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전봉석 2024. 12. 8. 21:51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 친 것을 보는데 그 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민 24:2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 119:50

 

 

눈을 들어 보는 것, 그동안 보지 못하였던 것을 비로소 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우선은 '가짜'가 너무 많다. 소위 '가짜뉴스'라는 것이 우리를 너무 혼란스럽게 한다. 일련의 사태에서도 '극우채널'에 함몰된 결과라고 짐작하게 된다. 그렇게 방송하는 '저들'이나 이를 보면서 그것에 빠져드는 '저들'은 소위 ‘깔때기 효과’라 하는 것처럼 빠져들면 다시 나오기 어렵다. 깔때기의 주둥이는 크고 그 출구는 길고 작아서 한 번 빨려들면 나올 수가 없다. 일명 ‘개미지옥’과 같다.

 

이에 대해 여러 요인들이 있겠으나 우선은 '심리적인 요인'과 '사회적인 요인'과 '인지적인 요인'이 있다고 한다. 심리적인 요인은 평소 불안과 스트레스로 인하여, 과도하게 예민해진 심리상태로 인해 자신의 생각을 지지하고 동조하는 듯한 내용에 대해 과도하게 몰입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마치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의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저들'의 가짜뉴스에 속수무책으로 젖어들어 어느 순간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지게 된다.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면 사회적인 요인이 작동하는데, ‘그들’ 생각이 맞는 것 같고 이에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은 서서히 흐려져서, 발동하는 무리와 그들 주장에 동조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난다. 이는 마치 군중심리와 같아서 혼자서는 긴가민가하던 고민을 같은 시각으로 동일선상에 두게 되면서 서로의 지지와 응원 그 이상의 무조건적인 생각과 허무맹랑한 주장에도 비판적인 의식이 작동하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때 자신의 주변은 죄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만 가득한 것 같다. 여론조사나 어떤 자료도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다보니 이에 반대하는 주장에는 적대감을 드러내고 무조건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하게 된다.

 

하여 인지적인 요인은 모든 판단과 기준이 자신을 둘러싼 '그들'을 기준으로 작동하는 단계에 이른다. 이쯤 되면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사실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해도, 더는 그 어떤 판단능력이 작동하지 않는 인식 불가능한 인지불능의 상태가 된다. 이때는 완전히 판단 능력이 작동하지 않는 시점이다. 곧 오늘 날 우리의 사회 구조나 서로의 극단적인 대립, 대치 국면은 점점 더 끝 간 데 없이 적대감으로 치닫게 되고, 더는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 인지능력불능, 판단능력상실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자신과 자신의 의견을 지지하는 세력과 결속하면서 선과 악의 구분은 마비된다. 다른 판단을 내릴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본문을 살피면, 발람은 뒤늦게 눈을 떴다.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의 낯을 광야로 향하여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 친 것을 보는데 그 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1-2).”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이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하는 대목이다.

 

이에 따른 그의 변화는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달라졌다. 곧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신의 예언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23:8, 19).”에 대한 발람의 자기 반란 같은 깨우침이 드러난다.

 

이는 신앙적인 것이라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느낀 것이다. ‘체념’이면서, ‘불가피한 상황 판단’이다. 곧 사실 그대로를 전함으로, 발람은 원래 이스라엘을 저주하거나 축복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전과 같이 사술을 쓰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곧 저는 복술가로 거짓 선지자이어서 점괘나 신탁을 구하기 위해 따로 특별한 장소에 나가 나름의 제단을 쌓고 의식을 치러 점괘를 보려했다.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가리이다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 그가 내게 지시하시는 것은 다 당신에게 알리리이다 하고 언덕길로 가니…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저기서 여호와를 만나뵐 동안에 여기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하니라(23:3, 15).”

 

즉 발람은 하나님과의 교접(?)을 위해 나름의 장소나 어떤 행위를 통해 평소하던 대로 방법을 써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과정-사술’을 이용하셔서도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시는 것을 저는 경험하였다. 즉 그는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목도하게 되며 눈을 들어 이스라엘 진영을 본다. 곧 자기 나름은 발락의 명대로 저들을 저주하려 사술(邪術)을 이용하려 제단에 제물을 드려보았으나, 하나님의 역사는 이를 초월하시고 저로 말해야 할 것을 말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그 낯을 광야로” 돌려 이스라엘의 진영을 보았을 때, 그동안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던 사특한 눈꺼풀이 벗겨진 셈이다. 곧 지금껏 모압 광야에 머물고 있던 이스라엘 진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자 비로소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여기서 ‘하나님의 신’은 성령이시다. 곧 주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삼상 10:6).”

 

그전의 내가 아니다. 내가 따르던 것을 벗어버리게 된다. 성령께서 사악한 발람 위에 임하실 때, 저도 감화되어 “영에 감동된 자”로 세워졌다. 하나님은 발람의 첫 번째와 두 번째(23:5,16) 저주 시도에서는 그 입술만 주장하셨다. 그러다 이제 세 번째 시도에서는 그의 눈을 열어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의 진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하셨다. 그에 따른 저의 표현은 가히 아름답다.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도다(민 24:5-6).”

 

하며 발람은 미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였던 것에서 눈이 뜨였다. 그리고 더하길, “그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씨는 많은 물 가에 있으리로다 그의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의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꺾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7-8).” 곧 이스라엘이 흥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저들은 이제 천하무적임을 인정한다. 그의 위용은 그 어떤 대적이라도 상대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꿇어 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9).”

 

따라서 발람은 자신의 의지와 반대로 하나님의 도구로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을 축복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발람의 인격이 하나님의 영(성령)을 영접한 게 아니다. 임의로 주의 영이 저를 주도하심으로 눈이 열리게 하셨고, 그 입을 주관하심으로 이를 인정하듯 이스라엘을 축복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셨다.

