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하현. 2025. 8. 12. 17:14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

대하 21:20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시 61:4

 

 

살아생전 여호사밧의 가볍지 않은 그러나 그는 곧 주의 뜻으로 돌아섰으나 그 일의 결과로 자식들이 당하는 고통이 참혹하다. 저는 알다시피 북이스라엘 아합 왕과 화친하고 자식들을 혼인 시켜 사돈을 맺었다. 이스라엘의 아합과 이세벨은 악명 높은 왕과 왕후다. 이를 어찌 경건하였던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가벼이 여기며 그런 것인지….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하여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21:6).” 하여 엘리야가 편지를 보냈다.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되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음행하게 하기를 아합의 집이 음행하듯 하며 또 네 아비 집에서 너보다 착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여호와가 네 백성과 네 자녀들과 네 아내들과 네 모든 재물을 큰 재앙으로 치시리라(12-13).”

 

앞서 여호람의 악행은 참혹하다. 여호사밧에게는 아들 여호람 외에 여러 명의 자식들이 있었다. “아사랴와 여히엘과 스가랴와 아사랴와 미가엘과 스바댜는 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들이라(2).” 하여 일찍 형제간의 다툼이나 분쟁이 있을까 하여, 여호사밧은 “그들에게는 은금과 보물과 유다 견고한 성읍들을 선물로 후히 주었고 여호람은 장자이므로 왕위를 주었”다(3). 그런데 “여호람이 그의 아버지의 왕국을 다스리게 되어 세력을 얻은 후에 그의 모든 아우들과 이스라엘 방백들 중 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4).” 이러한 끔찍한 결과가 어찜인가? 그것은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6).

 

결국 악한 자와 연합하면 필연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게 되어 있다. 마치 전염병과 같아서 건강한 자가 전염되는 것이 당연하지, 전염병자에게 건강이 전가되지는 않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출 34:12).” 이는 성경이 너무 과하게 예민하거나 과도한 것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다. 하여 이를 누구보다 삶으로 경험했을 솔로몬은 후대에게 전하는 말로 노년에 이르러서 간곡하다.

 

“사악한 자의 길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 그의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잠 4:14-15).” 왜 그러냐하면 “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 불의의 떡을 먹으며 강포의 술을 마심이니라(16-17).” 그냥 그런 본성과 성질의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18-19).”

 

이는 짐작하건대 솔로몬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름은 선을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악을 물리치지 않음으로 그의 노년에 그가 젊을 때 얻은 부인들을 사랑하면서 저들의 온갖 우상을 숭배하는 나락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그래서도 바울 사도는 강한 어조로 명령한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결국 악이란 본래 악인 것이지 선을 섞는다고 달라질 게 아니다.

 

오죽하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주께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감당하셔야 했을까?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이 어쩌다 그리 된 게 아닌 것도 같은 이유다. 역대기서에서는 열왕기서와 달리 오직 유다 왕들의 업적만 언급하고 있는데, 르호보암(10:1-12:16), 아비야(13:1-22), 아사(14:1-16:14), 여호사밧(17:1-20:37)에 이르까지의 통치를 살펴보았다. 이에 오늘 여호람이 뒤이어 왕이 되었고, 32세에 즉위하여 8년을 치리하였다. 여호람은 유다의 열왕들과 달리 악정(惡政)을 행하였다.

 

저마다 열왕들도 크고 작은 허물과 실수로 잘못은 있었으나 그때마다 여호와를 경외하였다. 가령 앞전의 여호사밧만 해도 온 유다백성들과 예루살렘에 금식을 선포하고 합심하여 기도하는 등 늘 저는 종교, 정치, 문화적인 개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였다. 그러나 여호람의 통치 전반은 혼란했던 정치와 국가적 정황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오늘 본문은 여호람이 행한 정치적 악정을 서술하고(1-7), 그에 대한 하나님의 정치적 징계를 설명한 후(8-10),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까지 전하고(11-15), 그에 관한 군사적 징계와(16-17) 그 예언의 성취를 그대로 진술하고 있다(18-20). 즉 여호람의 악정에 대해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직접, 간접적으로 징계하시고 경고하셨음에도 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끝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그의 최후는 비참하였고 앞서 그의 형제들마저 참혹하였다.

