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전봉석 2024. 7. 9. 03:31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계 10:8-10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67, 71

 

 

일곱 우뢰가 말한 것은 기록하지 못하도록 금하신다.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는 그 손에 놓인 책을 알린다. “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계 10:2, 5).”

 

그 책의 내용이 숨겨져 있지 않다. 이 계시의 말씀은 온 세상에 선포되어야 한다.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하고, ‘천사가 갖다 먹어버리라.’ 한다. 입에 달고 배에 쓰다. 에스겔 선지자도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겔 2:8-9).” 이어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3:3).”

 

예레미야도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 하고 같은 경험을 한다. ‘'입에 달고 배에 쓰다’는 것은 그 메시지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고통을 느끼게 된다. 곧 말씀을 받는 것은 기쁨이나 그 내용이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담고 있으므로 전파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이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의 ‘상한 마음과 애통하는 마음’을 겸비하다 하신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렘 15:19).”

 

오늘 말씀에서 일곱 우뢰는 무얼까?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시29:3-4).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요 12:28).”

 

‘일곱 우뢰’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내용의 계시가 주어진 것이다. 그 내용은 ‘기록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를 바울도 경험하였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l-4).”

 

이 오묘한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하였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위탁하여 살아간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전화 통화로 성경공부를 하는 친구가 어제는 다소 심각하게 ‘마음이 무겁다’며 ‘나는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하였다. 성경의 부자 청년이 예수를 따르려고 왔으나 자신이 소유를 팔아 나누고 예수를 따르라 하실 때 근심하며 돌아간 내용과 자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은 그럴 자신이 없는데, 나름 한다고 하고 있어서 이게 위선적인 것 같기도 하고, 더 하고자 하는 마음은 부담스럽기만 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저에게 그와 같은 부담을 ‘거룩한 부담감’으로 설명하며 우선은 그조차 둔감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가 허다하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면서 그렇지 못한 자신과 그러라고 하시는 말씀 사이의 괴리에서 부담을 느끼는 게 복이라고도 하였다.

 

오늘 본문과 같이 ‘하나님의 뜻’은 숨겨져 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다. 그러는 데 있어 ‘말씀이 입에 달고 배에서 쓰다.’ 정작 삶으로 살아서 그 말씀을 따르려 할 때 이를 어려워하고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으로 괴로워할 줄 아는 것,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고 절규하는 바울과 같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 그러니 이런 나를 두고 스스로 어쩔 수 없음을 통감할 때,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

 

하여 주 앞에 엎드려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너나 나나 우린 모두 그러하여서 말씀으로 가까이 갈수록, 말씀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 사랑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여 애통하다. 그래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그러고 싶은데 그러기 싫은… 우리 자신의 이율배반적인 마음을 두고 ‘배가 쓰다.’

 

우리는 하나님의 처소로,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나는 친구의 부담과 그로 인한 마음이 어려운 것을 두고 저의 겸손함이 저의 아집과 교만과 욕심으로 괴로워한다는 사실에 반가웠다.

 

세상이 아무리 어떻고, 하나님의 심판이 아무리 맹렬한 불같다 해도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변함이 없으시다. 이에 ‘힘센 천사’가 우릴 보호하게 하신다. 말씀으로 굳건하게 하신다. 분명 두렵고 떨리는 심판이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창 9:12).” 하여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이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8).”

 

이 말씀은 우리의 것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3).”

 

오늘을 살면서 우리가 이 놀라운 감동과 감화가 없다면 무엇으로 이 부담을 견딜까? 부담은커녕 자신을 스스로 선히 여기는 무리도 허다하고, 그런 마음에는 별로 신경도 쓰이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무시하거나 외면하면서도 주를 믿는 자로 자신을 여겨 천국을 운운하며 사는 사람들은 결코 좁은 문으로 들어갈 리 없다. 그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하시는 말씀에서 자신을 제외시킨다.

 

그런 뒤 어느 날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저들은 저마다 자신들은 옳았다고 하나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하시는 말씀에서 우리는 떤다. 그게 나여서, 나는 아니라고 할 수 없어서 두렵다.

 

그런 가운데서도 친구는 여느 사역자 못지않게, 주일 오전 8시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를 돕느라 전날에 장을 같이 보고, 일찍 교회로 가서 그 일을 돕다 10시에는 성가대 연습과 함께 주일예배를 드리고, 오후에 이어지는 제자반 성경공부를 참여하였다. 나는 저가 이미 자신의 시간과 마음과 그 열심을 다하여 주를 사랑하고 있음을 말하였다. 그런 자가 더할 수 없는 자신으로 마음이 무거워서 부족하기만 하다. 저에게도 ‘말씀이 입에 달고 배에 쓰다.’ 삶으로의 말씀은 억지가 아니면서도 늘 부족하여서 송구할 따름이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가 주 앞에 설 때마다 드려지는 자복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19:103).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렘 15:16-17).”

 

말씀과 나의 현실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우리가 괴로워할 줄 아는 것, 그런 가운데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곧 나는 우리가 느끼는 부족함과 송구함으로 우리가 주를 사랑함은 확장되고 넓혀진다. 우리가 이 ‘책을 먹는다’는 것은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계 10:9).”

 

말씀을 듣고 소화하듯 삶으로 살아내는 일은 쓰디쓰다. 누가 요즘 개척교회를 다니려고 하고 어느 목회자인들 새로이 교회를 개척하려 하겠나? 기존의 교회들도 어렵지만 성도들은 아무렇지 않게 큰 교회로 흡수되듯 빠져가는데… 누구를 탓하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풍요 속의 빈곤’의 시대다. 넘쳐나는 말씀과 탁월한 목사들 사이에서 성도들의 영혼은 고갈을 경험한다. 입에 달고 맛이 좋은 것을 선호하지만 배에 쓴 것을 피해 떠돈다. 자신을 나누기 원하지 않고 서로는 다만 ‘친절한 타인’으로 화기애애하다. 돌아서면 저가 누군지, 어떠한지, 행여 자기 것을 내어주기 싫어서 애써 거리를 둔다. 그렇게 저마다 주일이면 자신들의 밀교(密敎)에서 자신들만의 유대감을 형성하고 산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 11:28).”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고로 우리의 ‘상한 심령’이 어디에서 ‘따귀 맞은 영혼’으로 자기 안에 빠져 우울해하는지를 알 수 있다. 복음은 입에 달지만 배에는 쓰다. 서로가 입으로나 친절할 뿐 그 삶을 서로 공용하기는 싫어한다. 행여 나의 개인사를 누가 알까 하여 큰 교회로 떠도는 사람들도 적지 않고, 귀가 가려워서 멀리로나 채우려고 성경공부를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곁에 있어 도울 수 있는 하루보다 멀리 있어 닿지도 않아 선교 여행 겸 잠깐의 감동을 위해 먼 나라로 간다. 입에 달고 배에 써서, 입에 단 맛으로만 신앙을 유지하려 진득하지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로 떠도는 성도들도 적잖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말씀이 나의 폐부를 끄집어내고 도려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저 좋고 좋기만 하길, 이를 따라 새로운 순례의 행진은 하나님께 향하는 수직적인 길을 버리고, 크고 더 화려한 수평적인 이동으로 전락하였다. 아,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7-19).” 그러므로 오늘도,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 10:10).”

 

이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119:67, 71).

 

우리에게 더하시는 고난을 사랑하는 것은 고난이 좋아서가 아니라, 고난으로 주를 더욱 바람이었다. 하여,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

(63, 74).

 

그러므로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76-77, 8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