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의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 하여 전쟁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하지 못하리라
대하 13:12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 53:2-3
남보다 못한 게 가족이고 친척이고 친구이고 이웃이다. 전쟁에서도 보면 같은 민족끼리의 전투가 더 비참하다. 유다의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 전쟁을 벌였다. 그런 것에 비해 아비야의 통치는 고작 3년이었다(주전 913-910). 그런데도 오늘 본문은 열왕기서에 비해 아비야의 생애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것은 다윗의 집안과 여호와를 배반한 여로보암을 무너뜨린 것이 바로 아비야이기 때문이다. 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전쟁하기 전의 상황을 언급하고(1-12), 전쟁의 결과를 기술하여(13-20), 그에 따른 아비야의 사적에 대해 기록한다(21-22). 본문은 특히 이번 전쟁의 전후 상황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면서 유다와 하나님의 역사적 사실과 그 섭리에 초점을 두고 있다.
곧 이를 통하여 선악의 싸움은 끝이 없고 그것이 같은 민족이라 해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 2절에서 보면 “예루살렘에서 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미가야요 기브아 사람 우리엘의 딸이더라 아비야가 여로보암과 더불어 싸울새” 하고 전쟁에 앞서 그 소개가 간략히 나온다. 이를 열왕기서와 연관지어 보면 르호보암과 여호보암 사이에 저들이 사는 날 동안 전쟁이 있었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사는 날 동안 전쟁이 있었더니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 아비얌의 남은 사적과 그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상 15:6-7).”
이와 같은 전쟁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를 우러르면 선악간의 전쟁이다. 세상 끝날까지 계속 될 것이다. 하여 개인적으로도 우리 안에 계속 되는 전쟁이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것을 자꾸 되풀이하는 우리의 죄의 습성은 일상과 같다. 그러다 무뎌지면 그럴 수 있지! 하는 타협으로 넘어가고, 다 그러고 사는 게 인생이지 뭐 있겠나? 하는 체념의 수준에까지 다다른다. 이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하고 절규하였던 게 아닐까?
결국은 이와 같은 싸움이 단순하지 않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오늘 이 본문에서 민족간의 싸움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로 그치는 게 아니다. 나는 늘 내 자신이 제일 감당하기 어렵고, 내 곁의 사랑하고 가까웠던 사람일수록 싸워서 이길 수가 없다. 그럼에도 성경은 우리에게 고하신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이것이 어찌 어제오늘의 일이었겠나?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서도 보듯 아담은 대체 어디 있었을까?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했던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곧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열매를 건넬 때 어찌하여 말씀을 적용하지 못한 것일까? 그런 거 보면 우리 성도의 삶이란 게 늘 상처뿐이다. 실패와 좌절을 달고 사는 게 필수적이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씨를 기다리는 데 지쳐 다메섹에서 데려온 엘리에셀과 몸종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로 대체하여 하나님의 뜻을 번번이 거역하려 하지 않았던가? 늘 기준이 되는 다윗도 결국은 밧세바를 범하였고 살인까지 자행하였다. 오늘 본문의 요인도 솔로몬 때문이다. 그의 사치와 허영, 나이들어 우상숭배로 인한 북이스라엘과 유다의 분단을 가져왔고, 이는 참으로 비극적이지 아니한가? 결국 우리는 스스로의 상처와 분열로 만신창이가 되어서야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인가…?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삼하 10:12).”
기도해야 한다. 이는,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시 37:1).
어쩌면 그것이 우리 인생의 숙명이고 믿음으로 사는 여정이라면, 그리하여 번번이 우리의 실패와 좌절을 통해 스스로의 허물과 죄를 인정하게 된다. 주가 아니시면 살 수가 없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사 66:10).” 그 성은 어디인가? 오늘의 나로서는 이 교회이고, 가만히 주 앞에 독대하고 앉는 나의 책상이다. 그렇게 주 앞에 아뢰는 이 시간이다. 믿음으로가 아니면 답이 없다. 오늘 본문은 이를 일깨운다. 북이스라엘과 유다의 전쟁은 사실상 앗수르에 의한 이스라엘이 멸망하고서야 끝이 났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늘 본문은 유다의 아비야의 통치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아비얌이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왕상 15:3-5).”
즉 저로 의롭다 하심은 다윗을 보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였다. 곧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는 다윗에 대한 평가는 놀랍다. 그런 가운데 아비얌 혹은 아비야는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였다. 즉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다. 즉 아비야는 르호보암과 동일한 죄를 범했다.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매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대하 12:1).”
곧 말씀을 버리면 더는 볼 게 없다. 그러나 역대기서에서는 아비야의 개인적인 일생보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북이스라엘을 징계하신 사실을 부각시킨다. 아비야가 지은 죄에 대한 문제는 그런 점에서 덮어두고 있다. 곧 우리가 죄를 지을 때도 용서 받을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눅 11:4).” 그러므로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왕상 8:50).”
