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민 7:89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03:22
장막은 출애굽 제 2년 1월 1일에 완성되었다. “둘째 해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니라(출 40:17).” 그 날 이후 기름을 발라 구별하는 성막 봉헌식이 진행되었다. 이는 “모세가 관유를 가져다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레 8:10).” 이루어졌다. 성막 완공과 기름을 발라 구별한 이후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오르매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여 자기 길을 가더니 바란 광야에 구름이 머무니라(민 10:11-12).”
그리고 본문에서 언급되는 족장들의 명단이 출애굽 제 2년 2월 1일 실시된 인구 조사와 그때 하나님께서 직접 임명하신 그 족장 명단(민 1:1-15)에 근거하고 있다. 아울러 족장들이 바친 예물들이 광야 행군 시에 긴요하게 사용되었다. “그들이 여호와께 드린 헌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이니 지휘관 두 사람에 수레가 하나씩이요 지휘관 한 사람에 소가 한 마리씩이라 그것들을 장막 앞에 드린지라(민 7:3).”
사람이나 물건들에 기름(관유)을 바르는 것은 의식상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즉 그 대상을 세속적인 것과 구별한다. 이는 하나님의 소유로 삼는다는 의미다. 또한 신적인 권위를 부여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한번 기름을 바른 대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련시켜 거룩한 쓰임과 그 도구로 사용되어 필수적이다. 다시 돌이킬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목사 안수를 앞두고 수련회 기간에 어느 목사님의 설교내용이 생각난다. 그때 지혜자의 표현을 본문으로 하여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이를 토대로 우리가 기름부음 받는다는 것에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돌아갈 사람은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고 하여 회중을 숙연하게 하였던 기억이 난다.
제사와 관련된 성물과 제단에 딸린 도구들과 성막과 성막에 딸린 기구들과 증거궤에는 반드시 기름을 발라야 했다. 한편 이러한 목적에 사용되는 이 기름인 관유는 성령과 성령의 사역을 비유한다.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14).” 이는 주께 쓰이는 각종 쓰임의 실체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아 공식적으로 성별되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헌신하신 사실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곧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이는 실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모든 사람과 사물은 거룩하고, 그 자체로 신적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 기름을 바른 것이다. 곧 하나님의 특별하신 인준으로 그 맡기신 모든 사역과 예배와 헌신이 오직 성령의 감동과 감화를 통해 그 참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러므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이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2-13).”
하여,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오늘과 구약 시대가 다르지 않고, 기름을 바름은 기름부음으로 성령이 내주임재하심으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곧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처럼 말씀을 받는다. 당시 하나님은 사람과의 만남을 위해 회막을 개설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민 1:1).” 곧 그곳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셨다. ‘회막’에는 말씀이 있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출 25:21).”
회막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막이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전인격적으로 대화할 수 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죄인인 초라한 나를 맞이하시는 시공간의 장소이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 여호와께 말씀하려 했다는 사실에서 이 만남의 장막은 저마다가 주 앞에 엎드리는 장소이겠다. 나로서는 요즘 저녁에 교회로 나와 이처럼 말씀 묵상을 하고 기도하다 이곳에서 잠드는 이곳, ‘여기’의 의미가 명확히 그리 여겨진다.
여기는 ‘은혜의 보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이곳은 죄를 ‘덮다’, ‘속죄하다’, ‘화해시키다’ 하는 ‘은혜의 처소’가 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의 허물과 죄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 사랑으로 속죄하시는 ‘은혜로운 장소’가 된다. 저마다 주 앞에 나아가는 곳이 회막이 되겠으나 나로서는 저녁에 교회로 나와 묵상글을 쓰고 잠이 드는 이곳에서 위로가 크다.
이곳은 지극히 영광스럽고 거룩한 곳이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속죄의 장소이다. 나의 연약함과 죄악됨을 용서하시는 공간이며 시간이다. 누구는 자신의 방 책상 앞에서, 누구는 정해진 시간이나 장소의 어디에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장소로 나아간다. 이에 오늘 시편은,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103:8-9).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0-11).
이를 아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3-14).
그렇게 하찮고 부족하기 짝이 없으나,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마치 다정한 친구처럼 말씀하신다. 모세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자녀들, 곧 오늘 우리 개개인의 모두를 그와 같이 사랑하고 돌보시며,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음성, 곧 말씀으로 우리 앞에 두시고 ‘회막’에서 만나고 마주하신다. 이는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시는 곳이 교회다. 우리와 만나시는 곳이 성전이다. 이는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3-4).”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친히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의 모든 일을 이루어가신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1-12).”
세상은 어지럽게 모든 것을 삼킬 듯 현재의 권세와 영광으로 영원한 줄 알지만 우리는 아뢰기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살전 3:9).” 이처럼 주 앞에 나올 때마다 황송하고 송구하여 부끄러울 따름인데, 나는 변변찮고 아무 것도 아닌 듯하나,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14).”
이와 같은 말씀으로 새 힘을 얻는다. 하나님은 각양각색이나 저마다의 은사를 더하신다. 나 같이 어리석고 부족한 자에게도 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더하심으로 여기, ‘회막’에 나아와 주와 함께 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나는 부족하나 나로 오늘 여기에 세우심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시 24:1-2).
곧 내가 오늘 쓸모 있는 것은 나의 어떤 위치나 자격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나로 ‘여호와의 것’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하여,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이 또한 그리 감당하게 하심으로 나와 함께 하심이겠다. 그러므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 103:1-2).
그리하여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1-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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