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하현. 2025. 8. 9. 19:07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하는지라

대하 18:22-23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시 58:11

 

 

유다의 성군(聖君) 가운데 한 사람인 여호사밧이 지은 두 가지 죄가 드러난다. 하나는 북이스라엘의 악명 높은 왕 아합과 사돈을 맺었다는 것이다.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더라(1).” 또 하나는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라 하는 거짓 선지자의 말을 따랐다는 것이다. 어제도 살펴보았듯이 여호사밧의 선정과 유다의 번영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산당을 헐고 우상을 타파하고, 정치 종교 개혁에 주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오늘은 민족의 최대 과제인 분단과 분열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던 여호사밧이 분열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과 동맹하여 길르앗 아못 전투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보면 여호사밧이 지나치게 아합과 화합하여 친분을 쌓고 스스로 화평을 꾀하려 하였다. 그런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아합에 의한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말을 참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보다 우선하였다는 것이다. 아합의 거짓 선지자 400명은 거짓의 영에 의해 길르앗 라못 전투에 참여하라고 결정하였다.

 

이러한 판단으로 여호사밧은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의지하게 되었다. 선견자 예후는 이를 책망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여호사밧과 아합이 동맹을 맺고 함께 전쟁을 치르려 할 때 선지자들에게 묻는 장면부터 의아하게 보인다(1-27).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로 미가야의 부정적인 에언을 하나님의 참 뜻으로 받지 못하고, 이내 길르앗 라못 전투를 행함으로 아합과 함께 전에 참여하였다. 그런 가운데 아합이 죽었다(28-34).

 

이러한 가운데서도 여호사밧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다. 순간적으로 여호사밧은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의 뜻을 구하였고 급박한 상황 속에서 저는 본능적으로 주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신지라(31).” 곧 이 놀라운 은혜는 앞서 이 일의 주도적인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주목하게 한다.

 

먼저 여호와께서 부리는 영들에게 물으셨다.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그에게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까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와서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19-20).” 하는 부분에서, 이 모든 역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한다.

 

결국 일련의 사태는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의 가문과 혼인을 통해 사돈지간이 되면서 이루어진다. 그로 인한 여파는 단순하지 않다. 먼저는 여호와를 경외하던 여호사밧이 아합의 길을 따라갔다는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21:6).” 곧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이다.

 

사돈이 된지 이 년 후 여호사밧이 아합을 방문했다. 열왕기서를 보면 아합은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손꼽힌다. 아합이 얼마나 악한 왕인가 하면,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왕상 16:30-31).” 여기서 이세벨은 엘리야를 두려움에 떨게 한 악명 높은 왕후였다. 당시 거짓 선지자들과 맞서 싸우고, 온 땅에 기근을 물리치게 했던 엘리야가 쫓고갔다.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상 19:2, 4).”

 

이처럼 아합과 이세벨은 온 이스라엘을 악으로 떨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일가하길,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 행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21:25).” 결국 아합이 또 악을 행하게 된 계기가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여서라 한다. 이 일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두려운 일인가?

 

우리가 누구와 어울리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에서 어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그야말로 그의 숙명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마침 오늘 점심께 딸애와 산책을 하며 이와 연관된 이야기를 하였다. 회사에서 부대끼던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그것이 결국은 사람의 성품이고 기질이라는 사실에 돌이킬 수 없다는 데서 어려움을 토로했다. 또한 요즘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였는데… 서로 나이가 있다 보니 이제는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서로가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이야기 중에 그 친구의 조모가 늘 당부하는 말씀이 ‘결혼할 사람’으로는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믿는 가정’이었으면 좋겠고, 몸에 문신을 하지 말 것과 항상 조신하였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당부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듣다가 어느새 딸아이가 더는 아이가 아닌 것에 놀라웠고, 주 안에서 신중하게 이런저런 사건과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하려는 것에 감사하였다. 나 역시 늘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당부하며 기도하였는데 그리하여 더욱 감사하였고, 새삼 기대도 되었다. 물론 서로가 어찌될지는… 주의 섭리 가운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을 알지만, 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란 마치 그의 온 우주를 마주하는 일이다.

 

즉 한 사람의 인격이란 평생을 살아오며 길들여진 습관이었을 테고, 이것들이 모여져서 저의 숙명이 될 거였다. 이처럼 한 사람이 살아온 생을 송두리째 망라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란 결국 하나님이 주신 은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더욱 확신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서로를 둘러싼 사람과 사람의 모든 생을 더하고 더해서, 한 사람은 개별적이지 않다. 그의 인생은 개체적이기 전에 계통적이어서 그의 부친과 그의 부친의 부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그 모든 개별적인 인생은 각각의 개체적인 인격이 형성되었을 텐데, 이는 평생 몸에 밴 습관으로 이루어진 숙명이란 것이다.

 

이는 일찍이 하나님의 세계와 같아서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 4:3).” 하고 우리는 서로의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주 안에서 단언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본문은 아합에 대하여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었다’고 하고 있다. 이는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상대적으로 여호사밧은 하나님 앞에서 남유다의 훌륭한 왕이었다. 그런 자가 아합과 사돈을 맺고 시드기야와 친분을 쌓았음은 흠결이 된다. 마치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고, 죽음과 생명이 합할 수 없는 것처럼,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하심은 그 때문이다. 곧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하고 이어지는 설명과도 같다.

