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전봉석 2024. 8. 17. 02:50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창 27:19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시 6:3-4

 

 

이삭의 분별력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 분명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3).” 하신 말씀이 있었음에도 자신의 뜻에 따라 큰 아들 에서에게 축복하고자 한다. 실제 눈도 어둡고 귀도 둔하여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감당할 수 없었다.

 

곧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이렇게 달라서 그러한 인간의 의지를 뒤집어서도 하나님은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이로써 우리는 말씀을 따라 살게 되어 있고,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이니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사 43:13).”

 

이와 같이 주가 하시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설령 야곱이 꾀를 내어 형 에서에게서 축복을 가로챈 것 같으나 실상은 저에게 약속된 것이었다. 이를 또한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알지 못하여 거짓으로 꾸미고 자기 뜻을 따라 둘째 아들 야곱을 그 앞에 세우려한 것이니,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창 27:13).” 과연 저이가 복중에 아이를 둘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리한 것인지, 모르고 그리한 것인지….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행 11:17).”

 

어떤 일에 우리의 마음은 항상 앞서기 마련이고 그 마음이 더러는 하나님의 뜻을 어지럽히는 것 같으나 이 또한 선으로 바꾸시면서까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다. 그렇다면 우리의 오감은 하나님의 뜻을 밝히 보고, 듣고, 느끼며 알아야 한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 하신 하나님의 뜻을 누가 능히 막겠는가? 이삭은 이에 분별력을 잃었고, 리브가는 지나치게 자신의 뜻을 따랐고, 에서는 앞서 이 모든 일을 경솔하게 여겼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 25:34).”

 

그뿐인가? 에서는 자기 멋대로여서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26:34-35).” 그저 육신이 원하는 대로 그 눈에 보기에 좋을 대로 행하였다. 곧 우리의 영적인 눈이 어두울 때 분별력도 잃고, 지나치게 자신의 생각대로 하며, 더러는 그와 같은 생각조차 하지 못할 때도 많다. 하여 시편은 이를 인정하는 삶이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 19:8).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한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그러므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모든 말씀이 우리로 주목하게 하는 것은 영안을 밝히 하라는 것이다. 이는 말씀을 가까이 하고 묵상함으로 성령이 내 안에 계심으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우리 영혼을 ‘부요하게 하고’, 그것으로 ‘흰 옷을 사서 입어’야 한다. 사는 동안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이를 위하여서도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하시는 말씀이 구체적이다. 결국 이로써 나의 생각, 육신의 소욕을 금해야 하는 일인데,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8-19).”

 

우리의 치열한 싸움은 결국 우리 자신이 아닐까? 누구에게서 카톡이 들어왔고, 보니 작년 3월 이후 거의 1년 6개월만의 내용이었다. 잠시 안부를 묻고 곧 퇴직을 할 텐데 이후 어찌 남은 생을 살아야 하는지, 앞서는 염려를 토로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덧 우리 나이가 그리 되었다. 나는 저의 이어지는 근심을 권면한다고 하였으나 너무 도식적인 답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외에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앞서 염려하지 말 것과 그때 또 주가 인도하실 것임을 믿고 바라자고 할밖에 달리 무슨 말을 더 보태어 위로한들.

 

이삭은 자신의 어두워진 영안과 분별로 하나는 거짓을, 하나는 증오를 가지게 하며 두 아들을 적으로 갈라지게 하였다. 리브가도 다를 게 없어서 저들의 인생 말년이 스스로의 방안으로 쓸쓸하게 되었다. 결국 육신의 생각과의 싸움이다. 그 육신의 소욕을 극복하지 못할 때 스스로의 판단이나 형편으로 자신의 처지를 자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롬 8:12).”

 

바울은 이와 같은 증거를 뒷받침하며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3-14).” 이와 같은 일이 당면한 현실이 되어 돌아온다. 하나님의 뜻은 그런 가운데서도 선을 이루시며 그 뜻을 따라 행하실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이 둘의 싸움으로 때론 기진한다. 누구의 이어지는 염려를 계속 응대하며 대꾸할 말이 없었다. 주어진 한 날의 삶으로 감사히 살자고 해도, 그건 알지만… 하면서 계속 늘어지는 말의 염려인지, 마음의 근심인지 그에 따른 구체적인 방안을 누가 알겠나? 우린 다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하신 것과 같이 날마다 매순간이 씨름이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90:9).

 

늙으신 나의 장모는 인생이 그렇지 않다는 말로 자신이 살아온 아흔 해의 삶을 두고 생각하려니까 말씀을 받들기가 어렵다. 어제도 가정예배에서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눅 18:22-23).” 하신 말씀을 두고, 어찌 다 팔아 나눠주고 따르라 하실 수 있는가? 하고 물으셨다. 하늘에 우리의 보화가 있다는 말을 열심히 설명하는데도 이 땅의 삶이 그렇지 않다는 듯 그래도 적당히 나눠줘야지… 하는 말로 미심쩍은 마음을 접지 못하여 서로 웃었다.

 

그러니 아흔 살을 살아도, 이제 쉰 살에 퇴직 후 삶을 염려하는 아무개도 우린 모두 죽을 때까지 육신의 소욕으로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무엇으로 ‘먼저와 나중을’ 삼을 것인지를 그때마다 선택할 일이다. 성경은 일러,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시는데, 이 말씀이 실제의 삶에서는 그렇게 멀게만 느껴진다. 당장의 일에 마음은 저미고 근심과 염려는 우리를 사로잡는데,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이를 알면서도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15-16).” 보면 늘 앞서는 게 나의 마음에 따른 염려와 근심이지 않던가?

 

누구의 이어지는 말에 할 말이 없으면서도 나 역시 그러한데도 ‘하루하루 살자’는 말을 끝으로 더는 뭐라 대답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다들 저마다의 사정이 우선이라, 이삭은 이삭대로 나이들어 자신의 처지에 따라 그리 판단한 것일 테고… 리브가는 둘째 야곱에게 더 마음이 기울었는가, 그리 꾀를 내어 거짓으로라도 일을 꾸민 것이었다. 약속의 언약을 알았을 야곱은 두려움에 미심쩍어하였고, 에서는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능력껏 산다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다들 자신들의 선택을 이고 지고 노년을 쓸쓸히 혹은 도망치듯 밧단 아람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거나 집에 남아 홀로 그 분을 삭이며 부친의 곡할 날을 기다리거나…. 저마다의 생의 무게가 다들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짐이 아닌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34:14).

 

이는,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 16:1).”

 

그렇다면 가장 지혜로운 일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3).” 주께 맡김으로 우리의 염려와 근심에서 놓여날 수가 있다. 이는 백날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9).” 결국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히 설 것이니,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곧 오늘까지의 삶이 모두 주의 긍휼하심으로가 아니었던가? 돌아보면 은혜 아닌 게 없는데, 왜 또 매번 우린 같은 염려와 근심으로 시달리며 살고 있는지…….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이와 같이 주를 인정함으로 우리는 ‘저가 나를 죽이신다 해도 주께 아뢸 수 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루하루 살자, 하고 누구에게 말한 것은 저에게 한 말이 아니라 곧 나에게 오늘도 선포하는 말이었다. 주를 바라며, 주의 뜻을 구하고, 주께 모두 맡김으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주가 행하신다. 주가 이루신다. 우린 다만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하여 오늘도,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6:2-3).

 

주만 바라며,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4, 7).

 

그러하나,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