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민 17:8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시 113:4
앞장에서 모세와 아론의 지위에 불만을 품었던 고라와 그 일당이 땅이 갈라지며 삼킨바 되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심판으로 ‘고라의 반역’을 징계하신 후 저들 모든 지파의 지도자들 지팡이를 거두어 표징을 보이신다. 곧 죽은 나무 지팡이에서 싹이 나는 기적으로 아론이 지닌 제사장직의 정당성을 하나님이 공식적으로 확인시키신다.
하나님은 일을 성취하시는 데 있어 분명히 그 뜻을 전달하신다. 각 지파에게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오게 하고(1-7), 그 중에서 오직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싹이 돋고 열매가 맺히게 하셨다(8-11). 이와 같은 사실로 하나님이 직접 아론의 권위를 인정하신 것이고, 이에 대해 백성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휩싸인다(12-13).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시는 이를 세우신다. 저를 높이시며 그 권위를 하나님이 인정하신다. 곧 우리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은 특별한 은혜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신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15).
이는 오늘을 살며 비현실적이고 어려운 난관을 통해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뜻을 세우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아론의 지팡이’로 상징되는 바짝 말라 도저히 싹이 돋을 수 없는 나무에서 열매까지 맺게 하셨다. 곧 ‘살구나무의 결실’은 ‘살아 있고 깨어 있다’는 의미.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민 17:8).”
이것은 하룻밤에 일어난 일이다. ‘이튿날’ 곧 가장 빠른 시기에 움이 돋고 살구 열매가 열렸다. 바싹 말라 죽어버린 나무 막대기에서 식물의 성장 전 과정이 압축된 셈이다. 곧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시간을 하룻밤 사이에 볼 수 있게 하셨다. 이는 기적이다. 생명의 능력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 준다.
나는 이 일이 어떤 의미인지, 나로 늦었다 하고 여길 때 부르시고 신대원으로 이끄시고 3년 과정을 마치고, 가장 늦게 들어가 나이 많은 학생으로 시작하여 동기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목사안수를 받게 하셨다. 그뿐 아니라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자주 떠오르는 생각이 동기 중에 아무개는 두어 번 휴학을 하고 등록금을 벌어야 했을 정도로 다들 어렵게 학비를 마련해야 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기적처럼 돕는 손길을 붙이셨다. 이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하다.
모든 지팡이가 마른 막대기로 오랜 시기 의지하여 사용했을 것이고, 아론의 지팡이도 다를 게 없었을 텐데 그의 살구나무 지팡이에서 ‘이튿날’ 열매가 열렸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살구나무’는 ‘깨어 있다’, ‘지키다’란 뜻의 히브리어 ‘사카드’이다. 아론이 지니고 있던 바짝 말라비틀어진 살구나무 지팡이에 하나님께서 생명력을 불어 넣으심으로 ‘하나님은 항상 깨어있어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는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저를 부르실 때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연상하게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렘 1:11-12).”
곧 오늘 아론의 대제사장직은 하나님이 친히 세우셨음을 밝히고 증명하시는 사건이다. 곧 ‘살구나무 지팡이의 기적’과 같이 하나님은 오늘도 깨어 나를 지키시며 붙드시고 함께 하신다는 은혜에 대해 다시금 확신하게 한다.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형편에서 97학번으로 ‘신학 학부’를 기적처럼(그때는 한 사람의 독지가가 거의 막무가내로 나를 등 떠밀어서 3학년으로 신학교에 편입하여 4학기, 그리고 신대원 1학기를 하다 도망치기 전까지 저 혼자 무려 5학기의 등록금과 책값 등을 지원하였다.) 그러다 결국 또 그만두고 12년을 떠돌다 09학번으로 다시 붙들려서 신대원을 다닌 것이다.
나의 무지와 불신앙의 시기는 길었지만 하나님이 끌어다 일을 추진하실 때는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움이 돋고 새순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게 하신 셈이다. 나는 요나서를 읽을 때면 내가 항상 요나 같고, 탕자의 이야기를 묵상하다 보면 내가 항상 돌아온 탕자 같다. 그렇듯 오늘 이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마치 나의 상황 같다. 바짝 마른 막대기 같던 나의 심성에 그때마다 하나님은 기적의 은혜를 더하시며 이끄신 것이다.
