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년에 여호야다가 용기를 내어 백부장 곧 여로함의 아들 아사랴와 여호하난의 아들 이스마엘과 오벳의 아들 아사랴와 아다야의 아들 마아세야와 시그리의 아들 엘리사밧 등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매 그들이 유다를 두루 다니며 유다 모든 고을에서 레위 사람들과 이스라엘 족장들을 모아 예루살렘에 이른지라
대하 23:1-2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 63:1
그래도 다시 꽃은 피고 나무가 자라 새싹을 띄워서, 산불이 났었든지 물난리가 나서 산등성이가 무너져 내렸었든지… 산은 다시 복원되고 푸르러 하늘을 우러르며 두 팔 벌린 온갖 나무들로 무성하여져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 나무는 그렇게 늘 하늘을 우러러 두 팔을 벌리는 것 같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남겨놓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우러른다.
오늘 가정예배로 드리면서 사데교회에 보낸 편지를 묵상하였는데,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하고 진단을 받았다. 그러므로 경고하길,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1-3).” 하고 엄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4).”
곧 아무리 산불이 나서 모든 게 다 재가 되었는지, 산사태로 흙더미가 되어버렸든지… 그런 가운데서도 새싹이 돋고 나무들이 자라 다시 푸른 산을 이루듯이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5).” 하시는 계시록의 말씀으로 장모와 아내와 둘러앉아 묵상하였다.
오늘 본문은 제사장 여호야다에 의해 다윗의 후손 요아스가 즉위하여 새롭게 복원되는 유다를 볼 수 있다. 앞서 22장 10절에서부터 이어지는 유다왕국의 선왕(善王) 요아스의 통치 기사(16절-24:27) 가운데 그 서막을 열고 있다. 곧 21장부터 시작되어 온 다윗 왕조의 어두운 면은 22장에서 악녀 아달랴에 의해 완전한 흑암으로 드리워져 6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에 본문은 유다 왕국에 다시금 다윗 왕가의 불씨가 되살아나게 되는데, 제사장 여호야다에 의해 요아스가 즉위하면서이다. 유다의 역사를 통해 제사장 한 사람, 왕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수 있다. 오늘 본문은 여호야다의 거사 계획에서 출발한다(1-7). 먼저는 저들, 하나님의 뜻을 같이 하는 백부장 여로함의 아들 아사랴와 여호하난의 아들 이스마엘과 오벳의 아들 아사랴와 아다야의 아들 마아세야와 시그리의 아들 엘리사밧 등과 더불어 여호야다가 언약을 세우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이들은 온 유다를 두루 다니며 모든 고을에서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을 예루살렘에 모이게 했다.
그렇게 온 회중이 하나님의 전에서 왕과 언약을 세워, 여호야다가 ‘여호와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왕위에 즉위하였다. 그리고 저들이 행할 것을 정하였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곧 안식일에 당번인 자들 삼분의 일은 문을 지키고, 삼분의 일은 왕궁에 있고, 삼분의 일은 기초문에 있고, 백성들은 여호와의 전 뜰에 있었다.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레위 사람들은 각각 손에 무기를 잡고 왕을 호위하였다(8-11). 그리고 아달랴를 처형하였다(12-15). 그런 뒤 요아스가 왕위에 즉위하였다(16-21).