하는 기도에 응답하실 때에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대상 21:8).” 곧 우리는 언제든지 죄와 허물로 너덜거리듯 실패와 좌절의 늪에 빠질 수 있지만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 17:4).”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은 한이 없으시다.
이에 오늘 본문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중심으로 한 신정 국가의재건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아비야의 범죄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여로보암과의 전쟁을 상세하게 묘사함으로 여호와께서 진정 싫어하시는 ‘금송아지 신’에 대해, 하나님은 늘 이기셨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아비야와 여로보암 사이의 전쟁은 단지 민족간의 반목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죄의 문제로였다. “너희가 아론 자손인 여호와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쫓아내고 이방 백성들의 풍속을 따라 제사장을 삼지 아니하였느냐 누구를 막론하고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끌고 와서 장립을 받고자 하는 자마다 허무한 신들의 제사장이 될 수 있도다(9).” 하는 데서 저들의 허물과 죄를 지적하고,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우리가 그를 배반하지 아니하였고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있으니 아론의 자손이요 또 레위 사람들이 수종 들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또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또 금 등잔대가 있어 그 등에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나 너희는 그를 배반하였느니라(10-11).”
그러므로 아비야의 이와 같은 연설은 대단히 상세하다(4-12). 반면 열왕기에는 이 연설에 관한 대목이 전혀 없다! 이 연설의 내용에는 당시 유다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숭배’를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점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즉 본문은 이스라엘의 신앙적인 타락상을 들어 상대적으로 유다의 경건성을 비교하여 언급한다. 곧 유다 왕국의 신앙은 유지되었다. 실제로 아비야가 왕위에 즉위할 때 이와 같은 문제가 난제였다. 예루살렘 성전을 떠난 북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숭배하면서도 여전히 견고하게 존속하는 사실이 유다 민족에게는 큰 혼돈이었다.
아비야는 금송아지 숭배가 헛된 것을 알고 그것을 숭배하는 제사장이 모두 가짜임을 입증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성전 중심으로 유다를 하나로 세울 수 있었다. 이는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르호보암이 북왕국에 대해 과감한 정책을 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북이스라엘은 더욱 더 견고하여져 여로보암이 여전히 왕위를 지키고 있었다는 데서 다윗의 정통성에 의문이 생길 수 있었다. 따라서 아비야는 다윗의 정통성을 전쟁을 통해서라도 입증해야 했다. 분명히 이 전쟁을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우리가 그를 배반하지 아니하였고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있으니 아론의 자손이요 또 레위 사람들이 수종 들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의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 하여 전쟁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하지 못하리라(10, 12).” 그러므로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르매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치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유다 앞에서 도망하는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므로(15-16).” 믿음으로 사는 삶은 담대함으로 주를 의지할 때 힘이 난다. 이에 시편은,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시 27:3).
그러므로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이와 같은 고백과 찬송이 우리 믿는 자들의 것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항복하고 유다 자손이 이겼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음이라(대하 13:18).” 하고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전쟁의 주체가 하나님이 되심을 분명히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은 최후의 승리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 17:7).”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전쟁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데 있다.
15년 필리핀 사역의 결말로 어떤 아이의 고소와 그에 따른 억지 주장으로 결국은 ‘촉법소년법’ 규정에 의해 아이와 아이엄마의 악의적인 고소와 재판으로 2차 공판이 잡히면서, 동생은 그냥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합의를 택했다. 이러저러하여 공탁을 걸고 합의금으로 결국 3천 5백을 주게 될 것 같은데, 결국은 더 받으내려고 저쪽은 안달이지만 동생은 대출에 카드론까지 끌어다가 그나마도 맞춰주려 하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 사회 현상을 보면서도 악에 악을 더하여 돈돈거리며 뒷거래들이 오가고, 누가 공천개입을 하고 안 하고… 서로의 폭로가 가관이다. 동생이나 우리는 억울하건 어쩌건 악에 악을 더하는 이러한 다툼에 끌려갈 수 없어서 빚에 빚을 져서라도 그저 우리가 잘못했다고 하고 그만하려 한다.
그러나 분명한 승리는 이것이니,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이 땅에서의 지고 이기고, 억울하고 뭐고… 세상이 멸망하기까지는 이와 같은 다툼과 전쟁은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소식을 들으면서 속상하고 마음이 어렵지만 그래서도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심을.
그들이 나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으나
나는 주의 법도들을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교훈들을 내가 지키리이다
(시 119:87,88).
하여 오늘도 시편으로 호흡하며,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53:1).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정의하는 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의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 하여 전쟁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하지 못하리라(대하 13:12).”
이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2-3).
그런 가운데,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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