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신 12:8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시 139:16
나의 나 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다 아셨다. 나로 천국을 얻게 하시기 전부터 나의 일생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다. 이는 “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의 이야기다(1). 나의 조상들은 모두 하나님을 만나 주의 길을 걸어간 자들이다. 이 땅에 살면서도 천국 백성으로 사는 자는 복이 있다. 모세는 간곡하게 말하길,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8).”
모든 상황과 여건 속에서 우리는 각기 그 좋을 대로 판단하고 생각한다. 한 가지 사실을 두고도 나라가 두 쪽이 난다. 서로 사랑하여 하나로 살다 둘로 갈라서는 일도 흔하다. 그것은 모두 각기 소견대로 그리 여겨 그러하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모든 성경은 이와 같은 사실을 바라보게 한다. 하여 그 날에,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 둘로 갈리어 하나는 이리 가고 하나는 저리 간다. 이를 위하여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나는 지금의 이 모든 사회 현상과 개인의 여러 사연들이 생동감 있는 교훈이라 여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우리가 정작 우리의 일로 씨름하는 것 같지만 그 모든 일에는 하나님이 전달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다. 우리는 이를 알 때 점점 더 단순하여질 뿐이다. 보면 있는 사안을 놓고 누구 이야기, 언제의 이야기를 결부시켜 초점을 흐리는 화법의 사람들이 있다. 저들의 특징은 그때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자신들의 기준으로 판단하려 할 뿐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없는 생각 구조를 가졌다.
우리의 특징은 한 길 가는 순례자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 6:24).” 이것저것을 섞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진리와 멀어질 뿐이다. 우리는 다만 오늘 주어진 일에 충실할 뿐이다. 그것이 설령 아픈 일이면 아픈 것도 일이어서 열심히 아프면 된다. 그러할 때 주 앞에 더 간절하여서 온전하여진다. 낙심과 좌절일 때 그것으로 충실하다면 주 앞에 이를 아뢰며 낙심 중에 혹은 좌절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문제는 자꾸 꾀를 내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려 한다. 그럴 때 특징은 이랬다저랬다 한다. 자신은 늘 곧은길로 가는 것 같으나 그 뒤를 따르다보면 갈팡질팡하다. 그러나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요일 2:24).” 이는 오늘 시인의 고백과 같아서,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시 139:16).
곧 내가 나로 오늘에 있기 전부터 주의 눈이 나를 보셨다! 오늘의 이 모든 나의 날이 하루가 되기 전에 이미 다 주의 책에 기록이 되었다. 이 놀라운 사실에 감동하여 시인은 더하기를,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17-18).
내가 아무리 그 수를 읽고 알고자 한다 해도 항상 또한 묘수여서 다만 놀랍고 기이할 따름이다. 가령 그때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이제는 잘 안다. 그때는 그 일이 그토록 지독하게 원망스럽고 답답하여서 심지어는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주가 나를 살리시기 위한 길이었음을 잘 안다. 가만히 주의 일을 묵상하다보면 나의 나 된 모든 것이 은혜 가운데의 일로 어느 것도 허투루 괜히 생겼던 일은 없다.
나의 유년, 남과 다른 나와 지독하던 가난과 아버지의 억척스러운 목회 과정이 모두 오늘에 이르러는 형제들로 하나 같이 주의 목회현장에 세우시고자 하는 것이었다. 또한 형제들 각자 저마다 겪어야 했던 남다른 일들이 실은 주가 주의 일을 맡기시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는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신 12:5).” 기어이 주가 원하시는 바, 주의 백성으로 주의 일의 동역자로 세우심이었다.
내 곁에서 여전히 주의 일을 감당하는 이들의 면면을 살필 때도 안다. 유난히 저들만 힘들고 저들만 어려운 가운데서 고생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주와 만나고 저로서 주의 일에 쓰임 받는 것으로 보면 확신한다. 어떻게 건강이 저렇듯 안 좋은데도 저 일을 계속할까? 하고 눈여겨보면 그리하여 ‘주 없이 살 수 없는 자’ 오직 성령으로 그 일을 감당하고 있다. 내가 유난스러워서 내 주변만 그러한지는 모르겠으나 목회자로 잘 먹고 잘 사는 이는 없다. 주의 일로 성공하여 출세하여 호의호식하는 자도 없다.
나는 나의 가까운 동역자들의 모습이 더러는 큰 힘이 된다. 곧 저들을 보면 경건을 위하여는 우리로 죄의 올무에 빠지게 하는 것들을 제고하시는 게 보인다. 그렇게 해서,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26:4-5).
사회생활이 어떻고 직장생활은 어떻고 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와 상황을 늘 목에 두르고 다니는 사람치고 참으로 주를 온전하게 바랄 수가 없다. 결국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 3:11).”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는 곳에 머물 수 없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들듯 죄가 있는 곳에 돈이 꼬이고 사람들이 몰려든다. 흔히 대중문화라는 것이 그러해서 그 안에서 온전히 신앙을 지키며 산다는 일은 어렵다. 곧 우리는 버려야 할 게 많은 삶을 사람들이다. 내 것이라고 여기는 한 인생도 건강도 모든 게 미련뿐이다.