그렇게 하여 어둠을 걷어내고 여호와께서 이끄시는 역사의 흐름 속으로 순종하여 들어갔다. 즉 오늘 본문에서 밝히듯이 다윗의 왕좌가 아달랴에게 찬탈된 지 7년째 되는 해였다(1). 그해는 유다의 안식년이고 새로운 해방의 해라고 할만하다. 왜냐하면 이때를 기점으로 유다는 정치적으로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 다시금 다윗의 정통성을 잇게 되었다. 곧 한 번의 작은 실수 아닌 허물 같은 사소한 듯 그릇 행하였던 여호사밧의 아합과의 통혼으로 모든 자식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노출되어 암흑의 시간을 보내야 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에 오늘의 이 혁명은 여호야다를 중심으로 한 다섯 명의 백부장과 유다 모든 고을의 족장들과 남은 백성들이라 할 수 있는 유다인들의 합력으로 가능하였다. 이에 “일곱째 해에 여호야다가 사람을 보내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들을 불러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여호와의 성전에서 맹세하게 한 후에 왕자를 그들에게 보이고(왕하 11:4).” 하는 말씀과 동일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속사는 어떤 훼방과 훼손 가운데서도 다시 복원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사 63:9).” 그리하여 사람이 되시기까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행 13:23).”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누구의 결혼 축사를 간단하게 써주면서 새삼 믿는 가정의 믿음의 혼인이 어째서 중요한지를 말하고 싶었다. 다음은 짧게 써준 축사 내용의 전문이다.
- 사랑하는 아들, [신랑 ***]군과 사랑하는 며느리, [신부 ***] 양의 결혼을 축하하며, 이렇게 뜻 깊은 자리에서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며, 하객 여러분이 증인이 되는 자리에서 이 두 사람에게 몇 마디 당부와 축복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먼저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결혼(結婚)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소중한 언약’이 혼인입니다. 성경 에베소서 5장 31절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서로가 사랑으로 하나 되는 신성한 혼인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선택할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이 땅에 태어나는 일, 생(生)과 또 하나는 이 세상을 떠나는 일, 사(死)와 또 하나는 서로가 사랑하여 결혼하는, 혼(婚)입니다. 남녀가 만나 서로 좋아하고, 사랑해서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는 일은 다들 아시다시피 하늘이 맺어준 것이라 합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사랑하여 결혼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 하여, “또 사랑은 이것이니 …행하는 것이요(요이 1:6).” 하셨는데, 여기서 ‘사랑의 행함’이란, ‘부모를 떠나 두 사람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창 2:24). 이는 생사(生死)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하신 것으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는 명령입니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막 10:8).”
이에 오늘 저는 아들 내외가 되는 이 결혼식에서 다음의 세 가지를 당부하며 두 사람을 축복하고자 합니다.
첫째, 두 사람은 무엇보다 ‘경천애인(敬天愛人)’하십시오.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를 전심으로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두 사람은 ‘천정배필(天定配匹)’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곧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인연을 소중히 지키며 살길 바랍니다.
셋째, 두 사람은 ‘부부일신(夫婦一身)’임을 명심하십시오.
곧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었다는 것은, 서로를 신뢰하는 한 마음 곧 일심(一心)으로 살며, 서로를 사랑하는 온전한 마음 곧 전심(全心)으로 사랑하며 존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도 13장 4-7절).” 아멘.
이에 여호사밧의 죄는 이와 같은 혼인의 중요성을 섣불리 생각하고 가벼이 여겨 그의 아들 여호람과 북이스라엘 아합의 딸 아달랴의 결혼이 가져온 비극이 얼마나 끔찍했는가를 어제그제 연속으로 살펴본 바 되었다. 그래서도 기도가 필요한 것이라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 그런데 점점 이게 대수롭지 않은 듯 믿음의 가정에서도 경솔히 여김을 받는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징계가 따르는데 이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다.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8).” 이를 어느 훗날 고난의 끝에서 고백하게 되는데,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솔직히 나의 삶이 그러하였고, 그렇듯 부모의 뜻을 거슬러 결혼한 후 참으로 긴 시간을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그때는 그게 이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아이가 내년쯤에 결혼을 하게 되면서 출근 전에 성경공부하던 것을 못하게 되었는데, 나는 은근히 속상하고 아쉬웠다. 안 믿는 아이와의 교제라 같이 줌으로나마 성경공부를 할 수 있기를, 결혼까지 생각하면 교회로 함께 나올 수 있기를… 몇 번 권하고 또한 이를 놓고 기도하였는데 그래서 마음이 어려운가? 어제 오늘 그 소식을 듣고는 괜히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다 누가 자식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해야 한다고 글을 부탁하여, 나는 의식적으로 더욱 성경을 중심에 두고 작성하였다.
