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전봉석 2025. 1. 14. 05:47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

신 24:6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에 따라 주변의 모든 이를 우리도 인자하게 대하는 일이겠다. 그러므로 주의 살아계심을 우리 삶으로 보이며 살 수 있도록, 우리가 곧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5-17).”

 

그러니 우리가 어떤 이에게 어떤 냄새일지는 알 수 없으나 다만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음으로 듣는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그런 가운데 저마다의 생활 기반을 지켜주는 일은 귀하다. 오늘 말씀에서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신 24:6).” 하신 부분에서 한참을 머물게 된다. ‘맷돌’이 가지는 의미는 맷돌에 갈아 가루로 만든 후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생활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수단이다. 이를 저당 잡는 것은 저의 기본 생활을 저해하는 일로 이를 금하시고 있다. 비단 맷돌뿐만 아니라 의복이나 식기 등 의식주에 있어 기본적인 모든 것이 해당된다.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출 22:26-27).”

 

이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사람에 대한 기본 예의를 말하고, 이는 결국 저를 만드신 하나님을 존중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비롯된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는 일에 있어 사람의 마음으로 좋다, 하는 감정의 것이 아니다.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는 대하는 일에서도 그렇고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일은 단순히 상대하는 그 이상의 의미로 여겨야 한다. 곧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저를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지켜주는 일은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그와 같은 존중과 대함을 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에 서로를 생각하는 데 있어 또 한 구절의 말씀에서 머물게 되는데,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신 24:19).”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주를 인정하는 데서 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니까 곡식을 벨 때 너무 인색하게 그 수확을 다 취하지 말고, 이미 베어 놓은 곡식 단 가운데 한 묶음을 잊어버리고 두고 왔으면 그냥 두라고 하신다. 또는 타작마당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밭에 흘린 경우에도, 이는 가난한 자의 생계를 위하여 다시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아예 추수할 때 밭 한 모퉁이에 수확하지 않고 남은 것을 그대로 두라고 하시는 규례도 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9-10).”

 

하실 때 말씀 뒤에 붙은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시는 부분이 강하게 다가온다. 곧 이는 선의로 그리 하라 권하시는 게 아니라 명령인 것이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23:22).”

 

이와 같이 우리가 누군가를 생각하고 우리의 곁의 ‘아무나’를 대상으로 선을 행하는 일은 저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저를 지으시고 그 삶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리 행해야 한다. 여기서 ‘뭇’이라 하는 단위는 곡식의 작은 묶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쌓아 올리다’, ‘곡식을 모으다’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원래는 곡식더미를 일컫는 단어이지만 그 속뜻으로는 ‘쌓아지고 모아지는’ 것이라면 결코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신 24:20-21).”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행함에 있어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고 남는다. 이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동일하게 강조하시는 바,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와 목적을 수시로 강조하심이다. 그런데도 이를 무시하고 악착같이 구는 자에 대하여,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암 5:11).”

 

그 결과는 좋을 리 없다. 우리말에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고 하는데, 실은 개처럼 번 사람은 개처럼 쓴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자기밖에 모른다. 자신의 이익과 손해에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으면서 남의 것을 대하고 사용하는 데는 함부로인 경우가 허다하다. 부자로 사는 일이란 대부분 이처럼 악착같은 데가 있어야 한다는데 성경은 그를 가리켜 하나님이 저를 상대하겠다고 하신다!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사 3:13).”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심문하러 오시리니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이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너희의 집에 있도다(14).” 우리가 아무리 시치미 떼고 아닌 척 하며 산다지만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5:8).”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여 부자가 되려 하는 자에게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9-10).”

 

그래서도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 19:24).” 그만큼 가진 게 많다는 것은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겸손히 주를 바랄 수 없게 한다. 자주 느끼지만 적당하고 살만하다는 것으로 저의 영혼은 병들 수 있다. 하여 예수님은 이르시길,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그러니 우리의 어려움이 혹은 가난함이 우리로 하여금 주 앞에 더욱 간절하게 하여, 주어진 삶에 감사하게 한다. 이는 참으로 역설적이다. 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딤전 5:21-22).”

 

요즘 정말… 설왕설래 너무 말이 많다. 어느 한 사안을 두고 두 패로 갈라져서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그에 따른 증오가 폭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 양극화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덕이다. 다소 물러나고 양보하고 서로 이해하며 함께 했으면 좋겠는데, 보면 볼수록 그와 같은 바람은 허무할 정도이다. 그러다보니 서로가 극단적으로 치달아 어느 한 쪽이 죽거나 무너지지 않으면 끝날 것 같지 않다. 분단의 아픔을 겪은 지 백 년도 안 되는데, 여기서 또 갈라지려 하는 것인지…. 잘못한 쪽이나 잘한다고 하는 쪽이나 서로를 향한 증오와 갈등은 점점 더 심화된다.

 

그런 때에 우선은 그 무엇도 우리 생명보다 귀하지 않다는 사실,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신 24:10-13).”

 

옳고 그름은 주가 판단하심으로 정의를 세우실 것을 믿으며, 우리는 다만 저의 잘못이라 해도 그 ‘전당물’을 강제하지 말고 심지어는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하시는 주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 무엇도 사람의 생명보다 귀하지 않음으로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느니라(민 35:33).” 곧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사람에 대해 반드시 그 값을 주가 물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시 49:7-8).

 

누가 대신할 수 있는 생명은 없다. 심지어는 자신도 자신의 생명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우리에게 더하신 한 날의 수고와 그에 따른 밥벌이에 감사하며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고 사는 게 복이었다. 곧 우리의 진정한 부유함은 주로 인한 충만함에 있다. 이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6:19-20).”

 

주님이 이르시는 우리의 참 부유함은 밭에 두고 온 한 뭇의 곡식단도 아니고, 악착같이 모으고 취하여 더욱 더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으로도 아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21).”

 

그러니 우리가 각자의 생의 한 지점을 통과하면서 이와 같은 말씀으로 멈추어서 온전히 주를 바랄 때, 누구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일이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주를 인정하는 데서 가능하였다. 내가 내 몸을 건사하는 일이나 이 한 생의 건강이나 목숨을 귀히 여기는 것도 주가 맡기신 바,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우리에게 이는 곧 말씀이다. 오늘도 이와 같은 말씀으로 머물고, 주를 사랑함으로 온전히 바랄 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부디 서로가 함께 하기를, 이를 위하여 한 발씩 서로 양보하며 이해할 때 오늘의 이 엉킨 실타래 같은 정국은 생각보다 쉽게 풀릴 것이다.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과 하나님과의 상대함이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4:12).” 상대더러 뭐라 할 것도, 서로가 설왕설래 말을 섞다 다툴 일도 아니다. 그렇게는 어느 한 쪽이 죽기 전까지 답이 없다. 결국 우리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이에 오늘도 시편으로 입 안 가득 물고 우물거리며,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내가 복 있는 자로 사는 길은 그러하여서, 그러할 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3).

 

결국 우리의 형통함이란,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