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현. 2025. 8. 13. 16:06

 

아하시야도 아합의 집 길로 행하였으니 이는 그의 어머니가 꾀어 악을 행하게 하였음이라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가 패망하게 하는 아합의 집의 가르침을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아합의 집 같이 악을 행하였더라

대하 22:3-4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 62:8

 

 

여호사밧이 우상 숭배자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혼인 관계를 맺고 동맹하였던 일(18:1-4)이 이처럼 역사의 굴레를 거꾸로 굴러가게 하였다. 오늘 이 다윗 왕가의 비극은 어쩌면 아주 사소한, 그저 가벼이 여긴 정도로 화친하여 북이스라엘 아합과 사돈을 맺은 것으로 오늘 본문에서 그 절정을 보여준다. 곧 우리가 흔히 ‘다 그럴 수 있는 일’로 여기는 지극히 사소함으로 이와 같은 비극의 역사는 너무 참혹하기만하다.

 

곧 유다의 3대 성군이라 불릴 여호사밧의 인간적이었던 행위가 그의 아들 여호람을 죄악으로 이끌더니 결국은 다윗 왕가 전체의 비극으로 확산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또 역사는 흘러 이제 아하시야의 시대에 비극의 절정은 여호람의 막내 아들 아하시야가 간신히 왕위에 올라 겨우 1년을 통치하는 동안 악행만 범하다가 살해당한다는 사실이다(1-9). 그의 모친 곧 북이스라엘의 아합의 딸로서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반역을 꾀하였다.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자기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국의 씨를 모두 진멸하였으나 왕의 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몰래 빼내어 그와 그의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게 하였으므로 아달랴가 그를 죽이지 못하였더라 여호사브앗은 여호람 왕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이더라(10-12).”

 

곧 악은 연속으로 이어져 스스로도 악에 악을 더하면서도 이를 악이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한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밝혀지는 전직 대통령 부부와 그들을 둘러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서 기생하던 악의 추악한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을 같이 연상하게 된다. 저마다 증거가 밝혀지고 증인이 나오는데도 마치 자신들을 잘못이 없는 듯 오히려 억울함을 호소한다. 뿐만 아니라 악행의 극치는 이를 누구의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은 오히려 피해자인 줄로 착각하는 것이다.

 

즉 여호람이 여호와께 징계를 받아 모든 아들을 다 잃었다. “그들이 올라와서 유다를 침략하여 왕궁의 모든 재물과 그의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였으므로 막내 아들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지 아니하였더라(21:17).” 그렇게 남은 막내 아들, 여호아하스 곧 아하시야까지도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있다. 비록 여호와께서 다윗 왕가의 맥을 잇도록 하기 위하여 그를 진노 가운데서 건져 내셨으나 궁극적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철회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위하여 아하시야의 목숨을 잠시 연장시켜 주신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하여 여호람에 이어 아하시야 때도 아합의 딸 아달랴의 영향은 계속되었다.

 

여호람을 움직여 바알을 숭배케 한 장본인이 아달랴이다. 저가 계속 생존하는 이유는 이상할 게 없다. 죄로 인하여 세상은 악하고, 악한 자들은 누구보다 생존본능이 뛰어나서 어떤 식으로든 더 큰 악과 결탁하여 끈질기게 살아낸다. 이를 보며 더러는 의인이 상처를 받고 미끄러져 넘어질 뻔하지만,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2-3).

 

그것은 저들이 살아서도 그렇지만 죽을 때도 편안한 듯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4-9).

 

그러니 이런 모습을 보며 이 땅에서의 복으로 잘 살고 모든 게 다 만사형통한 것이 결코 축복이기만 한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미 죄로 물든 다윗 왕가의 부패를 완전히 제거하시기까지 잠시 묵허(默許)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오늘 본문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르는 게 아니시다. 그리 내버려두심으로,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결국 누구도 어느 훗날 주 앞에 섰을 때, 나는 알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들 그 속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렇게 해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1, 23).” 이를 자유의지 운운하며 사람을 하나님 위에 두고 판단하는 일에 대하여 오늘 시편은,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62:9).

 

하는 슬픈 어조로 우리의 한없는 가벼움을 탄식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롬 1:24).” 그에 따른 한 단면이 오늘 본문의 서사일 테고,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의 현상과 사람들의 실태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여전히 아하시야를 꾀어 그의 모친 아달랴는 악을 행하게 하였다. “아하시야도 아합의 집 길로 행하였으니 이는 그의 어머니가 꾀어 악을 행하게 하였음이라(대하 22:3).”

