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
민 6:8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시 102:27-28
우리는 살면서 사는 동안에 복을 바란다. 그런데 우리가 비는 복이라는 게 사는 데 따른 것으로 정작 주가 주시고자 하는 복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 하여 기도하기를,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24-26).”
하는 오늘 본문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먼저 그 복의 주체는 ‘여호와’시다. 이를 축도문으로 보면 여기에서 ‘여호와’가 세 번 표현되는데, 단순히 그 명칭이 세 번 언급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아직은 알지 못하였을 삼위(三位) 하나님의 존재를 일체(一體)로 하는 축도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6-8).”
우리의 삼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복을 주시고’ 이 복은 현세적이면서 동시에 내세적인 모든 복이다. 이 복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힘과 지혜이고,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시 16:1-3).
이는 또한 물질적인 번영과 많은 자녀와 건강과 장수 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127:3).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부르신 백성의 필요를 따라 아낌없이 주심으로 영육간의 복을 베푸시기 원하시는 진정 복의 근원자가 여호와이시다. 이에 또한 우리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할 때의 ‘지키다’는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다’란 뜻이다. 따라서 이 의미가 세심하고 철저한 보호와 보존으로 주의 깊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호하심을 나타낸다. 곧 악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서 말이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37:27-28).
이는 또한 가난과 재앙과 각종 질병과 전쟁으로부터의 보존이다.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
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 (셀라)
(33:19, 76:3).
오늘 본문에서 이제 저들은 죽음의 땅 광야를 향해 행진해야 한다. 앞으로 사나운 이방 세력과 부딪쳐야 하고 온갖 우상과 죄악으로부터 실제 맞서 싸워야 한다. 이때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은 필연적이고 절실하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목적으로 ‘광야 같은 세상’을 행진할 때 우리 앞에 펼쳐지는 우리의 죄악된 자아와 교만과 주변의 온갖 우상과 거짓들과 맞서야 한다. 이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은 필연적이다. 이 세상에서 한시라도 주의 시선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쓰러지고 넘어지기 일쑤인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그 얼굴로 네게 비추사’ 곧 ‘여호와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심으로 그분의 성품과 전인격적인 사랑이 아니면 우리의 거룩한 삶은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다다를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곧 우리의 죄가 우리로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우게 한다. 이때 하나님의 시선이 우리에게 머물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절망과 죽음뿐이다.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신 31:17-18).”
어디 통계에서 보면 코로나로 한 해에 죽은 사람이 3만 몇 천 명이라 하는데, 매년 한 해에 자살로 죽는 사람이 또한 3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만큼 하나님의 시선이 머물지 않을 때, 우리는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욥 13:24).” 하는 절규가 저절로 나온다. 하나님의 외면은 사는 게 지옥이라,
“그 앞에서 백성들이 질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욜 2:6).”
그러므로 ‘여호와의 얼굴’이 우리로 생명과 구원과 기쁨으로 살게 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
(27:1, 44:3).
이에 오늘을 사는 동안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우리로 생명의 빛이 된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광채가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나에게로 향하여 오늘도 새 힘을 얻고 주신 한 날의 삶을 살아가게 한다. 이는 실로 캄캄한 곳에서 미미한 촛불 하나가 값진 역할을 하듯이, 의와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심으로 언제든지 어둡고 지친 우리 영혼에 찬란한 빛이 된다.
이에,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할 때, 누구보다 나는 이 은혜로 산다. 나의 말과 행동과 어떤 성과나 결실을 놓고 볼 때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을 뿐 아니라 부끄러울 따름이나, 하나님이 이 타락한 나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 그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였다. 즉 나의 어떤 수고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여기서 은혜는 ‘구부리다’, ‘아랫사람에게 몸을 굽히다’ 하는 의미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나 같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인 것에 ‘은혜를 베풀다’, ‘긍휼히 여기다’ 하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고 먼저 나를 사랑하심을 의미한다. 곧,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이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여기서 나는, 왜? 하는 의문이 생긴다. 왜 굳이 나 같은 자를 주께서 이처럼 사랑하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여,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어제도 아내와 말다툼 아닌 말씨름이 있었는데, 물론 아흔하나 된 노모를 건사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너무 다그치고 짜증내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곁에서 보면 두 사람 다 이해는 간다. 가령 어머니는 드시고 남은 음식을 버리기 아까운데 이를 또 함부로 버리는 것 같아서 몰래 먹다 남은 음식을 방으로 가져가거나 숨기신다. 또는 오줌을 지리고도 본인 생각에는 잠시 말렸다가 다시 입으면 된다고 생각하여 입었던 속옷도 몰래 감춘다. 아직 치매라 할 수는 없지만 그와 유사한 증세로 아내는 거듭되는 잔소리로 본인도 지친다.
그런 가운데 힘들 건 알지만, 그래서도 나는 우리의 이해가 필요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불쌍하지 않냐? 우리도 곧 그럴 거 아니냐? 그럴 때 누가 우릴 그리 막 대한다면 멀쩡한 정신으로 그게 얼마나 서럽고 비루하겠나? 하는 말로 시작한 것인데 아내는 그런 나의 말에 오히려 서운했는지 뭐라 화를 내게 된 것이다. 일련의 일을 겪으면서 나는 오늘 말씀에서 새삼 다시 주의 마음을 구한다.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곧 하나님이 그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여 든다.’ 이는 ‘받아들이다’, ‘열망하다’, ‘공급하다’의 뜻을 지닌 말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열정적으로 바라보다’, ‘계속해서 주시하다’는 의미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보신다.’ 이것은 앞전의 25절에서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하실 때, 그 얼굴을 ‘비추사’ 곧 이보다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한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아주 귀중한 대상으로 특별한 관심으로 예의주시하시며 주의 깊게 보고 계신다는 뜻이다.
내 말을 서운하게 듣는 아내에게 이제 길어봐야 2, 3년 더 우리와 같이 사실까, 하는데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를 바랐다. 곧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된 자’로 사는 일이란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황송한 일인가? 그랬을 때 세상 그 어떤 위협과 도전도 극복할 수 있는 참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1-32).”
이 귀한 은혜로 우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심이 감격스럽다. 여기서 평강은 안전, 행복, 건강, 번영, 평안, 우정 등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세상은 점점 혼탁하여 국내정세는 물론 국제정세도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 암울할 따름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에게는 기쁨과 환희가 샘솟듯 솟아오르는 것이어서, 이 역동적인 평화를 성경은 가리킨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사 55:12-13).”
이 일을 ‘내 이름으로’ 하시겠다고 한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6).” 여기서 ‘내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시는 자신의 이름이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이 절대적으로 거룩한 이름을 전제로,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4-27).”
하여 오늘도 주께 아뢰기를,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102:1-2).
이렇듯 부르짖고 찾을 수 있는 주님이 나의 주가 되심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지,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26-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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