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하현. 2025. 8. 15. 16:4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대하 24:17-18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시 64:6

 

 

한결같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하여서 바울은 스스로를 쳐서 복종시켰다는 것일까?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오늘 본문의 앞부분을 읽으면서는 흐뭇하였다. 그런데 뒷부분으로 가면서 어찌 한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 화가 날 정도이다. 그래서도 다시금 느끼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강권하심, 그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복이라 생각된다. 그것으로 육신이 고달프고 마음이 어려울지언정 그리하여 주를 더욱 갈망할 수만 있다면….

 

유다의 열왕들에 대한 치적을 이어서 언급하고 있는 과정에서 제5대 왕부터 7대까지 악을 달린 인물들이 소개되었다. 즉, 여호람(21:1-20), 아하시야(22:1-9), 아달랴(22:10-23:21)가 그들인데, 이들은 유다의 악을 연이어 행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유다 말기의 군왕들이 계속해서 악을 행하여 결국 유다의 멸망을 가속시킨 것과 같다(36:1-4, 5-7, 8-10, 11-21). 이처럼 암울했던 유다에 다시 빛이 비추인 것은 여호야다의 혁명에 의해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호야다가 자기와 모든 백성과 왕 사이에 언약을 세워 여호와의 백성이 되리라 한지라(대하 23:16).”

 

이렇게 한 사람의 지도자가 나서면서 온 국민이 바알의 신당으로 가서 그 신당을 부수었다. 그 제단들과 형상들을 깨뜨렸다. 그 제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였다. 그런 뒤 여호야다가 여호와의 전의 직원들을 세워 레위 제사장의 수하에 맡기었다. 이들은 여호와의 전에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다. 정한 규례대로 즐거이 부르고 노래하게 하였던 자들이다. 또한 문지기를 두어 무슨 일에든지 부정한 모든 자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렇게 하여 비로소 ‘그 땅의 모든 백성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였다. 악녀 아달랴를 무리가 칼로 죽였다(16-21).

 

이어서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지금까지 악행을 일삼은 왕들과 달리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본문의 후반부에서 그 역시 말년에는 악을 범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이러한 요아스의 일대기를 기록하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그 신앙을 지키는 데 있어 변함없이 한결같을 수 있는 그 자체가 곧 상급이 되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곧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이와 같이 끝까지 인내하고 이겨내는 일이 관건이다.

 

요아스의 통치를 전반기와 후반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의 생애는 마치 유다 전체의 축소판 같다. 요아스는 온 국민의 지지 속에서 비록 일곱 살에 왕이 되었다. 요아스는 주전 835년에 왕이 되어 796년까지 40년 동안 유다를 통치하였다. 그런데 그의 통치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죽음을 전후로 해서 완전히 달라진다. “여호야다가 나이가 많고 늙어서 죽으니 죽을 때에 백삼십 세라(24:15).” 그런데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17-18).”

 

순간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의아하다. 제사장 여호야다의 죽음 이전에 요아스는 정직하며 여호와를 경외하였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2).” 무엇보다 성전을 수리하는 큰 공헌을 세웠다. 그런데 여호야다가 죽고 난 이후 요아스는 돌변했다. 가장 큰 요인은 요아스 정권의 기반인 제사장들의 세력이 여호야다의 죽음으로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 대신 방백들이 정치에 크게 관여하였다.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17).”

 

그러니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요아스는 방백들의 요구대로 바알과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숭배하였다.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18)." 심지어 이를 지적하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를 돌로 쳐 죽이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대하 24:20).”

 

스가랴는 아버지 여호야다 제사장의 뜻을 따랐고 이를 그릇 행하는 요아스 왕에게 나아가 직고하였다. 단순히 스가랴 개인의 충정으로가 아니다. 그의 부친 여호야다의 뜻을 따라서만도 아니다. 엄연히 이는 하나님이 명하신 일이었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그때나 지금이나 옳은 바를 직언하는 데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방백들과 악한 무리들이었다.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령을 따라 그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21).”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결정인가? 앞서 전반부의 요아스와 지금의 요아스 왕이 서로 다른 인물 같다.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런 가운데 스가랴는 죽으면서도 주 앞에서 저를 위해 아뢰었다.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22).”

