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
신 22:5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시 149:5-6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 가운데 거하시며 그에 따른 모든 결정을 관여하신다. 이는 우리를 위한 것으로 자칫 허상과 거짓으로 자신을 속여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게 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심이다. 그런 가운데 오늘 말씀은 그 내용을 문자적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께서 주의 하게 하려 하심이 무언가? 묵상하게 한다.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신 22:5).” 내용 그대로면, 오늘 우리의 생활에서 부딪치게 되는 부분이 있다.
당시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남녀의 옷이 비슷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단지 옷 입는 방법이나 옷의 모양에 관한 것으로 국한지어 이해하면 안 된다. 이는 남녀가 구별된 옷차림을 통하여 ‘경건한 삶’을 살도록 하는 교훈이 들어있다. 곧 남녀를 각기 구별되게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도 이는 중요하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 2:7, 21-22).”
그러므로 남녀의 성(性)을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사람을 나누는 기본이 된다. 이를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남녀의 의복을 바꾸어 입는 등’의 행위에는 단순하게 옷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성적인 역할이나 그 차이와 성분을 의도적으로 뒤틀어놓은 것으로 ‘하나님의 신성한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삼위 하나님’ 되심을 통해 하나님의 질서와 단순성의 구분을 나타내신 것과 같다. 이에 위배되는 모든 것은 가증스런 일이다. 방종과 타락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남녀가 의복을 바꿔 입는 풍습은 후대 가나안 생활에서 저들의 문화와 풍습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의복의 개념은 ‘준비하다’는 뜻으로 ‘준비된 어떤 것’이란 의미다. 따라서 이 말은 단순히 옷이 아니라 각종 장신구나 기구, 그릇 따위 등의 모든 기물을 일컫는 단어에서도 쓰여 그 구분이 모호해지고 심지어 성정체성에서도 자신의 감성과 그 바라는 바에 따른 자기 의지적인 선택이나 기호로 여겨 무질서한 관계를 자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하고 오늘 말씀은 단호하게 힘주어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그냥 옷차림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혼재되어 이를 ‘가증하다’하고 정죄하시는데, 이는 더 나아가 특히 우상 숭배 행위와도 관련하여 몹시 혐오스러운 것을 어떤 공연이나 문화로 승화한답시고, 구역질나는 것 또한 의미를 부여하여 예술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오늘 날의 인식과도 같다. 그만큼 사람들의 선호나 기호는 점점 더 질서 있고 특유의 단순함을 무시하고 뒤섞고, 비틀어서 ‘더러운 변기’를 떼어다 무대에 놓음으로 서로가 이를 예술작품으로 보는 시선과 같다.
이에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신 7:26).” 하시는 말씀에서 우리가 주의하고 또한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즉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18:9).”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문화적 교류니 존중이니 화합이니 하는 수사로 마구잡이로 뒤섞어버린다.
그러므로 남녀가 서로를 구별하지 않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께 우상숭배만큼이나 역겨운 일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질서가 무시되어 이를 문화니, 요즘 젊은이들의 감성이니 하는 따위로 허용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교회를 꾸미거나 더욱이 어떤 성물을 함부로 바꾸어 디자인하고 문양을 새기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행위에 주의해야 한다. 가령 십자가 모양이 다양하게 디자인되어 끝을 여미거나 오므려서 굴곡지게 하거나 그 위에 수를 놓아 이를 보면서 ‘예쁘다, 특이하다’ 하는 식의 반응으로 호객행위를 하듯 시선을 끄는 것이 불순하다.
심지어는 이교도적인 발상으로 거꾸로 놓거나 길이를 뭉뚝하게 하여 이를 목에 걸고 귀에 달아서 액세서리로 삼는 일에서도 불순하다. 나는 이에 대해 이교도적인 것으로 단정한다. 교회 안에서의 같은 행위라 해도 이를 변형하고 꾸미거나 과장하여 사람의 기호에 맞게 구색을 갖는 모든 것을 그리 여긴다. 심지어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보는 일에서도 이를 하나님 앞에 경건함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술객이나 마술 또는 영매(靈媒)와 같이 뜻을 풀어 사람들을 현혹하거나 자신을 과시하는 모든 행위는 거짓되고 미신적인 주술과 다를 게 없다.
일련의 사태에 대해 어느 목사는 바로 그 날, 계엄을 선포하던 날 오전에 어느 개인방송에 출현하여 자신은 본래 영적인 사람이라 기도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속속들이 보이는데, 일련의 사태 직전에 저는 대통령은 되었지만 감옥에 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한 내용을 버젓이 사람들 앞에 내세우며 과시하듯 말할 때 나는 저이가 목사인가 무당인가 하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들었다. 그 말은 맞고 틀리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귀신도 사탄 마귀도 예수를 먼저 알아보고 떠나실 것을 요구하기도 한 것처럼, 그런 가운데 이제는 감옥 가는 것을 앞장서서 막으려 하는 저의 이율배반반적인 자아도취에 내가 더욱 두려움이 들기도 한다.