 

결국 아하시야가 예후의 손에 살해되자 직접 왕권을 장악하여 다윗의 씨를 멸하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인 예후가 아하시야를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심판자로 등장한 것처럼 제사장 여호야다에 의해 아달랴 또한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군대를 거느린 백부장들을 불러내어 이르되 반열 밖으로 몰아내라 그를 따르는 자는 칼로 죽이라 하니 제사장의 이 말은 여호와의 전에서는 그를 죽이지 말라 함이라 이에 무리가 그에게 길을 열어 주고 그가 왕궁 말문 어귀에 이를 때에 거기서 죽였더라(23:14-15).”

 

이에 언약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공작에 다윗의 씨를 끝까지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눈물겨운 사랑의 실현이 저변에 깔려 있다. 이는 참으로 비극적이면서 감동적이다.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자기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국의 씨를 모두 진멸하였으나 왕의 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몰래 빼내어 그와 그의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게 하였으므로 아달랴가 그를 죽이지 못하였더라 여호사브앗은 여호람 왕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이더라 요아스가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전에 육 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22:10-12절).”

 

하나님과 세운 다윗의 언약은 인간의 의로운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성취다. 거기에 여호와의 집을 짓겠다고 말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리라' 하심을 실현하신다.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1-12).”

 

결국 오늘 아하시야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나타나고(1-4), 하나님의 심판 과정이 서술되어(5-9) 연이어 벌어지는 악행(10-12)으로 사건이 진행되는 바, 이것은 본서 특유의 관점으로 엘리사의 선지의 생도 중 한 명에게 기름부음 받은 예후가(왕하 9:1-13), 길르앗 라못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건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있다(14-26). 그렇게 하여 사건의 진행을 긴박하게 정리하고, 아하시야가 아합의 악행을 좇다가 파멸을 당했다고 언급함으로 아하시야 통치 1년에 따른 결과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은 때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악한 자라도 살려주시고, 저로 마치 역사의 주인공인 듯 행세하게 하신다. 얼핏 보면 아하시야가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의 손에 죽지 않고(21:13-14, 17) 살아서 왕위에 오른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기로 작정하신 대로 아하시야가 그때에 죽는 것이 유다를 위해 더 유익했을 것 같기도 하다. “오직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음행하게 하기를 아합의 집이 음행하듯 하며 또 네 아비 집에서 너보다 착한 아우들을 죽였으니(21:13)”

 

왜냐하면 왕위에 오른 아하시야는 여전히 부친 여호람의 악행을 좇았고, 모친 아달랴의 꾀임에 빠져 우상 숭배를 백성들에게 장려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요아스를 다윗 왕가의 등불로 남기시기 위해 더욱 극적으로 아하시야를 살려두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21:7).” 이에 따른 증거로는 요아스는 아하시야의 짧은 통치 기간이었던 고작 그 1년 사이에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요아스가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전에 육 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22:12).”

 

이처럼 악인이 보호되고 오히려 잘 되는 게 부당하나 그 속에는 하나님의 크신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 할 때, 하나님의 일꾼을 선택해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며 징계하신다. 오늘 이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집을 멸했던 예후는 여기서 다윗의 씨인 아하시야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다윗의 자손인 아하시야가 범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이 아닌 자를 기름 부어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곧 우리가 범죄 할 때 주께서는 주께서 선택한 자를 통해 수치를 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오늘도 이를 묵상하며 느끼는 것은, 악은 어찌됐든 악하다. 죄악에 대해서는 단호해야지 우유부단함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고로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행여 사소한듯 하나 우리의 이 같은 사소함으로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죄악이 우리 삶에 깃들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일갈한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우리가 허용한 것으로 악이란 크고 작은 게 있을 수 없다. 악은 모두 악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요이 1:10-11).” 곧 우리가 보기에 대수롭지 않고 별 거 아닌 듯하여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방조하는 모든 것은 악을 더한다. 곧 모든 게 말씀에서 어긋나면 악하다.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의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의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어지리라(민 15:31).”

 

그러므로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잠 13:13).” 고로 우리가 주를 경외함이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주가 주시는 우리의 능력이다. 고로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5).” 예수님의 가르침이 일관되게 보여주심은,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

 

하는 바울 사도의 설교와도 연관이 되어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13:4).” 하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하여 오늘도 바르게 두려워하자. 바른 두려움이 우리로 주를 더욱 사랑하고 의지하게 한다. 하여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하여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하여 오늘도 시편으로 묵상하면서,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 62:1-2).

 

하는 이 성경의 원리 곧 주를 의뢰함을 다시금 되새긴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5-7).

 

하여,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