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현. 2025. 8. 10. 20:01

 

여호와께 속한 모든 일에는 대제사장 아마랴가 너희를 다스리고 왕에게 속한 모든 일은 유다 지파의 어른 이스마엘의 아들 스바댜가 다스리고 레위 사람들은 너희 앞에 관리가 되리라 너희는 힘써 행하라 여호와께서 선한 자와 함께 하실지로다 하니라

대하 19:11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 59:16-17

 

 

돌이켜 자신의 잘못을 듣고 돌이켜 회개하여, 이를 개선하려 하는 것이 신앙이다. 그 어떤 신앙도 완전하지 않다. 사람은 누구라도 허물과 실수로 그릇 행하기 일쑤다. 오늘 본문은 아합과 동맹하여 아람과의 전투를 치르고 패전한 후 여호사밧이 선지자 예후가 책망하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의 궁으로 들어가니라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1-2).”

 

왕의 신분으로 저가 악하고 교만하였더라면 이런 지적에 순응할 리 없다. 저도 알았기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게 무엇인가를 깨달았을 것이다. 특히 역대기서의 관점은 북이스라엘을 배제한다. 이유는 저들이 완전히 여호와를 떠난 나라로 보았다. 여호와께서 미워하는 나라로 단정하였다. 따라서 유다의 역사로 풀어가는 데 있어, 여호사밧이 그러한 나라, 비록 한때는 동족이었을지 모르나 악하고 우상숭배에 사로잡힌 아합과 군사 동맹을 맺고 처신한 것은 명백한 죄인 것을 드러낸다. 이는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전쟁에서 돌아오는 여호사밧을 묘사하는데 있어 ‘평안히 돌아왔다’고 서술하는 데는 의도가 있는 듯하다. 하나는 실제 여호사밧이 이번 전투에서 목숨을 잃을 뻔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심으로 예루살렘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 속에 나타나 있었다.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하는지라(18:16).”

 

평안히 돌아온 여호사밧을 선견자 예후가 맞으며 잘못을 지적한다. 예후의 부친은 하나니이다. 여호사밧의 부친 왕 아사를 책망했던 선지자다. “그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16:7).” 이런 걸 보면 믿음의 뿌리가 그 대를 이어 줄기를 다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인 것 같다.

 

여기서 먼저 붙들게 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미워하는 자와 연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바,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출 34:12).” 다들 사회생활을 운운하여 어쩔 수 없는 관계 형성에 대해 나름의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기도 하겠으나 ‘좋은 게 좋은’ 신앙은 없다. ‘아닌 건 아닌’ 게 신앙이다. 그렇다면 분명 하나님 앞에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이와 같이 '아니하며, 하니하며'의 명징한 시편으로 살아야 한다. 바울도 언급하기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이를 예수님은 한 발 들어가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이는 곧 이런저런 관계를 운운하여 ‘그래도 그렇지…’ 하고 허용하는 범주에서 죄가 물든다.

 

이는 우리가 지나온 시간에서 그때 어떠했는지를 생각하면 된다. 말씀은 이르시길,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사 51:1).” 곧 하나님은 우리를 ‘반석에서 떠내신 것’ 같이 또한 ‘파낸 우묵한 구덩이’ 같은 그 시절을 돌아본다. 대체로 그때가 좋았다. 신앙 없이 살던 시절, 거리낌 없이 어울리던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행하고 살던 일들을 떠올리면… 심히 부끄럽고 송구한지, 그립고 먹먹하여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지?

 

사실 나는 지금으로 감사하고 충만하다. 그러면서도 그때 어울리던 사람들과 추구하던 일들이 자유로웠던 것 같다. 곧 한 생으로 끝이라면, 저 약속의 본향이 없다면 오히려 지금의 이와 같은 인내와 절제가 미련하게 여겨졌을 터….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이와 같은 진리를 붙들고 가르쳤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여기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다.

 

아굴라는 유대인으로 종의 신분이었다. 브리스길라는 로마인으로 유명한 가문의 여식이었다. 저 둘이 어떻게 만나 사랑을 하고 혼인을 맺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행 18:2).” 로마인들의 박해를 피해 고린도로 도망쳐 천막 치는 일을 하다, 바울과 같이 기거하면서 복음을 듣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증언하기를,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롬 16:3).”

 

곧 저들 부부를 동역자라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이 복음,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그리하여 저들이 에베소 교회를 개척하고 바울이 2년을 담임하여 목회하였다. 곧 우리에게 이 십자가의 도는 생명의 빛이지만 안 믿는 자들이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에겐 그런 우리가 미련할 뿐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23).”

