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전봉석 2024. 9. 22. 02:10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 13:21-22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11

 

 

우리 가는 길을 주가 아신다. 주가 아심을 알 때 우린 의외로 의연하다. 뜻하지 않은 사고나 어떤 고통 중에 주가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심을 안다. 산다는 일은 살아왔으면서도 살아보지 못한 길을 가는 것이라 의연할 때 평안하다. 그러다 문득 누구의 부고를 접할 때면 죽음 뒤의 낯섦이 경험되지 않아서 낯설고 낯설어서 뚜렷하다. 우리가 뚜렷이 여기는 낯섦은 살면서 사는 동안에 분간하지 못하였던 앞날의 낯섦과 다를 게 없다. 느닷없이 벌어지는 일에서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우리와 함께 하셨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여 오늘 본문 속의 이야기에서 광야를 지나는 동안 주가 이르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하나님은 애굽의 모든 초태생을 죽이실 때 이스라엘의 초태생은 살리셨다. “그 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수컷들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내 아들 중에 모든 처음 난 자를 다 대속하리니(출 13:15).” 이에 그 소유권은 주께 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6-7).”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로 살면서 그에 따른 은택을 가장 가까이서 느낄 때가 고통 중에 처하였을 때이다. 평소에는 잠깐씩 잊고 살다가 느닷없이 겪는 고통 중에서 주의 은혜를 깨닫는다는 것은 그러한 낯섦 중에서 하나님이 나의 일생에 어떻게 구름기둥이셨고 불기둥이 되셨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다 어느 순간 확신을 더하는 때가 시련 가운데서였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목청껏 외치며,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곧 우리의 앎은 낯섦에서 얻는 뚜렷함이다. 도무지 확신할 수 없을 때, 두렵고 막연하여 근심으로만 짓눌릴 때 성경은 더하시길,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곧 오늘이라는 이 미지의 낯섦도 그리하여 뚜렷하다. 마치 가을하늘의 선명한 빛 같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우리로 그런 상황 속에서 무엇을 바라볼 것인지, 전에는 알지 못하던 뚜렷함이 있다.

 

이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알 수는 없으나 이와 같이 알 수 없는 것으로 더욱 더 뚜렷한 것이 있나니,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이를 누가 어찌 말로다 누구에게 설명하여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이겠나? 하여 늘 내 안의 소원은 나에게 들리는 것이 너에게도 들기를, 내가 아는 하나님의 은총을 너도 같이 누릴 수 있기를.

 

그렇게 친구와 서로 각자의 삶에서 내딛고 사는 하루하루의 낯섦에서 뚜렷함을 이야기할 때 감사가 더해진다. 상황은 딱하고 안쓰러운데 그런 가운데서도 평안한 이유를 알겠다. 마치 대수롭지 않은 듯 이야기 하고 있는 저로 인하여 새삼 은혜가 된다. 그러는 동안 실제 우린 우리 안의 누룩을 제거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마 16:6).”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때에 그 속을 부풀려버린 교만과 아집에 대하여,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6-7).”

 

우리의 낯섦과 익숙함 사이에서 주가 물으신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에 우린 대답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에 주님이 말씀하신다.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5, 16).

 

남들이 무어라 하는 데는 관심이 없으시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실 때 우리의 대답을 주는 바라신다. 이를 알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어떤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런저런 고통이 따랐을 텐데도, 그와 같은 낯섦이 오히려 뚜렷한 답을 우리에게 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4).”

 

우리로 하여금 주를 고백하게 하는 데 있어 막연하거나 애매한 것은 사랑이 아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23).” 이에 따른 확실함을 나는 낯섦이 주는 뚜렷함이라 생각한다. 누가 죽었다는 소리에 죽음이 주는 낯섦이 실은 우리가 사는 동안에 매일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미지의 땅 광야 위에서의 낯섦과 같아서, 낯선데 익숙한 뚜렷함으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하여 오늘도 말씀 앞에서 나는 친밀하고 친숙하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할 때,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이 땅에서의 모든 순간이 평탄하거나 형통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린 더욱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7-18).”

 

오늘 말씀은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신다(출 13:2). 이어 ‘그 날을 기념하라’ 하실 때에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 곳에서 인도해 내셨음이니라(3).” 하고 분명히 하신다. 곧 ‘너는 내 것이라.’ 하시는 주의 음성이 뚜렷해진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이에 해당되는 자로 산다는 일은 세상이 알 수 없고 줄 수도 없는 평안이 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이르시길,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출 13:9-10).” 곧 우리의 뚜렷함은 막연한 게 아니다. 우리의 낯섦은 익숙함보다 친밀하다. 그것으로 주를 바란다.

 

“이것이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가 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출 13:16).”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을 사는 게 증거다. 언제 또 무슨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하지만 그러해서 주를 바랄 때, 언제나 주가 내 앞에 서셨다. 나의 길을 인도하시며 광야에서의 낮에 구름기둥으로, 광야에서의 밤에 불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셨다. 우리가 살아온 날이 우리로 모든 낯섦이 주의 은혜이었음을 뚜렷하게 한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13:20-21).”

 

하여 오늘도 주가 요구하신다.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26).” 우리의 생활이 더러는 우리로 힘에 겨워 버린 바 된 것 같을 때도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그 무엇도 허투루 주어진 게 없었음을 알게 하신다. 더욱이 나는 나의 가까운 친구들과 허물없이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서로가 친숙해할 때, 낯섦이 낯설지 않을 때 감사가 된다. 이에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어떤 처지나 상황을 두고 안타까워하다가도 저의 의연함과 은혜의 고백으로, 어려운 데서 쉬운, 고통 가운데 즐거운, 염려 속에서 평안을… 낯섦의 아이러니와 익숙함의 이율배반적인 현장에서,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66:11-12).

 

그러므로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 31:6).”

 

오늘 시편의 세계도 이를 보여준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42:1).

 

그러할 때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5).

 

그리하여 한 번 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