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전봉석 2024. 8. 14. 03:41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창 24:58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시 3:3-4

 

 

한 세대는 가고 다른 한 세대가 온다. 모친 사라가 죽고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하는 내용이다. 성경은 일러, “너는 삼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제물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출 34:15-16).”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의 상대가 아니라 주를 경외함으로 합하여 주의 나라를 바라는 자여야 한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단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사람의 본분을 다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사명으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루 중 일부가 아닌 전부가 주의 날이고, 매순간이 주와 함께 하는 예배여서… 나는 누구를 위로하다 그런 우리를 세상이 괴롭게 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말해주었다.

 

저는 늘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다. 더러는 저의 어떤 면이 그리 여김을 당하게 하는 것이겠으나 그만큼 세상은 악하여서 서로가 하나 된다. 요령껏 서로 사귀고 눈치껏 일을 떠넘긴다. 그런 가운데 아무개는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한다고 하는데 그게 늘 미움 받는 일이다. 더욱이 요즘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싼 임금과 다수로 섞여 있어 저들 힘이 강한 모양이다. 결국 또 회사를 그만두고 물러나서 사는 데 따른 어려움을 토로하며 기도를 부탁하였다. 이런저런 사연이야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겠으나 같이 악다구니 쓰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는 데는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걸 저는 안다. 이런저런 말끝에 그러므로 주를 바라자고 권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린 결코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곧 우리가 더는 죄인이 아니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어째서 우린 당하고만 있는지, 혹은 어려움을 자차하듯 참고 마는 것인지는 성경이 이르신 것과 같다. 곧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

 

이를 우린 할 수 없으나,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6).” 주가 이루신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그런 것을 우리가 마치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것처럼 사람을 판단하고 세상의 권세 잡은 자를 대적하며, 사회구원을 운운하는 일 자체를 성경이 금하신다. 다만 주가 인도하실 것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3).

 

‘나를 위하여’보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곧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사 48:9).” 이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의지가 또 있을까?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나라들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겔 20:14).” 결국 이 모든 일의 처음과 끝, 영원에서 영원까지의 일은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손을 막아 달리 행하였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여러 나라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22).”

 

하여,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나는 이에 말씀을 의지하며 산다. 주의 날을 바라며 어떤 어려움이나 힘든 상황을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4).” 하는 에스겔의 선포는 힘이 된다. 이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말 1:11).”

 

그리하여,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하나님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이루실 것이다. 그때에,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그러므로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1).”

 

우리로 오늘을 사는 데 있어, 더러는 어떤 억울한 심정으로 주 앞에 엎드려 고하는 모든 것이 서러울 때도 있지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에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누구에게도 권하기를 주를 바라자, 주를 바람으로 지금의 어려움과 슬픔을 주께로 찬송이 되게 하자, 그것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하고 약속하신 말씀 앞에 서는 일이다. 그리 전하면서 나 역시 힘을 얻었다. 하나님은 나의 처지와 사정을 다 아신다. 오늘의 환경 속에 주가 계신다. 그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나로 하여금 의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이는 항상 하나님이 먼저 준비하신 일이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 65:24-25).”

 

이 놀라운 역사가 오늘 아브라함의 종에게 나타나 이삭의 배필 리브가를 얻는 일에 있어 모든 게 순전하게 풀리게 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우리가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실망과 낙심뿐이나 이처럼 말씀으로 주를 바라고 구하여 그 답을 얻을 때,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5-16).”

 

어제 저녁에도 ‘아이의 성결구절’이 들어와 있었다. 이를 가지고 오늘 아침 아이의 출근 전에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잠시 살피면,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1-42).”

 

‘마르다야 마르다야’ 하고 예수님이 저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다. 이는 예수님도 마르다의 정성스런 행위에 대해 아신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더욱 안타까워하시며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하실 때, ‘염려하다’의 어원은 헬라어 ‘메림나스’로 ‘흩어지다’, ‘나누어지다’는 의미의 헬라어 ‘메리조’에서 파생된 단어다. 결국 ‘과도한 욕구’로 인해 어지럽게 분열된 심적 상태를 나타낸다.

 

지혜서에서 솔로몬도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여기서 ‘지나치게’는 스스로 애써 과도하게 내는 욕구이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주를 경외함으로 주께 맡김이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이에 오늘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마리아를 이르시며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2).” 곧 마리아는 예수를 경외함으로 말씀 듣기를 택하였다.

 

‘근심’은 문제만 야기시킬 뿐이다. 예수께 대한 열심으로치면 마르다가 마리아보다 겉으로는 더 수고가 많다. 그러나 마르다는 육체적인 배고픔을 해소해 줄 먹을거리를 위해 애쓰고 있고, 마리아는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생명 양식, 말씀 듣기에 더 소중한 마음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를 시인은,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3-105).

 

이와 같은 고백으로 ‘몇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를 두고, 우리가 이 땅에서 분주하나 영적으로 귀한 것은 오직 하나, 그 ‘좋은 편을 빼앗기지’ 않을 마리아처럼, 먹잇감을 입에 물고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우린 이 한 가지를 붙들고 씨름한다.

 

또 하나는,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4-5).”

 

여기서 ‘내 친구’라 부르시는 우리를 두고 먼저 살피게 된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4-15).” 곧 우린 예수님과 그만큼 친밀한 관계이다.

 

이에 주가 이르신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즉 우리의 죽음은 정하신 바라. 결국 ‘마땅히 두려워할 자’는 누구인가 하면,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하신다. 이는 하나님만의 고유권한이시다. 사탄은 우리 몸을 죽일 수 있어도 우리 영혼을 지옥에 던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지옥, 불못에는 자신이 들어갈 곳임을 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4).” 여기서 사망과 음부는 세상 권세 잡았던 사탄이다. 즉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15).” 이에 예수님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5).” 하신다.

 

우리가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주의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 사랑에 비례하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이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오늘을 살면서 우리를 어렵게 하고 더러는 낙심하게 하는 여러 것들 앞에서 주가 다 행하심을 찬송하며,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135:6).

 

그러므로 우린 오늘도 시편의 시선과 언어로 주께 찬송하며 구하기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3:3-4).

 

그리하여,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6,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