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각종 나병 환부에 대한 규례니 곧 옴과 의복과 가옥의 나병과 돋는 것과 뾰루지와 색점이 어느 때는 부정하고 어느 때는 정함을 가르치는 것이니 나병의 규례가 이러하니라
레 14:54-57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시 83:1
나병의 진단과 그 처리 방법에 대해 언급하였고, 오늘은 병자로 판명되어 이스라엘 진 밖에 나가 살던 자가 다 나았을 경우 그가 다시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행해야 하는 정결 예식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정결 예식은 모두 두 차례에 걸쳐 행해졌다.
첫째는 제사장이 진 밖에서 행하는 것으로 나병이 걸렸던 환자가 정결해졌다고 선포하는 의식이다(1-9). 이 정결 의식을 치르고 나면 그는 이스라엘 진내로 들어올 수 있다. 둘째로 정결 예식은 첫 번째 정결 예식을 치른 후 제 8일이 되는 날에 집행했다. 이 때 제사장은 치유된 병자를 위해 성막에서 속죄제, 번제 등의 희생을 여호와께 드렸다.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 정결 예식을 치르고 난 후 비로소 그 병자는 자기 장막 곧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병자의 정결 의식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원한 사망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던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오늘 본문은 13장과 14장에 걸쳐 길게 언급된 나병에 관한 규례와 그 병의 진단법과 정결 의식을 마감하는 결론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나병은 각종 피부병과 가옥의 곰팡이 부식 등을 포함하며 포괄적인 병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나병에 관한 이 모든 규례는 단순히 병 자체의 진단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병을 제거하는 외적 의식과 정결 훈련을 통해 내적 곧 영적으로 거룩한 상태로 나아가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인체나 가옥을 추하게 만들고 파괴시키는 불결한 것, 현상들을 제거하고 청결하게 하는 작업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로 우리가 외적으로는 물론 내적으로, 직접적인 우리의 문제에는 물론 우리 주변에까지 정결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명하시고 있다. 이것은 구약만의 특징이 아니라, 외적 내적인 정결 훈련으로 오늘에도 유효함을 일깨운다.
가령 어제는 친구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나눈 대화에서 우리가 어울리는 사람들이나 즐겨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정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쉽지 않은 일이어서 흔히 사회생활이란 게 때로는 싫더라도 서로 그렇게 어울리고 같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기도 한다. 그럴 때 과연 우린 어떻게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잊지 않고 지켜갈 수 있을지를 나누었다.
결국 우린 자신의 영적 상태를 수시로 점검하고 근신해야 한다. 믿음에 대하여도 흔히 믿는 자라 여기는 자신의 믿음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고 따랐다. 그런데 저들의 믿음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서 혹은 주변의 기적과 이적을 보면서 이를 열광하였다. 그랬던 이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를 팔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며 그 죄를 자신과 자기들의 후손에게 돌리는 엄청난 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우리가 주의할 것은, 아닌 건 끝내 아닌 것이다! 죄는 엄연히 죄이다. 하여 성경은 더욱 단호하게,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하시는 말씀은 부담스럽다. 한참 아무렇지 않게 어울리며 좋아라 할 때 저들은 누구보다 훌륭하고 의로우며 선하고 좋았다. 나름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들이어서 선생도 의사도 어느 기업가도 모두 존경할만한 어른들로 여겨져 나는 저들과의 교제가 즐겁고 귀하였다. 그러는 동안 은연중에 ‘어울리는 즐거움, 그 분위기’가 좋아서 저들의 문화나 사상을 따랐던 것 같다. 안 믿는 이들은 포용적이고 수용하는 능력이 있어서 이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데 능하였다.
그러다 보니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른다’는 말과 같이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나 종교를 망라하여 저들에게는 거리낄 게 없었다. 나는 그들의 자유로움이 좋았다. 그런데 그와 같은 것이 오늘 말씀의 나병과 같아서 자신의 신체에는 물론 의복과 가옥과 사용하는 모든 집기들까지 오염시켜 번져가게 한다.
왜 우리 성도를 질그릇이라 하였는지 알 것 같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언제든 깨지고 물들어 조각날 수 있는 것이어서,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시 22:15).
