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전봉석 2024. 7. 10. 03:55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계 11:12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3, 105

 

 

우리가 환난의 사거리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은 주를 두려워함으로 경외하기 때문이다. 오늘 시인은,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

(시 119:120).

 

그럴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이 복이 있음을 알게 한다. 이는 말씀으로 나를 굳게 세우기 때문이겠다. 오늘 요한은 환상 중에 갈대 지팡이를 받아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한다. 척량은 토지나 물건을 소유하고 이를 확인하여 보호할 때 필수적이다. 당시 극심한 환난 가운데서 교회들이 힘겨워하는 것을 보시고 우리를 측량하심으로 환난 중에 홀로 두지 않으심을 알게 한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5-6).”

 

이는 예수님의 기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2).” 이에 성경은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들로 하여금 주께로 집중하게 하심으로 측량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46:1).

 

이 큰 위로와 확신으로 마지막 때를 살면서 우리는 그 중심을 굳건히 한다. 이는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행하여질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마 22:13).” 나름 열심을 다해 주를 알고 신앙을 지켜가면서도 자신이 부족하여 마음의 어려움을 느끼는 이에게 나는 그의 부담이 복이 있음을 다시금 설명하였다. 오히려 이를 알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을 그만하면 됐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자의 미래보다 소망이 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우리가 주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입에 머금어 읊조릴 때에 달고, 이를 삶으로 실천할 때에 힘에 겨워 ‘배에 쓰다’ 할지라도 주의 말씀으로 사는 것은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주를 섬김으로 그 끝날의 영광을 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어떤 어려움 혹은 회의나 갈등 속에서도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이를 아는것이 그 무엇보다 복이 있다는 것을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5).”

 

이에 우린 더욱 주를 사랑할 때 애통한다. 애통함으로 온유하다. 심령이 가난하여 주만으로 만족함을 얻는다. 이에 우리는 고통이 가중될 때에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단 9:3-4).” 하고 주를 바란다.

 

저녁에 아이가 보내온 성경 두 구절이 있다. 그것도 다른 날보다 일찍 출근하게 되어 30분 일찍, 7시 반에 할 수 있는가? 하고 물으면서 말이다. 새삼 이와 같은 마음이 귀하고 반가운 데서 놀란다. 그러해서 못하겠다, 할 수 있는데 오히려 출근 전, 아침 시간을 그리 당기면서까지 할 수 있는가 할 때… 아, 우리 주님이 어떨 때 우리를 더욱 사랑스러워하시고 기뻐하시겠는가 알 것 같았다.

 

먼저 하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막 10:2-4).”

 

당시 바리새인들은 틈만 나면 예수를 시험하였다. 오늘 이 구절은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신 24:1-3).” 하는 실질적인 예시로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4).”

 

우리의 순결을 염두에 두고 교훈하는 내용이다. ‘수치되는 일’을 짐작할 때 ‘이혼’하는 것을 타당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 일은 논쟁의 문제가 아닐 텐데도 율법적으로 엄격한 파인 ‘샴마이파’는 위의 수치되는 일을 간음으로 보고 간음한 이유 외에는 이혼을 못한다고 하였다. 다소 자유 파에 해당하는 ‘힐레파’는 무슨 조건으로든지, 가령 아내가 밥을 태웠을 때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묻는 이유는 예수께서 모세의 ‘율법주의자’보다 차원 높은 도덕을 가르치셨다는 데서 의문을 품은 듯하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더 나아가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29-32).”

 

곧 더 높은 도덕성을 강조하시는 것에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은 논쟁에 예수님을 끌어들여 자신들 편에 가담시키려 했던 것 같다. 혹은 공격하려는 빌미로 삼거나 하여 당시 헤롯이 이혼하였고 세례요한이 이를 반대하다 죽은 사회적 이슈를 가지고 어떤 대답을 들어도 예수를 곤경에 처하게 할 것이라 여겼던 것 같다. 이에 예수님은 대답에 앞서 성경의 근본 곧 하나님이 처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데 따른 취지를 설명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 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막 10:5-9).”

 

곧 우리는 하나로 우리가 완악하여 서로 갈라서는 데 따른 근본적인 잘못이 어디 있는가를 알게 하신다. 즉 당시 모세의 설명을 문자적으로 취하여 ‘이혼증서’를 써주면서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 그 자체가 우리의 불순함과 그릇됨을 나타낸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그런 의도로 지으신 게 아니다. 모세가 하고자 했던 말의 근원을 밝히심으로 저들의 시험에 따른 질문에 답을 대신하신다.

 

또 다른 하나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4-25).”

 

이에 근본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선하심을 의심 없이 신뢰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 속으로 던지우라’고 하면 그리 될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고 실제 우리 안에 일어난 이보다 더 큰 역사임을 알려주신다. 이때 ‘의심 없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러한 믿음은 끊임없는 기도로 이루어지고 다져진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부족한 신앙과 믿음은 값없이 받은 것에 대한 온전한 보존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귀한 것일수록 더욱 소중하고 귀히 여겨 그것을 보관하고 소유하는 데 있어 수고와 노력이 비례한다. 요즘은 개인금고나 그 갑절의 보안을 강화하여 ‘어떤 귀한 것’을 보관하려하듯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보안이며 안전이다. 즉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 안에 보관하고자 하는 일이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눅 11:9).” 하고 약속하신 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은 결코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이를 빗대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태도’에서 기도를 효과 있게 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를 갖추게 한다. 그래서 기도하다 누구에게든지 어떤 불의한 일을 했던 게 기억나면 일단 그것을 용서하고 화해하라고 하시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령 오늘 날과 같이 점점 더 첨단화되는 모든 영역에서 보안은 강화되고 그에 따른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믿는 자들로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믿는 자로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상대적인 게 아니라 절대적이다. 스스로 용서하심을 받은 데 따른 감격의 무게만큼 남을 용서한다. 회개의 정도만큼 은혜에 감격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자신이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에서의 용기는 비례한다. 그러므로 용서하지 않으면 충일한 감사도 찬송도 어렵다. 하여,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하신 것도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 하심이고, 기도가 막히지 않음으로 우리가 받은 믿음이 값진 그대로 보존되어 그 가치가 높아지는 것을 위하심이다.

 

이상과 같이 나는 아이의 질문에 답을 구하고, 나의 소소한 일상 가운데서 주의 섭리와 역사하심을 발견한다. 더욱이 말세를 산다고 할 때 오늘 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은 기도이고, 성령의 역사이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가능하다. 기도도 내가 하는 것 같으나 내 안의 주의 영이 하게 하실 때 할 수 있었다. 곧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그러므로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

 

그러므로 서로 뭔가 문제가 생겨 이혼을 하네 마네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근본을 살펴 잃지 말아야 하고, 그것으로 행여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이에 오늘도 주의 천사는 나를, 교회를 측량하신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계 11:1, 5).” 어떠하든지 주가 지키신다. 이에,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

(119:92, 94).

 

그리하여,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97, 103, 10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