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전봉석 2024. 9. 23. 02:56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3-14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3:5

 

 

우리의 생각 밖에서 하나님은 일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것에 불안하다. 이를 믿음으로밖에는 감당할 수 없다. 오늘 본문은 광야 길에서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장막을 치게 하시는 것을 본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출 14:1-2).” 시쳇말로 이곳은 외통수다. 앞은 홍해로 가로막혔고 양편으로는 죽음의 사막과 산으로 가로 놓였다. 적이 쫓아온다면 피할 곳이 없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아해도 따른다. 실제 저는 광야에 능한 사람이다. 애굽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훈련된 자이다. 그런 그가 그와 같은 지형의 취약점을 모를 리 없다. 광야에 대해 아무리 무외한이라 해도 더는 갈 데가 없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하물며 모세였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것인지 자신의 지식과 상식으로 판단하여 결정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가 이 소식을 듣고 저들이 갇힌 바 된 신세라는 것을 알았다.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3).” 이를 하나님은 아시면서도 의도하시는 바,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4).” 즉 하나님의 무리한 명령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나 그것으로 주가 행하시고자 하는 권능이 있으심을 알게 한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신다.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도 ‘그 땅의 흙으로’ 지으셨는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곧 앞서 땅을 혼돈하고 공허하게 만들고 흑암을 그 깊음에 더하게 한 원인이 있었다. 이에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신 후 명령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굳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라 하셨을 리 없다. 그런 가운데 선악과를 두신 까닭은 그 경계선으로 행위언약의 기준으로 삼으셨던 것이다. 이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2:15).” 우리가 지켜야 할 것, 소위 말하는 자유의지란 그 선택에 따른 책임과 의무가 있음이다. 선택의 몫을 져야 한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5-16).”

 

‘오늘’의 하나님이시다.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우리는 명령을 지킬 것인지, 여호와를 사랑할 것인지, 늘 항상 ‘오늘’의 일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7-8, 13).”

 

결국 우리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14).” 이를 보면서 새삼 우리의 하나님은 오늘의 하나님이 되심을 알겠다. 오늘 본문의 외통수 같은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출 14:2).” 하실 때에 이를 따를 것인가, 우리의 상식으로 아는 길로 갈 것인가, 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 안팎으로 미혹하는 영, 곧 우리 생각을 어지럽히며 갈등하게 하는 마음이 있다. ‘처음 여자’ 앞에 ‘뱀’으로 그가 나타났다. 뱀은 ‘나하쉬’로 쉬쉬거리다, 속삭이다, 빈말, 날름거리다 등의 뜻이다. 좀 더 포괄적으로는 영리하고 간교하다는 뜻을 내포한다. 저는 마귀, 사탄을 의미하고 우리를 갈등하게 하고 미혹한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그렇다면 어찌 여자, 하와를 공략했을까?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들은 이는 아담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5-17).” 그러고 난 뒤 여자, 곧 하와를 지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18).” 그러므로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이를 뱀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들었을 법한 하나님의 명령을 살짝 비틀어서 왜곡시킨다.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3:1).” 여기서 ‘참으로’ 또는 정말로, 정녕 하면서 강조하는 바, 미심쩍은 마음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자 여자도 순간 애매하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2-3).” 여기서 더해진 말은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면서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덧붙였다.

 

같은 사실을 두고 어디에 강조점을 두거나 어떤 데 슬쩍 더하면 그 뜻은 완전히 달라진다. 말이란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는 이의 의도와 이를 듣는 이의 마음에 따라 같은 말도 달리 해석되기 일쑤다. 아담은 그 땅의 속성으로 지음 받았고, 여자는 그 아담에게서 취하여 만드신 바 되었다. 아담의 사랑의 고백에서도 드러나듯이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2:23).”

 

저들의 사연을 통해서도 알게 되는 것이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을 거스른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5-8).” 육신 곧 이 땅의 흙으로 지음 바 된 우리는 에덴에 이미 침투해 있던 ‘뱀’ 곧 그 땅의 속성을 다스리고 정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2-14).”

 

오늘 모세와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에서 그리로 의도적으로 몰아넣으시고 장막을 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순종할 것인지, 불만과 원망으로 불신앙 가운데 빠져 불순종할 것인지… 몽매한 백성들은 당장의 오늘에 함몰되어 모세를 공격한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11-12).”

 

그럴 수 있으나 그래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만하나 그래서는 안 된다. 이에 모세는 간곡히 외친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3-14).” 같은 상황 앞에서 모세의 하나님과 저들의 하나님이 어찌 다른 것일까?

 

뱀 곧 우리 안에 속삭이는 생각은 앞서 부정적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같은 것 같으나 숨은 의도가 불신앙적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설마, 하고 되돌아보게 하는 마음을 두고 예수님은 일찍이 엄히 경고하셨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뱀’의 생각으로 우리 안의 생각은 부정의문이 들면서 소극적인 의문을 더한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3).” 새삼 우리 앞에 선악과가 놓인 게 아니다. 본래부터 있었고, 저들은 본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울 게 없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25).”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3:7).” 새삼 그 의미는 확장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데 있어 걸림이 된다.

 

자유의지란 이와 같이 빈약하여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2:17).” 하신 말씀을 여자는 재해석하여 ‘먹을 수 있으나’, ‘만지지 말라’, ‘죽을까 하노라’ 하면서 덧대어 여러 생각으로 확장함으로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났다. 오늘 날도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나 이를 받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아, 어, 하는데 따라 그 뜻을 달리 해석하면서 성경을 왜곡한다. 이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하신 데서 우린 항상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애매한 태도에서 사탄은 기회를 잡는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아, 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으며 우리의 신념과 이상을 자극하는가. 그러자 순간 모든 사실이 달리 다가왔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6).

 

더러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 오늘을 진퇴양난으로 몰아두실 때가 있다. 이때 우린 그 잘난 자유의지를 발동시켜 선택한다. 일련의 상황에서 누가 더러 들으라는 듯 하는 소리가 자신도 믿던 자였으나 목사에게 상처를 받아, 교회에 실망해서 하는 따위의 사연으로 자신의 선택을 묵인하거나 의도적으로 정당화시킨다. 그런 자의 주장은 뭐라 하든지 그래서도 자신의 생각을 굽힐 리 없다. 이에 지혜자는 말하길,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전 8:17).”

 

감히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안다, 성경을 잘 안다 하고 떠벌이다 발가벗은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멸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권능과 행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소위 바울인데도 저는 말하길,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15:31).”

 

오늘을 살면서 오늘에 죽지 않음으로 고개 드는 나의 질긴 자유의지 앞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무 가지도 이종하는도다 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를 두르고 아침에 네 씨가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사 17:10-11).” 하여,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시 9:17).

 

오늘 애굽의 군사들은 이를 깨닫게 한다.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출 14:27-28).”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의 자유의지를 주 앞에 내어놓으며,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3:1, 3).

 

그러므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