이를 앎으로 우린 더욱 굳건하여서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알 때 그 쓰임이 귀하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오늘 6-7절,
“다른 새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
한 마리의 새를 죽여 그 피를 뿌림으로 놓아주어 자유하게 하였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로 우리 영혼이 자유한 것은 예수의 죽으심과 그의 보혈로 우리가 정결하게 되어 자유롭게 날 수 있다. 이 자유는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곧 나의 자유함이란… 요즘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부쩍 문예창작과를 가겠다고, 아이엄마들이 아이를 대신하여 문의를 한다. 어떻게 알고 누구는 전화로, 어제는 아이엄마가 직접 들러 상담을 하고 갔다. 나는 이곳이 교회인 것과 글방인 것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글쓰기란 결국 자신의 내면을 확장하는 일로 세계를 열어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문예창작과를 가려면 일반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설명하고, 교회여서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이면 나는 건너편 어디에도 제법 큰 문예창작 학원이 있다고 소개한다. 나는 이제 한 영혼의 문제로 접근한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이다. 미심쩍어하는 이들을 설득할 필요는 없다. 주가 연결하심으로 한 영혼으로 족할 일이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이와 같은 말씀을 근거로 하여 나는 이제 누구를 가르치는 일이나 어떤 만남이나 대화나… 이와 같은 관계가 결국은 주가 인도하심을 인정한다. 요즘은 일주일에 몇 차례 아이와 도서관에서 만나 책을 읽거나 설교원고를 쓴다. 이런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더 이상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주가 맡기신 한 영혼이라는 확신으로, 아이가 혼자 있을 때 낮잠을 자지 않도록 혹은 아무에게도 말하기 힘든… 자신의 지적 정신적 장애로 인한 갈등을 들어주고 그에 따른 성경적 해석을 하려 주의한다.
어제는 전날에 월급을 탔다며 늦은 점심이지만 밥을 사겠다고 하여 회전초밥을 얻어먹었다. 제법 의젓하여 그와 같이 생각하는 마음이 기특하였다.
곧,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우리가 누구를 사귈 때 또는 같이 어울릴 때 예전에 즐기던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점심시간 친구와 통화로 나누는 대화에서 그런 점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를 구주로 섬기며 산다고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안 믿는 자들과 어울리고 저들과 교류하며 그 친분을 위해 같이 공유하고 허용하는 시간이나 생각이나 행위들 가운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 영적인 나병을 유발하는 환경이나 오염된 문화가 혹시 없는가? 하는….
가령 얼마 전 누구 상가에 가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 앞에 절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늦게까지 위로를 하고 왔다든가. 한 달에 한 번 어울리는 대학 때 친구들이 여전히 있는데 그들을 만나면 새벽까지 어울려 그런 데(?)까지 가서 노는 예전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한다든가…. 본인도 그러고 나면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친구들이 좋아서, 같이 어울려오던 일이라….
결국 우리 성도의 삶이란 성화를 거듭 이뤄가는 연속적인 삶이어야 한다. 바울은 이를 극적으로 표현하여,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처럼 우리가 날마다 죽어야 하는 일이란 무엇이겠나? 죄의 뿌리였다. 사람이 좋고 같이 어울려 사는 이 땅의 삶이 필요하다. 그러다보니 적당히, 너무 광신도적인 신앙으로가 아니라, 좋은 게 좋은 지점에 머물기를 바란다. 오죽하니 날마다 죽겠나?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한참동안 친구의 말을 듣다 나 역시 문득, 이와 같은 가을날에 그리움에 몸서리쳐지는 사람이나 그 시절이 있어서 눈물겹다. 그런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더는 세상에 미련 두고 살지 않으련다. 전에 즐기던 것들과 사람들과 그와 같은 어울림에 대하여 나는 나의 향수를 경계한다.
다만,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 100:4).
그리하여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계 11:17).” 우리가 가장 행복하고 가장 기쁘고 즐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주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하여 다소 쪼들리는 가운데서도 굳이 글방으로 교회를 활용하는 게 아니라, 교회로서 글방을 운영하는 게 중요하였다. 누가 오겠나 싶지만 그 일은 내 몫이 아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8-19).”
할 때에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시 83:1).
행여 나의 죄로, 그 부정함으로 주의 침묵 속에 버려질까 두렵다. 그때에,
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
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2, 4).
나로 주의 은혜를 앗아갈까 하여서,
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
…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13, 18).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0) | 2024.11.04 |
---|---|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0) | 2024.11.03 |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0) | 2024.11.01 |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0) | 2024.10.31 |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0) | 2024.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