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전봉석 2024. 8. 15. 02:3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창 25:2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시 4:3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그의 생산능력은 유지되어 137세에 아내 사라를 잃고,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창 25:1).” 이후 그는 여러 명의 자녀를 낳는데, ‘띠끌 같이’ 많은,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13:16).” 또한 ‘뭇별과 같이’ 많은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15:5).” 자녀를 낳았다. 하나님의 약속은 때가 이르러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신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11-12).”

 

그러므로 성경은 일러,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결국 우리는 주의 말씀이 닿는 곳에 산다. 저들이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창 25:6).” 그러므로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2-33).” 오늘 우리가 신약을 살면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아무런 조건이 없는데도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데 있어,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하여 이를 바울은 신학적으로 확립하면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하는 이 놀라운 복음의 진수를 알게 한다. 고로 성경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하심으로 우리는 말씀 앞에 선다.

 

믿음은 결코 내가 선택하여 얻은 게 아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이에 오늘 리브가의 복중에 있을 때, 아직 저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2-23).”

 

하는 데서 우린 놀란다. 우리의 믿음과 구원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미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바,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하시는 히브리서의 말씀이 강력하게 와 닿는다. 이에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3:20-21).”

 

이에,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8).”

 

하는 것과 같이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1:9, 3:11).” 이 놀라운 진리 앞에서 누구도 그 자신의 믿음으로 자신이 자신할 수 없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불가항력적인 은혜이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값이 주신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이르시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어제도 가정예배를 드리며 자칫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자신이 확신하는 것으로 여겨 신념으로 혹은 그의 이상에 따라 추구하는 바가 아님을 강조하였다. 우리의 사탄 마귀도 광명한 천사로 자신을 위장하며 누구보다 먼저 예수를 알았고 저가 하나님이심을 두려워하였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누가 어디로 의료봉사를 다녀와 어떤 이의 헌신과 봉사에 대해 극찬을 한다. 또한 거기서 만난 수녀원의 어디에 챙겨간 의약품을 전달하고 왔는데 그때 그들의 선행과 희생이 감격스러웠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 신학자에 의해 전파되고 있는 구원론으로 저는 사람이 비록 예수를 믿지 않았음에도 저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며 선한 영향력을 운운하여 전파한다. 심지어는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으니….

 

그리하여 믿음의 우리의 의지나 선택으로 추구하여 이룬 것이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노아도 아브라함도 저들은 당대에 은혜를 입어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이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8, 10).” 결코 믿음은 하나님 외에 다른 그 누구에 의해, 무엇에 따라 자생할 수 없다.

 

오늘 말씀은 이를 ‘언약의 자손’ 외의 그 어떤 경우도 예외인 것을 알게 한다. 그렇게 ‘에서와 야곱’은 태중에서부터 갈리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곧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이며 그 누구의 선행과 의로움으로 가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에 베드로는 깨닫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고로 이 모든 게 주의 은혜요 진리 안에서의 일이었다.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욥 30:23).” 저가 이를 알기까지 견뎌야 했던 고난과 역경에 대하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앞서지만 이로써 저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그렇게 우리들 또한 한 생을 살면서 사는 동안에 여러 어려움 속에서 주를 본다.

 

가령 나는 요즘 육신의 고통에서 간절하게 주의 이름을 부른다. 어제도 목과 어깨가 계속 뭉쳐서 주사치료를 하는데, 양쪽 어깨에 주사를 넣는 것도 고통이었으나 각각 옆으로 엎드려서 목 어디쯤을 정확히 조준하여 두 대씩을 놓는데, 그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그렇게 얼마동안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내게는 더 큰 두려움이었다. 그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눈을 감고 열 번 백 번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가 함께 하실 것을 바라고 구하는 일이었다. 돌아보면 나의 날들이 여느 삶보다 이런저런 고단함으로 시달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너를 특별히 사랑하신다.’ 하는 부친의 말씀이 이를 내포하고 있었음을 알겠다.

 

어릴 땐 어려서 뭘 알겠나만 힘들고 외로워서 주를 찾곤 하였다. 사춘기 때는 말할 것도 없이 나의 학창시절은 지옥 같았다. 성인이 되어서 마치 억하심정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산다고 살면서도 그때마다 염치없으나 나는 항상 주를 바라고 또 의지하였다. 그때도, 그 죄로 허물로 죽은 줄 알았던 때에도 나는 늘 주를 바랐으며 그때마다 주는 항상 나와 함께 하셨고,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때에도 나를 돕고 나의 편이 되셨다. 지금은 이를 인정할 수 있다. 그때는 이를 한사코 부정하고 외면하면서 살았다. 그와 같은 나의 어리석은 날들 가운데서도…,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이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이것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곧 우리는 모두 이 육신을 떠나 주의 나라에서 주의 영광의 날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러므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의 노년을 우리가 살피면서,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 115:3).

 

이를 알게 하시기까지,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2-3).” 그러는 동안 아,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렘 32:17).”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삶에서 주의 영광을 산다. 곧 우리가 꿈꾸고 막연히 기대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오늘 이 한 날에 우리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이는 그래서 허상이 아니고, 추상적인 게 아니며, 관념도 아니고, 이상도 아니다. 이에 따른 실제는 그 실체로 사는 자들만이 안다. 하여, 요즘 같은 세상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23-24).”

 

거짓이 아무리 난무하고 가짜가 더 진짜 같은 세상에서도 우리는 그리하여 확신하는 바,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우리가 우리의 각오나 다짐으로 알거나 확신하는 게 아니라, 이를 내 안에 두신 이에 따라 점점 어지러운 세상에서,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1-12).” 이와 같은 현상을 보며 더욱 더 주를 바라게 된다. 주만 의지하게 된다. 주 앞에 엎드려 아뢴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4:1).

 

이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3).

 

내 안에 두신 이 믿음을 따라,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5, 7).

 

그러므로,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