공교롭지만 오늘 본문은 그러하여 긴 암흑의 터널을 지나 비로소 다시 주의 은총으로 여호야다에 의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윗의 왕권이 회복되는 것을 본다. 앞서 여호람의 통치 때부터 다윗 왕권의 본질은 아예 파괴된 듯하였다. 이는 점점 희미해져 아달랴의 집권 하에서는 완전한 멸망의 위기에까지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 여호야다의 혁명으로 요아스가 다윗 왕위에 즉위함으로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그 언약에 대해 충실하심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시 하나님 백성으로 그 존재의 가치가 회복되었다. 하나님은 여호람과 아하시야 그리고 아달랴의 폭정 하에서 백성들의 무고한 피를 흘려야 했던 것을 기억하셨다. “여호람이 그의 아버지의 왕국을 다스리게 되어 세력을 얻은 후에 그의 모든 아우들과 이스라엘 방백들 중 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자기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국의 씨를 모두 진멸하였으나(21:4, 22:10).”
또한 백성들은 연약하여 타락한 정책에 아부하며 목숨을 연명하여 갈 수밖에 없었다. “여호람이 또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예루살렘 주민으로 음행하게 하고 또 유다를 미혹하게 하였으므로(21:11).”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순간순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시위하였다.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20).”
이렇듯 한 번 곁길로 든 것이 얼마나 먼 길을 돌아야 다시 회복될 수 있는지, 그러기까지 주의 은총으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고는 어찌 알까? 여전히 교회를 떠나 주를 멀리하며 사는 나의 친구나 선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선생은 젊을 때 모 교회 청년부에서 영어성경공부를 주도하며 얼마나 그 믿음이 온전하였는지 내가 잘 안다. 친구는 물론 교회는 다니지만 세상도 사랑하여 늘 좋은 게 좋은, 안 믿는 그의 아내와 다를 게 없이 신앙 아닌 신앙으로 살아간다. 재밌는 것은 가장 가까웠던 저 두 사람이 오늘 나의 목회와 교회를 제일 가벼이 여긴다. 이를 보면 내가 그러고 지냈었던 시절이 두려움으로 엄습한다. 하필 오늘 나누었던 사데교회도 그래서 더 안타까웠고 슬펐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결코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의 평강은 주로 제사(예배)의 회복을 통해 이루어졌다. “여호야다가 여호와의 전의 직원들을 세워 레위 제사장의 수하에 맡기니 이들은 다윗이 전에 그들의 반열을 나누어서 여호와의 전에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자기들의 정한 규례대로 즐거이 부르고 노래하게 하였던 자들이더라(대하 23:18).” 그리하여 왕의 즉위에 의해 회복되었다. “백부장들과 존귀한 자들과 백성의 방백들과 그 땅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왕을 인도하여 여호와의 전에서 내려와 윗문으로부터 왕궁에 이르러 왕을 나라 보좌에 앉히매 그 땅의 모든 백성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칼로 죽였었더라(20-21).”
여러 관점이 복합적이기는 하나 그 단초가 된 것이 유다의 성군 가운데 하나라 할 여호사밧 왕이 북이스라엘 아합 왕과의 사돈을 맺음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다가 겪어야 했던 암흑기를 묵상하며,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호 13:14).”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하심으로만이 우리는 평강하다. 그리하여,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
우리 주 예수의 보혈의 은총이 아니면 안 된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눅 1:78-79).”
오늘도 시편으로 읊조리며,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 63:1).
부디 주를 안다, 예수를 믿는다 하는 자들이라면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한 생의 온전함으로 ‘깨어 근신하라’ 하심에 주의하여 주를 앙모하기를. 그러할 때,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3).
정녕 나의 생명보다 주의 인자하심이 더 나음으로,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4).
이는,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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