그런 자여서이겠으나 사람들이 그를 선호하고 심지어 모 당에서는 저와 연줄을 닿아야 다음 총선에서 당선될 수 있다는 여론에 기꺼이 단상에 올라 그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손을 한 번 잡으려고 기를 쓴다. 어쩌다 교회가 심지어는 목사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에 주동이 되고 있는 것일까? 결국 어느 목사는 자신을 신이라 하며 여신도들을 농락하다 그야말로 감옥에 갔다. 그런 가운데서도 저를 신봉하는 세력들은 길거리에서 지지하며 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4-5).”
때가 그러한데, 이에 남녀의 옷을 구분하여 입으라 하시는 데는 이와 같은 깊은 의미와 그 결말의 엄청난 간극과 죄악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이에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고하길,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시 149:5-6).
하는 다소 서로의 간극이 있는 것을 본다. 먼저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하심에서, 쉬기 위하여 침대 위에 누워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 대하여 ‘승리의 날을 고대하며’ 기쁨의 새 노래를 드려야 한다고 한다. 이는 한 날의 수고로 족하였을 하루를 돌아보면서 주 앞에 누워서도 주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어서, 나는 늘 잠자리에 들 때면 돌아누워 주님, 하고 주를 부르며 이런저런 말씀을 고하다 잠이 들고는 한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서 의미심장하다.
‘우리 입에 찬양이 있고, 두 날 가진 칼이 있다.’
즉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尊榮)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하는 뜻인데, 입에는 하나님을 높임이 있다. ‘입에는’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있다. 내가 아뢰는 여러 푸념과 걱정과 억울함과 속상함과 서러움도 주 앞에 아뢰고 고할 때는 찬양이 된다. 그러니까 그것을 내가 직접 당사자에게 또는 그 일을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말하거나 행하면 죄가 되나 이를 주 앞에 쏟아놓으면 ‘모든 게 다 찬송이 된다.’ 이는 하나님의 뜻으로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하심에서도 나타난다. 하여 우리의 기도나 찬송은 ‘잘 드는 양날의 칼’ 같이 위험하거나 실용적이다. 또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존함으로 찬송이 되고, 내가 나서려 할 때는 남을 살상하는 무기가 된다. 이와 같이 시편은 우리가 주께 아뢰는 말에 있어 그것이 찬송이면서 동시에 남을 공격하는 무기도 될 수 있음을 상기하게 한다.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느 4:17-18).”
우리가 주를 경외하는 성도로 살아간다는 일은 이처럼 평안하면서도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다. 마치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하나로 동전의 양면과 같이 우리 성도의 입술도 그와 같아서 주께 아뢸 때 찬송이 되고, 자신이 직접 지껄여 그 대상을 상대하려 할 때는 살상무기가 되고 죄가 된다. 일련의 사태에서 나는 특히 목사나 교회나 성도가 자신을 드러냄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 되어 이는 양날의 칼 같이 자신의 말이 자신을 찌르고 난도질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이에 따른 목적이 있는 삶으로 그 목적은 우리가 임의로 의미를 두어 남녀 옷을 서로 바꿔 입고, 그 역할이 뒤바뀐 것처럼 혼돈하는 것에 대하여 경계한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이다. 선과 악을 섞을 수 없고 선을 악이라, 악을 선이라 서로 바꾸어 판단해서도 안 된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사 5:16).” 우리는 무엇보다 이 앞에서 주의하고 삼가 또한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현상은,
첫째, 거짓이 거짓으로 이어지고 뒤엉겨 서로 수레를 끌 정도가 되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혼자이면 저럴까? 싶은 사람들이 두서넛, 대여섯이 동조하면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이를 당론이라 하여 자신들이 무리지어 따르는 것과 주장하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거짓인지 아닌지는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둘째, 그렇게 선과 악이 혼재하여 문제는 문제가 뭔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이 또한 군중심리와 같이 서로가 서로의 거짓을 선이라 여겨줌으로 자신 또한 그러하다고 어느 순간 판단을 하지 못한다. 다만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절대선이 되었다. 듣는 것만 듣고 보는 것만 보면서 그 세계에 갇힌 것이다.
셋째, 이는 자신들이 곧 명철하다 여김으로 상대는 다 ‘개돼지 같이’ 어리석게만 여겨진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이에 성경은 엄히 이 모든 일에 대하여 ‘화 있을진저!’ 하고 심판을 경고하신다.
하여 오늘 말씀은 우리로 서로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히 10:24, 딤후 3:17).” 하시는 서로 같은 말씀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하나님께서 일일이 우리의 이 사소한 일상 가운데서 주의하고 지켜야 할 것을 알게 하심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신 말씀으로 모든 게 귀결된다. 오늘의 이 모든 사태가 우리를 교훈하고 훈계하며 다스리신다. 그리하여 서로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는 데 있어,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149:1).
행여 다른 데 기웃거리며 서로의 같은 목소리에 동조하여 ‘남녀 옷을 구별하지 못할 때’ 선을 비틀면 악에 가깝고 악을 비틀면 선보다 더욱 더 선 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
(2).
곧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6).
이에,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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