 비록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하여 오늘도 이 한 날의 수고로 족할 것임을 알고,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시 94:12-13).

 

하여 오늘도 나는,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119:49-50).

 

하고 주께 모두 맡기고 엎드릴 뿐,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31-32).

 

그리하여,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주를 경외하게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37-38).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47-49).

 

이에,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5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