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하현. 2025. 8. 7. 17:26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

대하 16:9-10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 56:10-11

 

 

어쩌다 아사도 그리 되었다. 우리가 한결같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앞에 두 장에서 아사는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였다.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14:2).” 그리하여 어제는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15:16).” 하는 내용으로 은혜를 받았다. 그렇게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을 것 같은데, 오늘 이 말씀은 속상하다. 먼저는 다윗의 찬송 시편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 56:10-11).

 

이는 같은 사건이라 할 수 있게,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에’ 지은 찬송시편이다. 아사가 통치하면서 일생을 하나님을 의지하였는데, 그의 말년에 여호와보다 사람을 의지하였다. 이는 물론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북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의 공격이 있었다. 이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아사는 아람 왕 벤하닷을 끌어들였다(1-6). 그때 선견자 하나니가 여호와보다 아람 왕을 의지한 그를 책망하였으나 아사 왕은 오히려 하나니를 핍박하였다(7-10). 그래서 또 하나님은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아사가 병에 걸렸는데 그렇듯 위급할 때 아사는 하나님보다 의원을 더 의지하였다(12). 결국 아사는 왕위에 있은 지 41년에 죽었다(13-14).

 

일심으로 전심을 다해 한결같은 신앙으로 살다 죽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신앙의 방심이 언제나 우리 턱밑에 있는 것 같다. 하여 주님은 이르시길,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우리로서는 기도 외에 답이 없다. 하여 시편을 사는 일은 찬송이고 기도다. 과거를 통해 현재의 은혜를 산다. 현재의 은혜로 과거를 회개한다. 과거의 죄사함의 경험으로 미래를 소망한다.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시 56:12-13).

 

그러므로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3-34).”

 

돌이켜보면 예전의 나로 살던 때가 순간순간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오늘 이 은혜가 과거의 죄를 회상하여 주의 긍휼하심으로 미래를 소망하게 한다. 하여 베드로는 충고하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유무에 달렸다. 오늘 본문에서 선견자 하나니는 일러, “그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7).” 하여 아사가 그동안 잘 섬기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을 의지한 것을 책망하는데, 그 이유가 다른 게 아니다.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8).”

 

그러니까 당장 눈앞에 보이는, 더 빠르고 확실할 것 같은 방도를 찾는 것이다. 구스 사람이란 앞전에 백만 대군을 이끌고 남유다를 공격하였던 구스인 세라의 군대를 말한다. 그런데 오늘 저들의 도움을 받음으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하고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아사가 여호와를 의지하기만 하면 바아사에게서 승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무익함과 뿐만 아니라, 그와 동맹 관계에 있던 아람도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와 같이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하자 내가 당신에게 은금을 보내노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 그가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3).”

 

결국 이방국가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았던 왕들은 여럿이다. 우선은 여호사밧도 그러했다.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19:2).”

 

또한 여호람도 그러했는데 앞서 선지자 엘리야의 서신을 받고도 듣지 않았다.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되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음행하게 하기를 아합의 집이 음행하듯 하며 또 네 아비 집에서 너보다 착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여호와가 네 백성과 네 자녀들과 네 아내들과 네 모든 재물을 큰 재앙으로 치시리라(21:12-14).” 결국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들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사 여호람을 치게 하셨으므로(16).”

 

이 대체 왜들 그러는 것일까? 요아스도 그랬다.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사 다시 여호와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경고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니라(24:17-19).”

 

또 한 명은 아마샤이다. “아마샤가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사 한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시니 그가 이르되 저 백성의 신들이 그들의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구하나이까 하며(25:14-15).”

 

그래서 오늘도 결국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8).” 여기서 룹 사람은 구스 사람 세라의 군대 속에 룹 사람이 함께였다. 결국 저들의 군사 백만 명과 병거 삼백 대를 모두 무찌른 게 아사 왕이었다. 그때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러했다.

 

오늘 본문은 아사가 세 가지의 잘못을 했다. 첫째는 북이스라엘의 왕 바아사와의 관계에서 승리하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대처했다는 사실이다(2-5). 서로 맺은 동맹을 하나님보다 의지하는 것으로, 오히려 재물의 힘을 의지했을 뿐만 아니라 재물로 사람을 매수한 것이다. 두 번째 잘못은 이를 지적하고 일깨우는 선견자(선지자)를 핍박했다는 사실이다(7-10). 아사는 자신에게 정직한 말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한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어 핍박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이를 다시 한 번 돌이킬 수 있는 기회로 질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 돌이켜 회개하고 도움을 구하기보다 의원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신앙을 버렸다(12).

 

열왕기서는 아사가 아람 왕 벤하닷을 뇌물로 매수해 대신 싸우도록 한 것만을 언급한 반면(왕상 15:17-24), 오늘 본문은 아사가 말년에 행한 하나님 앞에서의 부정적인 사건을 기술함으로써 그를 평가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자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말한다. “다윗 성에 자기를 위하여 파 두었던 묘실에 무리가 장사하되 그의 시체를 법대로 만든 각양 향 재료를 가득히 채운 상에 두고 또 그것을 위하여 많이 분향하였더라(13).”