 

이는 참으로 눈물겹다. 상대적으로 악으로 치닫는 요아스와 죽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저를 위하여 신원하는 사명감이라니!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저를 죽이고, 그러자 결국 아람 군대의 침입이 있었다. 당연히 하나님의 징노의 채찍이다. “일 주년 말에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려고 올라와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러 백성 중에서 모든 방백들을 다 죽이고 노략한 물건을 다메섹 왕에게로 보내니라(23).” 이로 인하여 요아스가 크게 부상당하였다. 그리고 무기력하게 그의 신복들에 의해 살해된다. 곧 그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 하겠다(23-27).

 

이것은 앞서서 아사 왕이 선지자의 말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궁극적으로 파멸당한 것과 같은 경우다.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16:12).” 그러니 처음 사랑을 찾으라고 하신 에베소 교회를 향한 경고의 음성이 모든 시대마다 간곡하게 동일하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

 

그래서도 나는 될 수 있으면 같은 시간에 같은 동선을 따라 움직이려 한다. 오늘은 아내가 동대문에 일이 있어 일찍 집을 비웠다. 딸애도 두 시에 약속이 있어서 나갔다. 그래도 공부 중인 아들이 집에 있어서, 나는 늘어져 게으름을 부릴까 하여 평소대로 교회로 나왔다. 장모가 혼자 계셔야 하면 어쩔 수 없이 집에 있어야 했는데 아들이 집에 있으니 누워 빈둥거리고 싶은 것을 참고 평소대로 움직였다. 나름은 내가 나를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늘 하나를 허용하면 이어지는 요구가 여럿이다. 그렇듯 성실하지 못한 것을 잘 안다. 그래서도 될 수 있으면 같은 시간에 같은 동선을 따라 늘 같이, ‘하던 대로 습관을 좇아’ 묵상을 하고 글을 쓴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러한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무리 여호야다 제사장이 죽었다고 해도 어찌 요아스는 이처럼 180도 달라진 사람이 되었을까? 같은 내용의 열왕기서는 요아스의 통치에 관해 그의 영성(靈性)을 평가하고(왕하 12:1-3) 그의 영적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4-16).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설명하고(17-18), 그의 죽음을 알린다(19-21).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주의 계명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원리이다.

 

오늘 본문은 같은 요아스에 대해 그의 말기에 있었던 타락상을 언급함으로(17-27), 열왕기서에 나타나지 않은 요아스의 실정을 기록하였다. 곧 악을 범한 자의 최후가 어떠한지를 말하고 있다. 유다가 왜 망하게 되는가를 미리 밝힘으로 교훈을 삼게 한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다르지 않다.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이란, 지속적이고 한결같음으로 결판난다. 시작은 그럴듯하다가도 끝은 결국 육적으로 타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아는 누구도 처음 그의 목회는 아름다울 정도로 교회와 성도들의 양육에 헌신이었다. 그러다 그의 중노년에 한 여성과의 불미스러운 관계로 교회를 사임해야 했다.

 

결국,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2-3).”

 

이와 같은 말씀이 전혀 나와 상관없는 소리는 아닐 터, 나는 새삼 나의 중심이 주를 향하여 죽기까지 충성하기를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곧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순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기 십상이다. 하여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시는 것이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9:5).”

 

하여 나는 새삼 바울의 신앙고백을 천천히 다시 되새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죽어 마땅하였을 나 같은 죄인을 돌이켜 오늘 이 자리에 두셨는데, 행여 이 은혜를 저버리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갈까 하여 두렵다. 혹은 말씀이 아닌 것과 타협하여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으로, 뭐라도 되려 하는 마음이 자못 나로 하여금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끌어 내 안에 감추어져 있는 욕구를 부추기지는 않을지 두렵다. 내가 아는 나는 인정욕구가 강하다. 문학에 빠졌을 때나 아이들을 가르치며 글방을 운영하면서도 시쳇말로 나는 나 잘난 맛에 살았다. 신기하게도 그런 나를 또 내 주변 사람들은 좋게 봐주었던 것 같다. 세상적으로는 분에 넘치게 좋은 사람들(?) 많이 알고 지냈다.

