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신 23:21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 150:6
서원은 주께 향한 약속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고 하는 게 물건이나 마음을 뜻하면서 ‘어떤 일을 하겠다’는 것으로 드려지는 약속이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레 27:2).”
이에, 서원은 맹세하다, 다짐하다, 헌신하다는 뜻이다.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의도에서 자발적으로 바치거나 헌신할 것을 약속하는 행위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그러나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신 23:21-23).”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고 하신다. 서원하고 갚지 않으면 서원하지 않는 것이 낫다. 서원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를 기다리신다. 나의 인생에서 어릴 때, 세례를 받으면서 어린나이에 나는 감동하여 서원하였다. 더 어릴 적부터 부모의 가난과 피나는 헌신을 보고 진저리쳤으면서도 어찌 그리하였는지,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어린 게 뭘 안다고 그처럼 세례를 받으며 내가 죄인인 것과 그에 따른 주의 죽으심이 나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나의 삶을 두고 서원하게 하였을까? 주의 종이 되겠다, 목사가 되겠다, 하고 약속하였던 뜨거움은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시들해지고 장가들고 사회생활하면서는 그저 그랬었지? 하는 정도의 생각뿐이었다.
이내 이처럼 돌이켜 주께 서원했던 것을 갚게 하시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나는 그야말로 실감나고 생생하게 경험하였다. 강제로라도 끌고 오셨고, 여러 번 돌이킬 기회를 더하시고 그때마다 말로 어찌 다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과 사건과 상황으로 기적 같은 일을 보이셨는데도 나는 그때뿐 도로 세상을 향해 가기 여러 번이었다. 그럼에도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전 5:4).”
이를 유도하시는 데 있어,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3).”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에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5).” 일시적인 감동으로든지 혹은 어떤 궁지에 몰려 살려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한 섣부른 약속이었든지, 하나님은 이를 기억하고 계셨다! 하여 지혜자는 충고한다.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6).”
돌아보면 나의 인생에서 나는 이를 피하려 안간힘을 쓰고 하나님은 이를 이내 갚게 하시려고 그리 긴 시간을 돌고 돌아서 오늘에 이른 것 같다. 결국 가장 귀하고 값지고 평안한 삶이었을 서원으로 갚아지는 삶이었는데 그땐 그걸 몰랐다. 세상으로 어울리며 살았던 때는 괜한 걱정과 염려로 미루고 미루다 주를 멀리하는 삶으로까지 치달으며 도망쳤던 것 같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결국 나에게 가장 좋은 서원으로 갚게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맹세한다는 것, 약속을 드리고 사는 일이란 참 귀하고 감사한 일이다. 곧 서원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에서 비롯되는 자발적인 삶이다. 누구의 강요나 억지로 할 수 없고 그리 해서도 안 된다. 이를 종용해서도 그리 강요당하여서 행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서원한 것에 대하여는 이행하여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 모든 처지와 상황을 다 아신다. 이를 외면하면 자신을 기만하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을 조롱하는 일이 된다.
그땐 그게 그리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릴 때 철없을 때 감정에 이끌려서 또래 친구들 몇과 어울리듯 그리 한 것 정도로 치부하려 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때에도 지금에도 우리의 서원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진다. 주가 더하시는 마음으로 주와 약속하는 행위가 된다. 지키지 못할 서원이면 애초에 하지도 말아야 할 것인데, 그때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면 반드시 할 수 있게끔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그 모든 상황과 여건에서 주가 이루게 하시는 일이었다. 하여 ‘입으로 언약한대로 행할지니라.’ 하심은 어쩌다 어쩔 수 없이 그리 한 것이라 해도 그리하게 하신 이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분명한 인정과 승복이 따라야 한다. 곧 누구든지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서원한 것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해로울지라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기본입장이다.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시 15:4).
그리하여 ‘서원하였거든’ 곧 맹세를 하였거든 결국 자신이 선언한 약속을 절대 변경할 수 없음인데, ‘그가 맹세한 것을 깨뜨리지 말고’ 이에 서원을 불이행함으로써 생을 사는 동안 돌고 돌아야 하는 세월의 무게가 참으로 더 잔혹하기도 하였다. 나름은 산다고 억척스럽고 살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인정받고 내 자신에게 또한 만족함을 주는 삶으로 살고자 하였으나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게 허사였다. 친구도 은인도 그때뿐이고, 좋은 일이나 만족스러운 결과라는 것도 일시적인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 약속한 바를 이행치 않는 모든 성공도 만족도 실패였다. 이는 또한 하나님을 우롱하는 죄악이었으며 불신앙이었다. 설령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환호와 갈채가 있어 이를 성공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그 또한 엄청난 착각이었다. 차라리 실패가 낫다. 나는 이제 확신하는 것이 우리 삶에서 적당함이 우리를 망친다. 적당히 건강하고 적당히 성공하여 적당히 먹고 살만하다고 여기면서 적당히 만족하고 사는 한 하나님과의 약속 그 서원은 점점 더 멀어져 인생 저만치에 가서는 후회와 탄식으로 통회하는 마음뿐이다.