 

이에 떠오르는 인물이 삼손이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갔고(삿 14:6, 19).” 저는 불순하였으나 주의 영이 강권하셨다.

 

사울 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삼상 10:10, 19:20).” 사울은 불의하나 그런 가운데서도 주의 영이 임하심으로,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23).”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돼 있던 사울도 강권하심으로 돌이키셨다.

 

경건하지 못하였던 삼손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강권적인 역사로 그렇게 하셨듯이 사울도 그러하여, 그들의 인격에 주의 영이 임하실 때 그들에게는 주의 능력과 은사가 나타났다. 곧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그들의 장래를 예언케 하며, 또 그 주변국들의 운명까지 예언하게 하시는 오늘 발람의 눈과 그 입은 성령의 역사로 불가항력적이게 주의 뜻을 전하는 창구로 사용하셨다. 곧 성령의 역사가 구원받은 자의 심령에만 내주하심으로  역사하시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바로에게 임하실 때 그의 마음이 강퍅하여 주의 뜻을 거스르게 하셨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은 그 정당성을 차근차근 이뤄 역사하셨다.

 

오늘 우리 사회의 이상한(?) 자기주장과 그들의 함몰된 이성에 대하여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시각으로 볼 때’ 일부러 더 극적으로 치닫게 하시는 것 같다. 엄연히 검사출신의 대통령과 야당대표가 위헌적이고, 법률적으로 맞지 않는 결정을 하는 것에 나 같이 법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서도 이상하다. 수십 년을 행정가로 살며 전 정권에서도 이번 정권에서도 총리직을 수행하였던 이가 어떻게 서로 말도 안 되는 말로 '담화문'을 발표하며 대통령의 ‘질서 있는 퇴진?’을 위해 자신들이 무슨 권한으로 권한을 대행하겠다고 하는 것인지 나는 뉴스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가짜뉴스'가 주는 '깔때기 효과'나 개미지옥에 빠진 것 같은 저들의 발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앞뒤 말이 안 되는데 ‘저들’은 그게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들어보니 그 어떤 법적 근거도 없이, 자신들도 위헌적인 계엄령 선포이고 내란죄 혐의가 인정된다고 하면서, 그런 대통령이 또한 '스스로의 자신 직무를 정지하겠다'고 하는 넌센스 같은 말을 하는지?! 것도, 그것을 당과 총리에게 무슨 근거로 위임하겠다는 하는 것인지?! 이게 무슨 동호회 수준의 친목단체 회장 자리도 아니고, 나 같이 법에 무식한 사람도 저들의 생각과 발표에 어이가 없다.

 

가짜는 이렇듯 자신들의 가짜를 가짜라는 사실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그럴 능력을 상실한 가짜는 진짜를 위협한다. 복술사 발람이 이런저런 제단을 쌓고 자기 나름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려 하였으나 결국 두 번 다 저주가 아닌 축복의 말을 전하여야 했고, 이내 눈을 들어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영을 볼 때 주의 영이 임하심으로써 비로소 깨달았다.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말하되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는 것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 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민 24:10).” 발락이 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화를 낼 때 발람은 변명처럼 말하였다. “가령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간에 내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리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13).” 가소로우면서 부끄러운 변명이다.

 

결국,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시 99:5).

 

우린 오늘도 주의 공의와 인자하심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사회는 우리에게 ‘너희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물을 때 우리는 좌우 그 어느 쪽도 아님으로, 중심에 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름의 정치적인 소신이나 신념에 따라 이쪽이든지 저쪽이든지, 어느 한쪽에서 상대에게 총구를 겨누듯 비난과 비판을 쏟아낼 수 있겠으나… 우리는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곧 우리는 더이상 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을 내 마음대로 내가 판단하고 내가 주장할 수 없다. 우리는 기필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는 우리가 대한민국을 위한 것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것도, 이 땅의 공공의 이익과 안녕을 위한 것도, 나아가 저마다의 주장으로 외쳐대는 공의와 공정과 상식을 붙들고 사는 것을 위해서도 아니다. 이는 분명 다 헛되고 헛되다는 게 성경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삶의 혼탁함 가운데 좌고우면하면 안 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6-7).”

 

우리가 거듭나야 하겠다 하신 말씀을 바로 알 때, 일련의 사태를 놓고 이보다 더 흥미로운 성경공부가 없는 것 같다. 이에 묵상과 찬송이 가능하다. 역사의 교훈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긍휼하심을 증거하게 한다. 나는 요즘 누구와 이런 주제로 대화하거나 의견을 나누는 일을 피한다. 말을 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나의 사견이 발람의 사술처럼 툭, 튀어나온다.  이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하신 말씀 앞에서 정지!

 

누가 물으면 일련이 사태에 대해 가타부타 평가하기보다, 그런 가운데 우리 곁의 ‘가짜’가 얼마나 막강하고 위협적인지를 설명하며 이에 말세에 때에 더욱 교묘하고 기이한 세상 논리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런 가운데 서로를 ‘악의 축’이라 겨누는 총구에서도 우리는 눈을 들어 저 멀리 ‘이스라엘의 진영’ 곧 '천국 백성들이 도열한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우러르며 눈을 떠야 한다. 이를 위해 주의 영이 우리 안에 임하시기를 더욱 더 기도해야 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그러할 때,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

(119:31).

 

주께 구한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32, 34).

 

이에,

 

주를 경외하게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38, 40).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

내가 주의 말씀을 의지함이니이다

(41-42).

 

그러할 때,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4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