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전봉석 2024. 8. 31. 02:46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창 41:16, 25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 20:7

 

 

모든 일정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진다. 그때 요셉은 매번 하나님이 행하실 것을 알린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누구 앞에서든지 자연스럽고 또한 마땅하다.

 

하나님이 한 인물을 자신의 뜻대로 쓰시기까지 얼마 동안 연단하시며 훈련하신다. 요셉을 이방나라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는 데 있어 노예로 팔리고, 죄수로 갇히며 그와 같은 시간으로 연마하셨다. 충직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그 길은 어쩌다 우연히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이와 같이 우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 내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게 분명한가, 하는 데 따른 그 정하신 기한과 때가 되기까지 회의하고 갈등하게 하신다. 그러는 중에 주께서 시의적절하게 그 때가 이를 때에 사용하신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때론 희미하고 거울로 보는 것 같이 막연하나….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때가 이름에 주가 알게 하신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마음이 어떠할지를 다 아시는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하시고 이르시되,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2-3).” 우리에겐 장래가 있다.

 

요셉의 처지로 보면 저는 이방인이었고, 노예가 된 자였으며, 또한 죄수였다. 스스로의 어떤 노력으로도 그 신분은 바뀔 수 없고 높일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천하의 애굽의 왕 바로가 도움을 구한다. 이를 요셉은 자신을 보고 하는 게 아님을 안다. 만군의 주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인 것을 저는 바로 왕 앞에서 당당히 밝힌다.

 

그것이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와 용기였다. 그 힘과 능력을 공급받은 요셉은 왕과 그 이국의 땅 백성들에게 범상치 않은 존재가 된다. 곧 우리로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마땅한 일인지를 알게 하신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시 43:2).

 

우린 이 세상에서 그럴 위인들이 아님을 알게 하신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합 3:19).”

 

나로 어디에 있든지 누구 앞에서든지 저들로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심을 느낀다. 내세울 것 없고 부족하기 짝이 없으나 그런 내가 무얼 해서가 아니라, 저들로 나를 존귀하게 대하게 하신다. 요즘 다니는 병원에서도, 또는 어떤 이와의 대화에서도,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주가 행하시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모처럼 누가 전화를 하여 그의 생활을 열거하였다. 이혼 아닌 별거도 아닌 각방 살이 10년째인 부부관계에서부터 어떤 일로 무엇에 열중하고 있는지…, 아이들은 어떻고 자신의 처지는 어떠한지… 더러는 왜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할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우리가 말씀으로 살 때,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8).” 하여 나는 누가 성경 해석을 두고 왈가왈부할 때, 또는 어떤 성경을 유난히 강조하거나 무시할 때, 저의 신념이 자신을 삼킨 것을 보게 될 때, 나는 종종 경계한다. 그러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확신이 들 때,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우린 더욱 주의하게 된다. 이는 스스로의 담대함과 확고한 신념을 초월한다. 하나님의 진정 예언은 공통점이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습 1:2, 6).” 이를 앎으로 우리에게 알리신다. “이것은 너희가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니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미 2:10).”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앎을 더하신다. 이때에 우리의 할 일은 뚜렷해진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먼저 구할 것을 알 때 나중에 더하실 것도 안다. 우리의 앎 위에 아는 것을 더하시는 주님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 하고 이 또한 삶 가운데서 증명하신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동안 저는 항상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였다.’ 노예로 있을 때도, 죄수로 갇혔을 때도, 저는 언제나 주가 더하시는 은총을 누리는 자였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는다. 고난의 뒤에 영광이 있음을 본다. 이 마음은 곧 예수의 마음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주가 그리 하셨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0).”

 

이와 같은 말씀을 같이 나누고 이를 인정할 수 있는 이가 나의 친구이고 또한 가족인 것에 항상 감사를 한다. 나는 한 게 없으면서 이와 같은 은총으로 주가 긍휼히 여기심을 살면서 뒤늦게 깨닫는다. 어제는 누구의 사연에 일체 듣기만 하였다. 무슨 논문을 쓰는데 조만간 들고 올 것이라 하여 나는 우선 일상의 이야기로 저는 어떠한가 들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실 것임을 인정하는 데서 서둘거나 조급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어떤 시선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나는 늘 부족하나,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121:2-3).

 

이에 터무니없는 일 같으나 무엇에 전념해야 할지 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마 6:19).” 그런 가운데 염려할 게 없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 그리하여 다만 이 한 날의 수고로 족하였다. 무엇을 더 잘하려고, 내가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으로 애쓰지 않는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131:2).

 

즉,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

 

이는,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고로 오늘 나의 부족함으로도 은혜였다. 누가 물을 때 아픈 것도 일이라, 저의 우려에 대해 나는 의연하게 된다. 이는 ‘종말론적 삶’을 현재화하여,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일이다.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종말의 때를 내일에 두고 살 때 미래에 대하여 조급하거나 겁낼 것 없다. 종종 친구는 노후대책을 운운하지만 나는 그때마나 오늘 한 날의 끝도 우린 알지 못함을 일깨운다. 저에게 하는 말이 되돌아서 나에게 선포가 된다. 우리로 주만 바라게 하심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오직 예수, 오직 말씀으로만 오늘 이 한 날의 수고로 족한 줄 안다. 그러므로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1-2).”

 

이와 같은 사실을 요셉의 삶에서 본다. 저가 바로 앞에서 당당히 하나님을 우선하여 그가 행하심을 밝힐 때,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창 41:38-39).” 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곧 우리의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 오직 하나님으로만이 모든 게 다 이루어지는 것을 알 때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이 한 날이 천국이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20:1-3).

 

오늘도 시편으로 주께 구한다.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4).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고 또 어떠하다 해도,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7).

 

그러할 때,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