보면 내 곁의 여럿이 여전하여서 스스로도 서원을 서원했다고 인정하지 않는 자리에서 산다. 듣다보면 그 속에 주께 향한 죄책이 따르는데도 이를 아랑곳하지 않으려고 외면하면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생은 참 길다. 길고 먼 것 같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 없이 살았던 시간과 서원으로 주와 함께 하는 시간으로 나뉜다. 사람들도 주를 사랑하는 사람과 주와 상관없이 사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런 것 같다. 그리하여 “입에서 나온 대로”들 산다!
오늘 날 우리 사회의 단적인 예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지가지인 삶을 가만히 지켜볼 때,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은 참으로 귀한 것 같다. 그런 삶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는 삶일 것이다. 말만 앞서거나 그때마다 말이 바뀌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죄악 된 삶이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거나 죽고 난 뒤에나 후회하고 탄식하게 될까?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그러므로 오늘 시편은 간결하면서 모든 시편을 함축하고 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150:6).
호흡이 있다는 것, 아직 살아서 사는 동안이라는 것으로 기회가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올해 들어 마음을 강하게 붙드는 말씀이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하시는 강력하고 무서운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다. 다시는 기회가 없고 있을 수도 없다. 또는 스스로 이만하면 괜찮겠지? 하였을 방심과 설마, 하는 안이함의 순간이다. 이에 주님은 ‘생각하라’는 게 아니라 ‘기억하라’고 하신다. 곧 우리들로도 이를 명심하라 하심일 텐데, 오늘 시편의 ‘호흡이 있는 자마다’ 하는 표현에서 그나마 아직 기회가 있음을 두고 생각하게 된다.
이 표현은 시편 전체의 결론으로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할렐시>에 속한다.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인간과 자연이 차별 없이, 모든 생명의 의무인 것을 알게 한다. 더욱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예술적 재능을 동원하여 주를 찬양하라 하심으로 결론이 난다. 모든 피조물은 그 존재의 이유가 있다! 하다못해 하찮은 핀셋 하나도 그 쓰임에 따른 것처럼, 생명은 그 생명의 가치로 한 평생을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가치 있다. 나무는 두 팔 벌려 일생을 하늘을 우러러 주를 찬양한다. 모든 동물들도 사는 동안 자신에게 주신 생을 다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산다. 우리 믿는 자는 성소의 한 곳에서 뿐 아니라 발이 닿는 모든 곳 어디에서나 주를 찬양하고 이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편 1편에서도,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곧 이는 찬양이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이 장엄한 요구로 함축되고 축약된다. 아이는 나면서부터 두 팔을 휘저으며 주를 찬양하며 우렁차게 울어댄다. 오늘 이 짧은 시에서 ‘찬양’이라는 단어가 무려 11회나 사용되면서 모든 피조물들로 하나님을 찬양할 의무가 있음을 알게 한다.
찬양의 장소에는,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150:1).
하고, 하나님의 임재 처소인 ‘성소’와 ‘권능의 궁창’을 언급한다. 여기서 성소는 건물로서의 시공간의 성소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을 인정하고 이를 행사하시는 온 세상, 모든 사방 그 어디나 다 포함하고 있다. 또한 ‘권능의 궁창’도 하나님의 권능이 발휘되는 모든 장소, 그 시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이 발휘되는 하늘과 땅의 모든 영역이다.
나의 일생에서 나는 이제 어느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권능의 궁창이 아니었던 곳이 없었음을 인정한다. 심지어는 내가 죄 중에 빠져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가운데 살았을 때도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기회를 더하셨다. 돌이켜보면 ‘아, 그때 그 지경에서도 주가 나와 함께 하셨구나!’ 하는 어느 순간, 그 때가 늘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을 때 이 하늘의 물, 궁창은 제 자리를 유지하였다가 불순종의 때이면 그 물이 쏟아져 커다란 홍수와 멸망으로 치달을 것처럼 나를 휩쓸고는 하였다. 그때에도,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107:23-25).
그럴 때면 돌이켜 그때마다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셨는데,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7-28).
오늘에 이르러 어느 한 순간도 주가 함께 하지 않으셨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이에 시인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찬양하라 한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150:2-5).
곧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일생에서 구원의 방향으로 나를 인도해 오셨다. 그리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으로든지 이제는 그것들로 주를 찬양하시는데,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그러할 때,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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