 

죄는 이렇게 환경 탓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의 문제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에 따른 바울의 개인적인 사투는 눈물겹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이를 잘 알기에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3-34).”

 

그러니 오늘도 살면서 우리가 악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 악이 우리를 주의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악에 물들지, 악이 선을 따르지는 않는 이치다. 그래서도 나는 아이들의 결혼 문제나 친구 관계에 있어 상당히 주의를 기울인다. 다들 나이가 차서 뭐라 한다고 듣거나 순순히 따를 나이들은 아니지만 그런 점에서 나는 나의 젊은 날 어리석었던 과오와 함부로 어울리던 사람들에 대해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한다. 염치없지만 가끔은 말하길 ‘나처럼 살지 말라’는 것이 나의 당부이기도 하다. 일일이 다 열거하고 솔직히 다 말할 수는 없으나 대학을 졸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서 생활하던 나의 날들을 나는 혐오스러워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의 은혜의 불가항력적인 은총으로 오늘의 내가 이처럼 주를 바라는 것임을 아이들에게 고백하곤 한다.

 

결국 또 보면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딤전 3:4).” 하는 말씀처럼 그래서도 자식은 늘 기도 제목이고 주께 맡기는 우선이기도 하다. 내가 아는 주변의 여러 목회자 가정에서 망나니 같은 자식들로 그 부모의 심정이 곤죽이 되는 경우를 본다. 교회를 등지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경우는 예사고 일부러 더 그러는 것처럼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점에서도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두 아이가 그 마음에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난 더 바랄 게 없다. 딸애는 내일모레 이틀간 모 소년원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데 그 일정을 준비하고 행하는데 이번 여름휴가를 다 쓴다.

 

나는 같이 가족들과 둘러앉아 가정예배를 드리거나 생일날이나 무슨 날이면 먼저 기도를 하고 함께 축하하고 합심할 수 있는 것이 복되다. 그야말로 나는 하나도 모범이 될 만한 신앙적인 본을 보이지 못하고 아이들을 키웠다. 그런 거 보면 이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고, 그 부모의 여파 때문만도 아니다. 그렇게 치면 다윗에게 어찌 압살롬이 나올 수 있었겠나?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각자 그 개별적인 신앙의 의지에 달렸다. 더욱이 불의의 방법으로는 당장에 어떤 영화를 보는 듯하나 결국은 모든 것을 잃을 뿐이다.

 

“속이고 취한 음식물은 사람에게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의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잠 20:17).”

 

일련의 전직 대통령 내외의 모습을 보면서도 뇌물을 받거나 권력을 쥐고 사욕을 취하려던 결과가 참혹함을 알 수 있다. 결국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합 2:9-10).” 거기에 기생하려던 자들의 사욕까지도 역사에 남을 치욕을 당하고 있는 것 아니겠나?

 

결국 신앙은 참으로 철저하게도 개인의 의지와 결단을 요구한다. 오죽하니 모세의 뒤를 이어 백성을 이끌면서 여호수아가 외쳐 말하길,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그러니 누구 핑계 댈 게 아니다. 같은 자리에서도 고백은 개인적이어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오늘 본문을 보면서 신실했던 여호사밧 왕에 이어 여호람은 바알을 숭배하는 아달랴의 사주 때문인지, 심지어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의 정책을 반대하는 방백들을 제거하는 등 잔인한 정치를 결행하였다. 그저 권력을 잡기에 급급하다 에돔과 립나의 배반을 당하고, 오히려 정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이와 같이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지배하에서 벗어났더니 오늘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여 여호람의 지배 하에서 벗어났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더라(대하 21:10).”