 

곧 오늘 선지자의 말을 듣고 여호사밧이 돌이켜 무엇보다 우선 주력한 것은 복음이다.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살더니 다시 나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민간에 두루 다니며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 또 유다 온 나라의 견고한 성읍에 재판관을 세우되 성읍마다 있게 하고,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심이니라(4-6).”

 

‘재판하는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있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 하고 여호사밧은 재판관들에게 다짐하게 한다. 하여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심이니라.” 하는 말을 그 중심에 두었다. 여호사밧은 일찍부터 그의 부친과 함께 활동한 선견자이며 또한 유다의 선견자로서 북왕국에서도 활동했던 유일한 선견자 예후의 부친 하나니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이해의 여지가 없다. 이는 아합 왕을 대표로 하여 그는 백성들에게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게 하였다. 특히 이세벨은 아세라 상을 숭상하였다. 이것이 곧 그들이 여호와를 미워한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사랑한다 하면서 다른 신들 곧 돈이나 명예나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이면 이것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증거이다. 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곧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은 세상을 거스르고 세상은 그러한 성령을 거스른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믿음으로 산다면서 갈등과 회의가 떠나지 않는 것은 같은 손에 두 개의 세계를 붙잡고 씨름하는 것과 같다. 하여,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하시는 주의 말씀으로도 오늘 아합과 그의 백성들이 어찌하여 여호와를 미워하였다고 하시는가, 하는 것을 확실히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여호사밧이 아합과 사돈을 맺고 남북의 화해를 도모하였다는 것과 나아가 군사 동맹을 맺고 길르앗 라못 전투에까지 참가하였던 것은 충분히 지탄받아 마땅할 일이다. 이를 두고 선견자 예후는 여호사밧에게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나이까?’ 하고 질타하듯 물었던 것이다.

 

이를 문자적으로 읽으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하신 말씀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하신 말씀을 대립구도로 놓고 모순되다 할 수 있겠으나 이는 피상적인 생각 때문이다. 마음의 문제와 악행에 가담하는 행동은 엄연히 다르다.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는 것은 마음의 태도이고, 그렇다고 원수의 악행에 동조하고 가담하는 행동을 같이 놓을 수는 없다 것이다.

 

여호사밧에 대한 예후의 책망은 결국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의 일에 적극 가담한 실책’을 두고 하는 것이다. 여호사밧이 같은 민족인 야합과 북이스라엘에 대해 개인적인 연민을 품었을지 몰라도 그렇다고 저들과 혼인관계를 맺고 같은 일에 가담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우리가 안 믿는 자들 곧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저들을 주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친절을 베푸는 것과 실제 저들처럼 하나님을 부정하고 심지어 의식적으로 문화나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미신을 숭배하거나 뇌물과 비리를 눈감아주고 또는 가담하는 일은 결코 옳지 않다.

 

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시 139:22).

 

하는 시편의 단호한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여호사밧의 이와 같은 가담으로 저가 살아있을 때는 모압과 암몬의 침입이 있었다.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어떤 사람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전하여 이르되 큰 무리가 바다 저쪽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나이다 하니(20:1-2).” 물론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이 도우셨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3-4).” 또한 배가 난파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마레사 사람 도다와후의 아들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을 향하여 예언하여 이르되 왕이 아하시야와 교제하므로 여호와께서 왕이 지은 것들을 파하시리라 하더니 이에 그 배들이 부서져서 다시스로 가지 못하였더라(20:37).”

 

뿐만 아니라 여호사밧이 죽은 후에는 그의 자식들에게 재난이 있었다.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자기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국의 씨를 모두 진멸하였으나 왕의 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몰래 빼내어 그와 그의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게 하였으므로 아달랴가 그를 죽이지 못하였더라 여호사브앗은 여호람 왕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이더라(22:10-11).” 결국은 죄악으로 인하여 그 여파는 우리 생의 질곡으로 닥쳐온다. 이에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는 동시에 사랑의 징계이다.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 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도다(사 51:17, 20).”

 

곧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그러므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1).”

 

선견자 예후의 저주의 예언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여호사밧은 그의 부친 아사와 달리 승복하였다. 당시 부친 아사는 선견자 하나니의 저주의 예언을 듣고 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고 학대까지 하였다.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16:10).” 상대적으로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징계하심에 순순히 승복하고,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여호와의 판단에 맡기고, 2차 종교 개혁(대하 19:4)과 사법 개혁(5-11)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완전할 수는 없으나 온전하고, 허물과 실수가 없을 수는 없으나 늘 주를 인정함으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시 59:1).

 

주의 말씀 붙들고 주의 뜻을 간구할 따름이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신 10:12).” 그러할 때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오로지,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

(9-10).

 

하실 것을 굳게 믿고,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1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