 

또한 저들이 나를 그 이상으로 좋게 여겨주었다. 자주 말하지만 우리가 서로 그럴 사이가 아닌데도 저들은 내게 호의적이었고, 아낌없이 나를 돕거나 위해주었다. 그 때문에 나는 늘 내가 뭐나 된 줄 알고 살았다. 마음만 먹으면 나는 누구라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어떤 사람이라도 내 편을 만들 자신이 있었다. 실제 또 사람들이 과분할 정도로 그리 날 위해 주하기도 했다. 가령 모 법인 단체에 기획실장으로 갈 때는 여느 직원들과 달리 출퇴근에 구애받지 않았다. 별도로 사무실 한 쪽에 내 방을 내주기도 했다. 기존에 있던 편집장보다 위여서 편집기획이나 관리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 그땐 거래처에서 뇌물도 적잖이 받았다. 그러니 얼마나 거들먹거렸는지 모른다. 무슨 행사로 다들 강원도에 갔을 때 직원들은 같이 쓰는데 나만 독채로 방을 빼주기도 했다.

 

지금 와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은 호의적이었다. 그런 꾐이 나로 더욱 세상을 사랑하게 했다. 좀 더 출세에 대한 욕망도 있었다. 어디 지회에 별도 시설을 짓고 있었는데 아예 그곳 책임자로 갈 뻔도 했다. 현재도 존재하는 단체라 자세히는 서술하기 어렵다. 다만 솔직하게 말하지만 나는 내 실력에 비해 너무 과분한 처우를 받았다. 그러다 무슨 일로 마음 상하면서 회장과 직접 부딪치고 그만두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저들 몇 명이 횡령으로 잡혀 들어간 사실을 알았다… 그때 나도 계속 있었으면 같은 신세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적당한 때에 적당히 서로 어그러져, 나는 빠져나오게 하셨다. 오늘에서 보면 모든 게 은혜였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시 119:9, 33).

 

이제는 확신하는 게 말씀으로밖에는 다른 길은 없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 오늘 요아스의 통치에 관한 앞부분에서의 감동은 후반부에 행한 그의 범죄로 헛것이란 사실이 놀랍다. 요아스에 대한 제사장 여호야다의 영향력이 그만큼 지대하였음을 강조한다. 요아스 또한 그의 안에 참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그렇게도 없었던가? 의아하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요아스 왕으로 하여금 두 아내와 결혼하게 한 사실이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여호야다가 그를 두 아내에게 장가들게 하였더니 자녀를 낳았더라(대하 24:3).”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사는 동안에 그의 교훈에 의지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으나’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는 방백들을 의지함으로 여호와를 버렸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처사인가? 그만큼 요아스는 의존적인 신앙이었다. 스스로의 참 신앙훈련이 없었다. 수동적인 신앙이었다. 그 믿음의 성숙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오늘 우리는 어떠한지, 나 자신은 얼마나 나의 이 신앙이 절박함으로 붙들려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려 하고 있는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하여 오늘 나의 어려움들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언제라도 자신을 자부하고 자만하면 자빠지는 게 신앙이다. 여기서 저로 왜 두 아내에게 장가들게 하였는지 알 것도 같다. 제사장 여호야다는 아달랴의 악행을 통해 왕실의 잘못된 결혼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생생하게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이성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판단력이 부족한 여린 요아스에게는 판단의 균형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별 도움이 되지는 않은 듯하다. 우리는 순간 무분별하게 ‘안목의 정욕’을 따르게 되어 있다. 하여 오늘도 나는 시편으로 묵상하여 시편으로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시 64:1).

 

여전히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 욕구를 잘 안다. 그것이 물질에 대한 것이든, 명예에 대한 것이든, 이성에 대한 것이든….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5-6).

 

그러므로 나 역시 예외일 수 없어서, 내 속을 나도 자신할 수 없어 주 앞에 아뢰고 또 구한다. 그래서도 누구보다 간절하기를,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