 

그의 악함이 얼마나 컸던가, 엘리야가 글을 보내 심판을 예고할 정도였으니(12-15), 여호람의 최후는 국가적으로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침략으로 인한 고통을 수반하였다(16-17). 물론 여호람 개인적으로도 창자가 빠져나오는 심한 질병으로 고통당하다 최후를 맞았다(18). 오죽하면 백성들까지도 그의 죽음에 애도하지 않았고, 분향을 거부함으로 그에 대한 미움을 노골적으로 표시하였다(19-20).

 

결국 왕위 계승의 문제에서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 분명 오늘 본문은 여호사밧은 보다 착한 아들들이 있었다고 한다. “오직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음행하게 하기를 아합의 집이 음행하듯 하며 또 네 아비 집에서 너보다 착한 아우들을 죽였으니(13).” 그런 가운데 악한 여호람을 왕위에 오르게 함으로 유다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렸다.

 

또한 여호사밧과 아합이 사돈을 맺음으로 아합의 악한 딸 아가랴가 남유다의 왕후가 되었다.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6).” 이를 어찌 가벼이 여길 것인가? 또한 여호람은 형제들을 살해함으로 다윗의 왕족이 멸할 위기에까지 직면하였다. 여호람의 뒤를 이는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자기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국의 씨를 모두 진멸하였으나 왕의 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몰래 빼내어 그와 그의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게 하였으므로 아달랴가 그를 죽이지 못하였더라 여호사브앗은 여호람 왕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이더라(22:10-11).”

 

아달랴의 사주에 따른 여호람의 우상 숭배 정책은 결과적으로 백성들마저 등을 돌리게 하였다. “여호람이 또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예루살렘 주민으로 음행하게 하고 또 유다를 미혹하게 하였으므로… 여러 날 후 이 년 만에 그의 창자가 그 병으로 말미암아 빠져나오매 그가 그 심한 병으로 죽으니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분향하던 것 같이 그에게 분향하지 아니하였으며(11, 19).” 그의 우상 숭배 정책은 앞서 여호사밧에 세운 율법 중심의 유다 백성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운행되는 것으로, 여호사밧은 민족의 통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한 의도로 아합과 연혼을 맺고 여호람을 왕위에 세웠을 지 모르나 하나님의 섭리는 역사 속에서 여호사밧의 선한 의도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있어, 우리의 선한 의도로 하는 게 아닌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종교화합을 외치고, 서로의 종교를 존중하네, 성소수자의 인권이 어쩌네 하는 인본주의는 악을 더욱 악으로 치닫게 할 뿐이다.

 

우리의 믿음과 이 신앙은 엄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곧 우리의 자의적인 판단이나 기준으로 현실적으로 어쩌니, 현대사회가 어쩌니 하는 소리는 모두가 공허하다. 모든 역사는 매순간이 현대였고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러므로 누가 감히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며 인간중심의 인권이나 평등 따위로 말씀을 혼잡하게 할 수 있겠나?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하여 소위 영향력 있는 교회 목사나 그의 목회는 더욱 조심하고 또 근신해야 한다. 누구의 설교를 듣다가 기겁을 한 게 모 성경만 진리이고 대부분 교회들이 사용하는 현재의 NIV 성경은 이교도적이란 소리에 놀랐다. 또 누구의 설교에서 어느 정당이나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하나님의 종으로 떠받들어 운운하는 소리에 한숨이 났다. 심지어는 설교 강단에 태극기를 걸어놓고 애국을 운운하며 성경을 배제하는 설교를 듣다 치를 떨었다.

 

이스라엘도 두 쪽 내시고 끝내 망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하물도 이 나라가 뭐? 초대 일곱 교회가 뭐? 그것들로 뭐가 그리 위대하거나 존귀할 게 있겠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따위의 교회나 오랜 유물을 나는 경계한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촛불을 밝히거나 합장을 하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우상숭배다. 오늘 이 악한 여호람은 8년을 다스리고 죽었다. 고작 8년으로 저가 이룬 것이란 악에 악을 더하다 창자가 배 밖으로 나와 죽은 것이다. 부디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이에,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시 61:2-3).

 

하면,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4).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5,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