이에,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이제 나는 다시 도망칠 기력도 없지만 지난날 나의 어리석었던 선택을 다시 또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오늘의 현상이나 어떤 결과에 대하여도 나는 이제 조바심내거나 내가 무얼 이루려고 애쓰지 않는다. 이 모든 것, 오늘 나로 여기 있게 하신 이가 결국은 하나님이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기셨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나의 나 된 것으로 조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시는 말씀과 같이 이제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이 말씀이 큰 위로가 된다. 내가 주의 것이면 나의 성과나 결과도 주의 것이다. 다만 나는 오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제는 저녁에 교회로 나와 묵상글쓰기를 하고 교회에서 잔다. 교회에서 잔다는 일이 가족들 사이에서도 암묵적으로 인정이 되면서 이제는 저녁을 먹고 가정예배를 드리고 교회로 나서는 길이 서로에게 자연스럽다.
그럴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되어서 오늘은 이 일이 가능하다. 어떤 날은 또 어떨지 알 수 없으나 그런 것에도 나는 이제 ‘그때마다’ 주가 이루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이는 구원과 생명의 능력을 부여하시는 이가 우리의 존재와 그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러므로 내 안에 왜 두려움이나 여전한 불신앙의 염려와 근심이 없겠나? 하지만 그때마다 오늘의 내가 나 된 것은 주의 은혜인 것을 확신하게 하심으로 그와 같은 감정이 오히려 주를 찾기에 갈급하게 한다.
더 어릴 적으로 거슬러 가서 나의 일생을 가만히 돌아볼 때 늘 두 가지 속성의 시간이 동시에 공존했던 것을 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가난과 그러나 항상 부족한 게 없었던 시절과 유년시절과 학창시절 이런저런 시달림과 괴롭힘에도 동시에 그때마다 나를 보호하게 하셨던 손길로 내 곁의 고마운 사람들이 악의 구렁텅이에서 건졌던 일, 구제불능인 듯 생활할 때 또한 늘 그때마다 주의 사랑을 일깨웠던 사건과 상황들….
그런데 이제 그것으로 나는 상한 영혼을 만나고 위로한다. 나는 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가지고 저에게 들려줄 수 있다. 그것으로 누구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본다. 비록 나로 상담가도 심리학자로도 세우지 않으셨으면서 나로 하여금 저들을 알 수 있게, 저들과 같은 ‘환자’로 직접 그 고충으로 배움을 가지게 하셨음을, 그리하여 우리들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들었고, 이를 찾아내어 나에게 보이신 것을 저들에게 들려주게 하시고, 저들에게 듣는 것으로 나로 보게 하신다는 사실. 이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그러므로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 28:1).”
더는 쫓기지 않고 산다. 망할 것도 없이 흥하여서 흥할 것도 바라지 않고도 망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하신다. 내 안에 두신 어떤 담대함으로, 더는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속박에서도 벗어나게 하셨다. 마치 베드로에게 자유를 주신 것 같이,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3).” 베드로도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할 줄 알고 나섰던 것이다.
이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조차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
그리하여,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6-37).”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함이 없나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하나님은 이제 그 어떤 것으로도 나를 정죄하지 않으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직접 나의 대속의 주, 대언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이제 이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바울의 이 놀라운 진리가 거저 얻은 게 아니라, 저 또한 예수를 박해하다 돌이켜 주 앞에 섰을 때 확신하는 것이어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아, 이 놀라운 말씀이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바울의 설교가 한 편으로 엮어지고, 요나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 같이 다가오기도 하면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그래서 더 확신이 간다. 오늘의 나는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일어난 일이다. 주를 멀리하고 더 어려서는 인생을 저주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살 때 동시에 또 주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데에 감사하여 열네 살 어린 것이 눈물콧물 흘리며 세례를 받았던 아이러니한 기억까지도….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하여,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시 113:1-2).
이는 곧,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3).
할 때에,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
할렐루야
(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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