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전봉석 2024. 9. 4. 03:15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 45:7-8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시 24:9

 

 

야곱의 사랑과 그에 따른 시기와 질투 사이에서 요셉은 꿈을 꾸었다. 형들의 미움이 결국 요셉을 죽이고자 하다 노예로 팔았다. 그러한 모든 일련의 상황들이 연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을 본다. 요셉은 이를 일컬어,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7-8).”

 

이 놀라운 신앙고백이 주의 영광이 된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오늘의 모든 상황 속에서 이와 일의 발단과 전개를 하나님으로 결론 짓는데까지 2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고난과 시련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성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연단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진정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28:14).”

 

우린 당장 이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없어서 당장에 닥치는 시련과 환란에서 힘에 겨울 때도 있으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불과 같은 시험을 당할지라도 낙심치 않을 것은 믿음의 인내를 경주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다들 서로의 입장이 있고 그 사정 속에서 미처 남을 헤아릴 수 없을 때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순응한다. 요셉이 감정을 억제하며 형제들을 마주할 때, 형제간의 진정한 만남은 유다의 진솔한 탄원으로 주 앞에 아뢰는 것으로 자기희생을 감내하고, 그때도 감정을 억제하며 주의 뜻을 염두에 두는 요셉의 신중함 앞에서 새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찾는 일에서 적잖은 감동이 인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먼저 앞서는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기 일쑤다. 그때마다 앞서 주의 뜻을 살피고 자신을 억제함으로 나와 하나님간의 참된 관계를 우선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곧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나의 묵은 감정으로 이끌리면 안 된다. 다소 손해인듯 하나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일에 주의한다. 우리의 신앙은 인격이 되어 삶의 향기가 된다. 더러는 주의 이름을 위해 다툼을 피하고 서로의 충돌을 주의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곧 나의 말과 행동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우선함으로 이로써 주를 향한 나의 마음이 삶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그러므로 때론 답답하고 어이없다. 여기가 교회여서 누구와의 어떤 마찰을 피한다. 저의 부당한 처사에 그저 위로하고 저를 긍휼히 여긴다. 저로서는 하나님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어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17).”

 

내가 받은 주의 은혜로 산다는 일은 오늘 요셉이 형들 앞에 보여주는 인내하는 모습으로 새삼스럽다. 결국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리하여 주께 맡긴다는 것은 주 안에서의 쉼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남들은 서로 부당함을 주장하고 손해를 보려하지 않을 때, 순종함으로 주의 멍에를 메고 따르는 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서로 같이 대대거리며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보다 다소 손해를 보면서도 이곳이 교회인 것과 내가 주의 앞에 붙들린 자인 것을 저들로 알게 하는 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곧 내가 받은 은혜에 비례하여 남을 헤아리는 그 헤아림은 확장한다. 그렇게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6-7).” 그러므로 주 앞에서 모든 일을 조명하고 한 날의 수고에 감사하는 일, 그것이 오늘 요셉이 오히려 형제들을 위로하며 수용하는 것에서 놀라울 따름이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이 놀라운 고백이 저절로 뚝딱, 생겨난 게 아님을 우린 여러 장을 통해 요셉의 행적에서 알 수 있다. 곧 오늘의 이런저런 어려움이 우릴 괴롭게 하는 흉년 같으나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6).” 누가 이 놀라운 안목과 부단함을 견디며 그 의미를 알 수 있을까? 그리하게 하시는 이의 뜻을 따라 우린 회개에 이르고 용서의 경지에 오른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오직 주 앞에 나의 상한 마음을 아뢰며 고할 때 주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7-9).”

 

이를 위하여 부단히 주 앞에 서는 일,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곧 우리 안에 주 앞에 통회하며 자복하는 마음은 ‘겸손한 자의 영’으로 주가 소생시키시는 우리의 온전함이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34:18).

 

이 놀라운 주의 사랑 앞에서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겔 18:21).” 오늘의 나의 나 됨을 인정하게 된다. 이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욥 27:5).” 모두가 아무리 뭐라 해도 오직 주만 바라보면서 주를 의지하는 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 10:15-16).”

 

이는 결국 누굴 위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그리하여 회개할 수 있는 영혼의 자유함이 여기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3:19-21).” 내가 돌이켜 주 앞에 죄인임을 아뢸 때 그 어떤 선을 이루는 읾보다 주의 뜻이 선명해진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사소한 일이나 같이 한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앞서 나로 주를 먼저 생각함으로 손해보고 또 우습게 여김을 당한다 해도 그것까지도 알면서 참고 마는 일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21).” 우리의 승리는 지는 데서 이기는 것이고, 저를 인정해주는 데서 나를 세우는 것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주가 높임을 받으시기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살전 5:15).”

 

오늘 요셉의 태도와 그 성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마음과 그 삶의 자세를 배운다. 그렇게 하여 욥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하는 놀라운 신앙고백이 가능하였고, 바울은 우리에게 일러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6-7).”

 

그러므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오늘 이 모든 상황에서 온전히 이를 감당하는 것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러므로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오늘 나는 무엇을 확신하고 여기 서는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이는 곧 결코 보이신 적이 없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였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여기서 우린 ‘아버지 품속에 있는’ 곧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 것을 본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러므로 세상이 아무리 혼탁하다 해도 우리는 주를 본다.

 

아이가 보낸 또 한 구절의 성경으로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요 1:50).” 곧 예수께서 먼저 아시고 찾아오심을 우린 스스로의 삶에서 경험한다. 곧 우리의 믿음을 알아주시며 더 큰 확증으로 약속하고 계신다. 곧 ‘무화과나무 밑에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보았다’고 하는 것은 한 사람에게 특별한 일, 곧 우리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개인적인 일로 맺어진다. 남들은 알 수 없는 일,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1).

 

이를 인정하는 데서,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4).

 

올곧게 주만 바란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5, 7, 9).

 

이에,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8, 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