결국 그러한 게 우상이 되어 나의 마음을 지배할 따름이다. 이는 육체의 소욕으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어디에나 이와 같은 게 그 마음을 주도하는 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삶이란 불의한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것이 불의냐 아니냐 하고 따져야 하는 것은 모두 불의다. 하나님 앞에 설 때 논하여 따질 게 없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모든 게 불의하기 때문이다. 친구와 성경공부를 할 때도 실제 어떤 일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경우 나는 단언하건대 그 문제는 불의하다. 우리의 심령이 이를 알기 때문에 이를 두고 논하는 것일 텐데,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온유함이란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이다. 그런 자는 항상 만족한다. 아프면 아픈 것으로, 실패했으면 실패한 것으로, 낙심이 오면 낙심하는 것으로… 그런 것으로 어찌 우리가 만족할 수 있겠나? 하고 묻는다면 그럴 수 없으니까 주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으로가 아니면 해결이 안 되는 문제를 안고 혼자서 계속 끙끙거려봐야 사탄에게 틈만 줄 뿐이다. 나는 친구의 일에 단호하게 말한 것 중에, 그러니 여전히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안 믿는 형님 때문이라지만 작정하고 주 앞에서 결단하면 그 형님도 그렇게 강퍅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스스로 놓기 싫은 것이다.
우리가 익숙해진 것들, 내 몸에 밴 것들이 실은 다 주를 멀리하게 하는 것들이 흔하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사는 습관적인 일들이 실은 말씀 묵상을 저해하고, 깊은 기도의 시간을 훼방하며, 내 곁의 한 영혼에게 마음을 주고 수고와 애씀의 사랑을 나누는 일에 인색하게 한다. 늘 그래왔듯이 우리는 그리 살고자 하는 속성이 있다. 사람은 다 의존적인 존재라, 당장 얼마의 돈이 없으면… 내가 뭐라도 쥐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무엇이 없어지면 순간 두려워진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이에 시인은 알리기를,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 2:7).
이는 천사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 1:5).” 이내 주와 같이 주의 나라에서 주의 자녀로 그 모든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시려고,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이 놀라운 존재들이 어쩌다 사람구실이나 하며 사는 것으로 생의 즐거움을 삼고자 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하여 우리가 들어갈 문(門)도, 나아갈 자리도 오직 하나여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더러는 순종이 어려울 때 복종이라도 시켜야 한다. 날마다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켰다는 바울 사도의 고백이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사랑할수록 두려움도 하나 더해지는데 이는 그 사랑을 잃을까 하는 것이다. 오늘 아이가 보내온 성경구절은 로마서 16:19-20절이다.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19-20).” 오늘은 이것으로 아이와 출근 전 성경공부를 할 것이다.
로마의 성도들이 그 신앙과 헌신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진리에 순종하고, 믿음에 근거하여 밝히 거짓된 궤휼을 올바로 분별하여야 한다. 순종한다는 것은 그 받은 바 진리의 교훈에 서서 행한다는 믿음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단언하였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0, 22).”
그러므로 거짓 선생과 가짜 복음을 주의해야 한다. 말씀은 선포할 뿐 선동하지도 설득하지도 않는다. 당시 로마 교회뿐 아니라 오늘 날에도 이와 같은 ‘거짓 선생들’이 넘쳐난다.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에 사로잡힌 인간이다. 저의 선동에 휘둘려 신봉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유혹적인 간계를 이기고, 다시는 허무한 것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하는 말씀에 유념해야 한다. 우둔함으로 거짓 선동에 미혹되는 경우는 흔하다. 흔히 남들 다 하는, 괜찮을 것 같은 문화나 유행에서 우리는 별로 경계하지 않고 웃고 지나치기 일쑤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런 ‘악한 데’서 우리가 미련하기를, 즉 점점 더 둔감하여지기를. 무슨 세대니, 어떤 주의니 하는 따위에 휘둘리다 보면 자칫 지혜로 판단하고 경계하는 게 ‘꼰대’ 같다. 그러니 다들 이게 무슨 염병이나 되는 것처럼 ‘바른 말’을 해주는 것은 피하고, 같이 호응하고 웃어넘기는 데서 너그러운 줄 안다.
여기서 ‘미련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케라이우스’는 고대 형용사로 악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이란 뜻이다. 해서 예수님도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하셨는데, 여기서 ‘순결하다’는 것이 ‘아케라이오이’라는 단어로 순수하여 죄가 없음을 의미하는 앞서 바울이 사용한 단어의 의미와 같다. 해서 바울은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
즉 우리로 ‘미련하라’는 것은 정말 미련해서가 아니라, 그런 데 굳이 알려고 하지 말아도 된다는 소리다. 하여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하시는 다음 구절이 강하게 울린다. 즉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나 그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곧 물거품처럼 헛되이 사라질 것이다. 이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평강의 하나님에 대하여는 여러 곳에서 자주 언급한 바 있다(롬 15:33, 고후 13:11, 빌 4:9, 살전 5:23, 살후 3:16, 히 13:20). 이는 백성들을 분열시켜 불안을 조성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직장, 돈, 건강, 자식문제 등등 이 모든 것에서 평강을 주실 것이다. 곧 우리가 하나님으로 권세와 능력을 삼을 때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이는 사탄의 머리를 예수께서 밟으신 것과 같다(창 3:15). 결국 우리의 결말은 우리의 발 아래에 사단을 상하게 하실 것이다!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다.
지금도 나를 억누르려 하는 것을 우리는 이내 짓밟아 뭉갤 것이다. 이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궁극적인 승리를 우리에게 두실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오늘도 이처럼 새벽 제단을 쌓는 것과 같이 주 앞에 올라와 말씀으로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139:7).
이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1-3, 6).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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