 

결국은 이렇게 허무한 게 우리의 신앙일 수 있다. 솔로몬도 그러했듯이 처음에 좋았다가 노년에 망치는 신앙이 흔하다. 조심스럽지만 부친의 친구 분으로 같이 신학을 하고, 그렇게 어려운 시절 오로지 말씀 중심으로만 사역하려고 매년 서로 돌아가며 말씀 사경회를 하였던 분들이 몇 있다. 인상적으로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은 그때가 나환자촌에 있는 교회에 담임하고 있으셨을 때인데, 네댓 분의 목사님들이 아버지의 좁은 서재에 모여서 며칠씩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회를 자주했다. 그때 어머니는 간식도 준비하고 끼니를 챙기셨다. 누가 어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당시 천원을 용돈으로 주신 것도 기억난다. 그때 학생 버스요금이 50원이었다.

 

그런데 어느 분은 노년에 교회 공금을 횡령하였고, 누구는 어려운 개척교회로 보험을 하다 은퇴 후 여전히(?) 어디 대형 쇼핑몰에서 청소원으로 일하신다. 또 누군 엉뚱한 복음에 사로잡혀 평생을 일구어 말씀으로 다져왔던 교리를 무시하고 무슨 피복음을 받아야한다나 하며 다른 길로 갔다. 하긴 내가 좋아하던 어느 전도사는 어려운 처지에서 택시운전까지 하다 목사고시를 단념하였고, 친구 아무개는 어디 선교사로 나갔다가 사업가가 되었다.

 

나로서는 이런 예들이 소중한 교훈이 된다. 나라고 무얼 장담할 수 있을까? 뭘 변변하게 하는 것도 없지만 행여 다른 길로 빠질까 하여, 나는 가끔씩 일부러라도 오늘의 연약한 육신과 공황장애와 같은 정신적인 어려움을 감사로 여긴다. 누가 이해하고 못하고, 나는 그리 여김으로 주신 상황에서의 나의 하찮음을 사랑하고 귀히 여긴다. 더러는 가까운 이들이 특히 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길 때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은 한 영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령 생각 같으면 아무개가 우리 교회로 와서 같이 이 교회를 일구었으면… 하는 생각도 하고, 아픈 아이의 엄마가 그래도 아이가 우리 교회로 오는데 같이 와서 신앙생활을 했으면… 하고 생각하다 서운하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은 내가 뭘 어떻게 하라마라 할 게 아니다. 그러느니 어디 큰 교회로 나간다는데 뭐라 할 것이며, 다닐 거면 ‘제대로 된 교회’로 나가겠다는데 또한 뭐라 할 일인가! 하긴 저들이 온다 해도 지금의 나로서는 주의 권능으로가 아니면 가망이 없다. 하여 가끔은 주께서 나로 목사로 삼은 것은 여느 목회자처럼 무얼 바라셔서가 아니라, 나 하나… 이 불쌍한 영혼 하나 이렇게라도 말씀으로 붙들어두시려는 것이려니, 하고 생각한다. 더불어 늘 이상한 사람들(?)을 지나가듯 붙이셔서 나로 하여금,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하심을 느낀다. 말로, 글로, 어떻게 도와줄 줄 알게 하시려고……. 하여 오늘도 나는 이처럼 말씀 가운데서 특히 아사의 노년을 안타까워하다가 새삼 나의 약함을 감사한다. 그리하여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는 이 말씀을 나는 귀히 사랑한다.

 

14장, 15장에서 보였던 아사의 경건하여 주를 경외하였던 모습이 더욱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14장에서 아사는 구스 사람 세라의 군대가 아무리 압도적으로 큰 대적이었어도, 오늘 북이스라엘의 바아사의 군대보다 강했을 때도 주를 의지하였다. 그때 아사 왕이 세라의 군대에 대해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했는데, 왜 오늘은 바아사의 군대를 대하면서 아람 왕 벤하닷에게 도움을 구한 것일까?

 

또한 그땐 선지자 아사랴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면서 오늘은 선견자 하나니의 권고에 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을까? 앞장에서는 전쟁 이후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이었는데, 오늘은 아사 왕의 마음이 점점 완악하여져 결국 중병에 시달리면서도 왜 하나님이 아닌 의원을 더 구하였을까? 결국 우리는 언제든지 순간, 인간 중심의 합리적인 생각으로 ‘아차, 하는 순간에 훅, 간다.’ 나는 이게 늘 두렵다. 교통사고를 몇 번 당했을 때, 그 순간 바로 5분 전 아니 1, 2분 전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하면서 극도의 후회를 한 적이 있다. 속도를 조금만 줄일 걸, 핸드폰을 보지 말 걸, 하는 따위의 지극히 사소한 일이나 그것으로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날아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시 44:5).

 

이를 위하여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항상 이를 또 명심하고,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오늘 이 상황이 어떠하든지, 주가 함께 하심을 의지하여 주만 바라며, 주신 날 이 작은 일에 일심으로 전심을 다해 충성하기를.

 

결국은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8).” 이에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어리석은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렘 5:4-5).” 그래서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부디 항상 근신하고 깨어 있기를. 하면,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 56:1, 3).

 

하고,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4).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