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3-4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 127:1
나는 할 수 없으나 나로 하게 하신다. 나로 하게 하실 것을 믿음으로 나는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면 우리보다 덧없는 존재도 없다. 누구의 어려움이 혹은 슬픔이 도대체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도 없으나 그래서도 주를 바란다. 서로가 서로를 다 알 수 없는 것은 그 슬픔과 아픔의 무게는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누가 어떤 게 더 하고 덜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저마다는 그 어려움으로 주를 바라거나 멀리한다. 자신을 겸손히 하거나 끝내 자신이 어찌 하려고 자긍한다.
우리에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 우린 반드시 이곳에 이른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7).” 나는 속되고 가증하나 나는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3-14).”
그러니까 내 안에 어찌 이와 같은 마음을 주시는지, 한참 힘들고 어려울 땐 주님, 주님 도와주세요,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있다가 조금은 괜찮은 듯 할 때 터져 나오는 감사는 크다. 가령 밤새 고통으로 뒤척이다 간신히 일어나 간신히 옷을 챙겨 입고 간신히 교회로 올라왔다. 습관을 따라 묵상 글을 쓰고 주의 이름을 부르다 잠깐 잠을 청하고 일어났을 때 조금은 나은 듯 좋아진 것으로 이만하면 됐다, 하는 감사로 다시 또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렇듯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이에 우리에겐 말씀이 있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 102:26-27).
하여,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66:22).”
이와 같은 말씀을 누구에게 전하거나 함께 나눌 때 나의 마음은 뜨겁다. 앞서 간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자신들의 믿음을 지킬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다 알겠다. 우린 할 수 없으나 우리로 할 수 있게 하시는 이가 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아내와 두 딸을 잃고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하는 기도 내용이 찬송이 된다. 누군 일생을 우울감으로 시달리며 자살충동도 여러 번 겪으면서도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은혜라…’ 하는 기도가 찬송이 되었다. 바울을 비롯하여 제자들 대부분은 순교하였고 그러는 중에도 더 좋은 소망을 잃지 않았다. 저들은,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오지만,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이를 나는 누구와 나누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우리로 할 수 있게 하시는 이가 하게 하실 것이라 말하였다. 나는 감히 무엇도 장담할 수 없고, 내가 아는 나는 은근도 끈기도 없는 나약한 존재이나 주가 함께 하심으로 나의 눈물이 그 고통의 탄식이 기도가 되고 찬송이 되게 하실 것을 믿는다. 이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곧 그날이 오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이 모든 일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점심께 친구와 성경을 나누다 저의 이런저런 서러움 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두고 우린 감사하기를 구하였다.
한 선교사 사모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젊은 사역자 내외는 선교사로 파송되어 이국의 땅으로 갔다. 그곳에서 세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는 풍토병으로 잃고 둘은 교통사고로 한 날 한 시에 잃었다. 그러다 선교사 역시 결핵으로 죽자 본국에서는 선교일정을 취소하고 귀국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사모님은 가족들이 다하지 못한 주의 일을 감당하기로 하고 그곳에 남았다가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어린 불량배들에게 끌려 다니며 몇 날 며칠을 강간과 폭행을 당하다 버려졌다.
어디서 들었는지 읽었는지, 그런 가운데 나는 사모님이 자신이 겪은 일을 덤덤하게 글로 쓰고 그 책은 많은 이의 심금을 울리며 더불어 주를 찬송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고 물으면 나는 모른다. 나야말로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고 자신할 수 없는 자이다. 그래서도 나는 기를 쓰고 묵상글을 쓰고 억지로라도 교회로 나를 끌어다 놓는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이 일을 사명으로 알고 묵묵하기를 바라며 이 일을 행한다. 누가 물으면 기꺼이 나는 나의 아픔과 그런 가운데 주가 계심을 알게 한다. 누구의 어떤 슬픔 속에 주의 놀라운 인자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럴 친구가 아닌데 저는 전화 저편에서 소리 죽여 울음을 삼키는 것 같았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하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고백이 이제는 내 것이기를 간구한다. 그러므로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그러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 슬픔도 아픔도 맡기신 것이다. 이를 붙들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오늘 내 곁의 이런저런 일들이 내게 주는 교훈을 듣게 된다. 세상이 악한 것이나 어렵고 힘든 일들이 궁극적으로는 우리로 하나님을 더욱 찬송하게 한다. 나는 이 역설을 산다.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주를 바란다. 내가 감당하기 어려워서 주 앞에 맡긴다. 나의 여러 사정이 주를 향하게 한다. 이것으로 복이라 여긴다. 같은 어려움 속에서 주를 멀리하고 외면하고 살 때도 있었다. 더욱 완고하여져 주를 원망하면서 말이다. 그러한 때도 주가 함께 하셨고, 나를 용서하였음을 나는 이제 안다.
이를 어제 친구와의 대화에서 전할 수 있어서 감사하였다. 그런 말에 친구 또한 공감하며 주를 바라는 데서 감사가 넘쳤다. 전에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면막을 하였을 텐데, 친구도 이제는 주의 은혜를 맛보아 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에,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4:8).
이 복을 어찌 세상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저 이 땅에서의 일로 가름하려다 가인은 살인을 했고, 유다는 목을 맸다. 우리는 이제 매순간 우리 곁에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산다.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눅 10:9).”
나는 요즘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의 위대함을 새삼 인정한다. 저는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불구였을 뿐이고, 부자 집 앞에 버려져 구걸이나 하며 헌데를 앓고 더러운 몰골로 생을 마감한 것 같으나 바로 그 맡기신 삶을 다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람으로 가능하였다. 저의 행위나 어떤 고백도 일체 없어 무엇으로 저가 천국에 갔을까? 하고 누가 물을 때 나는 그의 이름이 단서였다고 설명하였다. 예수님은 자주 비유로 말씀하셨다. 모든 비유는 익명으로 하셨다. 그런데 단 한 번 ‘한 거지, 나사로라 이름하는 이’의 이야기에서는 저를 거명하셨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하시는 이와 같은 말씀을 저의 형편에서, 어느 사모님의 회고록에서, 잔혹하였던 욥의 슬픔 중에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상황에서 감사와 기도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지 못할 것 같은데… 함께 하시는 이가 하게 하실 것을 믿는다. 나는 두렵고 무서워서 치를 떨지만,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그가 나의 하나님이시다. 오늘도 나로 새벽에 눈을 뜨고 주 앞에 나아오게 하신 이시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6-7).”
이기게 하시는 이로 인하여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이김은 여호와의 것이라.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10-11).” 아, 우리가 곧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12, 26-27).”
오늘은 이와 같은 말씀에서 새삼 내가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다짐하게 된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되게 하려 하신 이가 되게 하실 것이다. 곧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이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127:1).
나는 할 수 없으나 나로 하게 하신 이는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5-17).”
이를 위하여,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127:2).
오늘의 평안은 일련의 시련 속에서도 주를 찬송하게 하여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벧전 5:10-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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