 

이에 대하여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대하 19:2).” 하는 경고의 메시지는 당연하였다. 본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합을 방문한 여호사밧에게 아합이 길르앗 라못을 공격하자고 제안한 것과 같다.’ 여기서 여호사밧이 동의를 하였고, 그래도 하나님의 예언자에게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아보자고 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선지자 400명’을 모으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라고 하며, ‘하나님이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하는 답을 내놓았다. 이를 두고 오늘 말씀은 실제 이 일의 발단이 하나님께 있음을 넌지시 알린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그에게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까?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19).”

 

이에 “한 영이 나와서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20-21).” 욥의 고난에서도 보았듯이 이 땅의 모든 일에는 하나님 몰래, 하나님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더러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한다고 할 때, 우리가 아무리 간구하고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으신다고 할 때, 반드시 그 뒤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자주 묵상하는 위의 내용도 그리하여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바르게 돌아보아 살게 한다. 오늘 본문도 마치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움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인생의 기회가 다 지나가기 전에 우리는 이러한 현상으로 말씀을 바로 듣고자 해야 한다. 정리하면 당시 유다 왕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으로 나라를 통치하였다. 결국은 그러한 넉넉함으로 이 지경이 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그때 길르앗 라못의 전투에서 아람의 병거들이 여호사밧을 에워싸자 그는 곧바로 주를 찾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은 방동하였다.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아서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신지라(31). 결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죽고 난 뒤 여호사밧이 겪었을 고난은 생략한다.

 

전체 문맥의 흐름에서 열왕기서에서는 아합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과 달리 역대기에서는 여호사밧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열왕기와 같은 내용을 동일한 진술로 서술하는데도 역대기서는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노골적인 관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즉 여호사밧의 신앙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삶에 우연처럼 필연으로 역사하심을 나타내는 있다.

 

내일은 선견자 예후가 책망한 여호사밧의 범죄(19:1-3)가 무엇이었는가를 살피고, 오늘 우리에게 주목하게 하심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여호사밧이 두 왕국 간의 통일을 조성하기 위해 아합과 동맹한 것 자체가 죄이었다. 이스라엘의 악한 아합과 동맹 관계를 맺음으로 그런 가운데서 여호사밧이 선지자 미가야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아합의 의견을 따른 것도 엄연히 죄이다. 이처럼 여호사밧은 아합 외에 아하시야(20:35-37), 여호람(왕하 3:7)과도 동맹하여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선견자 예후의 지적이 동맹 그 자체가 나름은 선한의도였다 해도 죄라는 것을 지적한다. 아합의 집안과 혼인 동맹을 맺고, 이는 단순히 그럴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출 34:12).” 하는 내용은 앞서 살펴보았던 바울의 설교와도 동일한 논리로 우리 삶을 경계하게 한다. 결국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은 극악한 바알 숭배자인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함으로 다윗의 혈통을 멸종의 위기로까지 몰고 갔다(왕하 11:1-3).

 

또한 여호사밧은 아하시야와도 동맹하여 동일한 실수를 범했다. 결국 아하시야를 따라 배를 건조하다 여호와의 징벌을 받았다(20:35-37). 그러나 이와 달이 여호람과의 동맹 때 선지자의 말을 경청함으로 오히려 여호사밧 덕분에 이스라엘 왕 여호람이 여호와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경우도 살피게 될 것이다.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여호사밧이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하는지라 이에 이스라엘 왕과 여호사밧과 에돔 왕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왕하 3:11-12).”

 

오늘은 여호사밧이 범한 실수가 북이스라엘과의 동맹 그 자체보다 동맹을 맺고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 때문이다. 즉 하나님 중심의 방법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 어떤 타협도, 우상숭배도 허용하게 되는 것이 문제다. 우린 늘 이처럼 사소한 듯 일상의 죄를 묵과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을 이루시는 데 있어 ‘거짓말하는 영’을 동원하여 거짓 선지자들을 충동하여,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오늘도 새삼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중심에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금 되새긴다.

 

오늘은 이 묵상글을 쓰는 동안에 예순 살 정도의 여성이 방문하였다. 글쓰기를 다시 하고 싶다는 것이다. 예전에 모 잡지나 지역 문단에도 기웃거릴 정도로 열정과 나름의 자신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글이 써지지 않고 책도 읽을 수가 없다고 토로하였다. 지난번에 전화로 상담하고 대충 듣다 거절을 표했는데 몇 개월이 흐르고 오늘은 직접 방문하여 이러한 사실을 밝히었다. 저의 말을 들으며, 주님 뭐죠? 하고 왜 또 와서 굳이 독서록부터라도 글쓰기를 가르쳐달라고 하게 하신 것일까? 나는 이 우연 속에 숨기신 하나님의 뜻을 궁금해하며, 우선 토요일 6시에 한 번씩 수업을 해보기로 했다. 하다보면 하나님의 숨은 의도를 밝혀주시겠지….

 

오늘도 시편으로 묵상을 되새겨보며,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

(시 58:2).

 

나는 주 앞에서 우리의 폭력 같은 날들을 놓고 시편으로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6-8).

 

도대체 우리가 이 전쟁 같은 하루 속에서 어떻게 하면 주를 더욱 사모하며 사랑할 수 있을까?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10-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