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민 25:1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67, 71
싯딤에 ‘머물렀다’는 데서 암시하듯 광야에서는 전진뿐이다. 싯딤의 뜻도 ‘아카시아 나무’란 뜻으로 아카시아의 초원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의 진영이 벧여시못에서부터 아벨싯딤에 이르렀더라(민 33:49).” 이곳은 모압 평원 북단에 위치한 지역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길을 떠나 모압 평지에 진을 쳤으니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이더라(22:1).”
이에 모압 왕 발락은 브돌의 복술가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를 청하였다가 하나님의 영이 이를 가로막은 것을 보았다. 이곳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여행 중 마지막으로 진을 친 곳이다. 이곳에서 곧 모세가 신명기에 언급된 ‘고별 설교’와 ‘율법 전승’을 행하기도 했다. 이곳은 또한 모세가 후계자 여호수아를 세워 가나안 정복을 지시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머물면서 이스라엘은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범죄 동기는 음란이었고, 이어 모압 여인들에 의한 우상 승배를 따른 것이다. 이러한 우상숭배 유도는 발람의 머리에서 나왔다! 하나님의 영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데 실패한 복술가 발람은,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민 31:16).”
이는,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2:14).”
이 얼마나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짓인가? 이 같은 계획은 발람의 꾀에서 나와 미디안과 모압이 연합하여 주도면밀하게 시행하였다. 이 사건의 비극은 후일에 사도 바울에 의해서도 또다시 지적되고 있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고전 10:8).”
실로 우리의 육체와 그 영혼은 유기적인 관계인 것을 알게 한다. 한쪽의 부패로 한쪽도 타락을 피할 수 없다. 곧 우리가 전인격의 존재라는 사실이 단순히 육체의 소욕이 육의 문제로만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 심각하다. 하여,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이에 우리가 살면서 우리 몸의 행위에서도 각별히 성결하여야 하는 이유는 그것으로 우리 영혼이 타격을 입거나 경건을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육의 순결을 동시에 요구하시는 것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3-6).”
만드는 행위가 섬기는 마음이 하나이고, 절하는 행위와 계명을 어기는 결과로 이어져,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12-17).”
우리 삶이 곧 영혼의 터전이 된다.
브돌의 복술가 발람은 발락의 요청에 따라 무려 4차에 걸쳐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이를 실현하지 못했다. 그러자 사람의 가장 취약한 점 가운데 하나인 음행을 도구로 하여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인 우상숭배의 영적인 타락을 이끌어냈다.
이스라엘이 싯담에 머물러 있는 동안의 일이다. 앞서도 묵상하게 된 내용이 광야에서의 멈춤과 쉼은 타락의 요소가 너무 쉽게 다가온다. 특히 모압 여자들의 유혹은 오랜 광야 생활로 지친 저들의 심신을 노렸다. 음행하여 음란한 제사에 깊이 빠져든 것도 그와 같은 취약점을 간파하고 브돌의 발람이 작전한 것이다.
이에 하나님의 징계 명령이 떨어진다.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의분에 못이겨 범죄자들을 처단한다(6-9).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비느하스의 후손에게 대대로 제사장 직분을 맡기실 것을 약속하신다(10-13). 이때 처형당한 대표적인 두 인물이 있는데,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남자 곧 미디안 여인과 함께 죽임을 당한 자의 이름은 시므리니 살루의 아들이요 시므온인의 조상의 가문 중 한 지도자이며 죽임을 당한 미디안 여인의 이름은 고스비이니 수르의 딸이라 수르는 미디안 백성의 한 조상의 가문의 수령이었더라(민 25:14,15).” 이에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정복을 명하신다(16-18).
타락을 주도한 자들은 모압이었으며 그들과 동맹한 미디안 사람들이 그 일에 협조했기 때문이다. 훗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미디안의 다섯 왕과 그들의 남자들, 그리고 발람을 죽이게 하셨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미디안을 쳐서 남자를 다 죽였고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7-8).”
결국 거룩한 백성이라 해도 항상 범죄의 가능성은 가까이 있다. 육체적 범죄와 영적인 범죄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이에 따른 결과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찾는 쾌락에는 미혹이 따르기 마련이다. 결국 멸망의 원인이 되는 간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고전 10:7-8).”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시는 바, 간음과 우상 숭배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불가분의관계로 죄가 된다. 그러한 까닭에 하나님은 항상 우리들에게 전인격의 순결을 요구하신다. 흔히 그럴 수 있지? 하고 여기는 가벼운(?) 성적 타락도 그에 따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에 대한 성적 희롱으로 모욕으로, 끝내 신성모독으로까지 연결된다. 돈을 주고 성을 사거나 이를 토대로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일이 모두 그러하다.
음란에 대한 성경적 견해는 가장 치명적인 죄의 결과를 낳는 죄악이라는 것이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 그러므로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18).” 실로 죄악 중에 우리가 믿음으로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 것이 음란의 죄이다.
돈과 여자와 명예(권력)에 대한 유혹이 목회자들에게도 상당히 빈번하게 일어나는 죄악이기도 하다. 이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하셨고,
이에,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2-5).”
그러니까 이 하나의 죄가 실은 하나로 그치는 게 아니라 여러 갈래로 파생하여 걷잡을 수 없는 파멸의 길로 이끌어 들인다. 그러므로 말씀은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그리고 또한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4).”
그러므로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2-14).”
하여 바울은 이상적인 결혼을 설교하였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고전 7:6).”
하였고,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10-11).”
엄연히 우리는 이혼을 금한다.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도 그 안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창조와 명령을 준행한다. 이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1, 24).”
이에,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5-6, 9).”
나아가 우리는 곧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그리하여 성결을 요구하신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지체를 창기의 지체로 변절 시키는 것은 범죄이다.
더욱 단호하게 육체적 음란과 영적 간음은 긴밀히 연관되어 음란의 죄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반역의 죄로 취급하였다. “하체가 큰 네 이웃 나라 애굽 사람과도 음행하되 심히 음란히 하여 내 진노를 샀도다(겔 16:26).” 이로써 “그가 젊었을 때에 애굽 사람과 동침하매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으며 그의 몸에 음란을 쏟음을 당한 바 되었더니 그가 그 때부터 행음함을 마지아니하였느니라(23:8).” 하여, “이와 같이 내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여 너로 그들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며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27).”
이에 오늘도 지난날의 여러 죄악과 어리석은 날들의 섣부른 판단으로 우리가 얼마나 빈번하게 이와 같은 죄악에 빠져들고 살아왔는지를,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호 4:12).” 곧 하나님 외에 다른 그 무엇을 더 의뢰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은 영적 음란이다. 인생의 싯딤, 광야에서 멈추었을 때 우리는 더욱 주의할 것이 안이함이다.
하여,
악인들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시 119:61).
살면서 항상 우리를 유혹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
(63).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65-66).
하다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67, 71).
하고 주 앞에 아뢰며,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74-75).
그리하여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76-7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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