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삽의 자손 노래하는 자들은 다윗과 아삽과 헤만과 왕의 선견자 여두둔이 명령한 대로 자기 처소에 있고 문지기들은 각 문에 있고 그 직무에서 떠날 것이 없었으니 이는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그들을 위하여 준비하였음이더라… 요시야가 왕위에 있은 지 열여덟째 해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대하 35:15, 19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 75:6-7
어제오늘 드는 생각이 우방이 어디 있고, 적국이 어디 따로 있겠나? 하는 것이다. 힘의 논리로 세계는 돌아가고 자국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정책에 우방이었다가 적국이었다가 하며 그때마다 다른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나름의 신념과 신앙을 혼재하고 종교와 자신의 유익을 별개로 놓고 볼 수 없다. 곧 저마다 다 자신들의 생각이 있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이쪽과 저쪽의 생각이 같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생각, 자신의 주장을 버릴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온다.
이 말은 또 저마다 듣기 거북해할 것이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대체 무엇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을 판단하는 데 있어 저마다의 생각에 따르면 그야말로 같은 말씀이라 해도 자신의 입장과 생각에 따라 다를 테고, 그렇다보니 여러 갈래의 교파와 교단이 난무하는 것이겠으나… 그런 가운데 결국은 자신의 생각을 버려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온다. 선뜻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에도 순종이 가능해진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길,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막 10:15).” 이와 같이 일갈하심은 결국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러므로 결국은 자기 부정이 참된 신앙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왕하 23:21-23에 따르면, 요시야가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였음으로 가능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를 엄히 준행하였다. 이전에는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다. 열왕기의 간략한 묘사와 달리 역대기서의 오늘 이 행사는 매우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 특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활동에 관하여 세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율법책을 곧이곧대로 지키도록 백성들에게 명령하였고, 이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중심으로 온 백성이 다 준행하였다.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유월절을 준수한 후에 히스기야 때까지도 유월절을 지켰다는 내용은 없다. 다만 솔로몬이 무교절을 비롯하여 각종 절기를 준수하였다는 간단한 언급은 있다. “솔로몬이 낭실 앞에 쌓은 여호와의 제단 위에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 모세의 명령을 따라 매일의 일과대로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 곧 일년의 세 절기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드렸더라(대하 8:12-13).”
이후 이스라엘이 분열되고 히스기야가 유월절을 준수한 것을 알 수 있다. “왕이 방백들과 예루살렘 온 회중과 더불어 의논하고 둘째 달에 유월절을 지키려 하였으니 이는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이 부족하고 백성도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하였으므로 그 정한 때에 지킬수 없었음이라(대하 30:2-3).” 유월절은 하루지만 7일간 지켜야 하는 무교절과 함께 8일을 지키는 절기이다. 20세 이상 남자는 의무적으로 그러했다. 이때에는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출 34:24).” 하고 이 기간을 보호하셨다.
요시야가 이와 같은 기록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전심으로 이에 따라 준행하였다. 곧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믿음으로 말씀을 따라 산다는 일은 우리의 의견이나 생각에 따른 게 아니다. 성경은 우리의 의견을 묻지 않는다. 다만 이를 준행하지 않을 때는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신 1:35).”
즉 어쩔 수 없는 사정이나 상황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36).” 그렇듯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의 땅을 앞에 두고 전후사정을 고려하거나 당장의 현실적인 문제를 운운하던 열 명의 다른 정탐꾼과는 달랐다. 오히려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32-33).”
결국 말씀에 따른 순종은 무모할 정도로 자기의 생각을 부정하는 일이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여호와 앞에서’의 일이었다. “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여호와께 유월절을 지켜 첫째 달 열넷째 날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으니라(대하 35:1).” 이는 “유월절 제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 질 때에 유월절 제물을 드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구워 먹고 아침에 네 장막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신 16:5-7).”
곧 이를 각 성에서 따로 드리지 말고,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공동체적으로 드리라고 명령이다. 그러나 요시야 이전까지 유월절 절기를 지키지 않았던 것은 그럴 수 없었던 상황도 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늘 대치국면이었고, 혹은 준수했다고 하더라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지 못하고 각자 자기 성읍에서 드릴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래서 요시야는 ‘예루살렘 여호와 앞에서’ 오늘 이 유월절 절기를 지킬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고, 이를 백성들과 함께 준수한 것이다.
한편, 히스기야 때는 유월절 절기가 지켜졌는데 그 당시에는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 달을 연기하여 이 월에 거행되었다. “왕이 방백들과 예루살렘 온 회중과 더불어 의논하고 둘째 달에 유월절을 지키려 하였으니 이는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이 부족하고 백성도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하였으므로 그 정한 때에 지킬 수 없었음이라(30:2-3).” 그러니까 말이다.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처지가 우리로 자기 생각과 그 형편에 따라 각지에서 또는 저마다의 산당에서 좋은 대로 정하여 행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예수님의 경우,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곧 다른 대안으로 구원의 속량을 이루시지 않았음이다. 곧 오늘의 교회로 또는 성도로 그 신앙을 지키는 데 있어서도 철저하게 말씀 중심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결국은 오늘의 나로 살면서 내가 나로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 그리하여 여느 다른 방편들을 없애야 한다.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행 19:19).”
우리는 어쩌면 신앙이라는 명목 하에 저마다의 편리와 안정을 고려하여 뭔가 자신들에게 맞는 것을 찾아 대체하며 살고 있지는 않을까? 누가 버젓이 거실에 십자가를 걸어놓고 교인입네, 자신의 종교나 신앙을 말하면서 정작 마음의 안정을 위해 절을 찾고 어디 용하다는 무당이나 점술가도 찾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결국은 신앙이 사람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일까? 마음의 안정을 위한 일일까?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이 옳은가?
분명 우리의 신앙고백은 엄연하여서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는 놀라운 고백이 드려져야 한다. 실은 이와 같은 고백도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것이어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그러니 우리의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하심 아래에서 가능하였다. 그리하여,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18-19).”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새삼 겸허해진다. 곧 이러한 고백도, 일심(一心)도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심으로 가능하다. 오늘 이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또한 그에 따른 율법에 따라 정하신 대로 행함도 다 주의 은혜라 하겠다. 이를 지키기 위한 용기를 내야 한다. 여기서 히스기야의 설득력 있는 설교 내용이 생각난다. “레위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고 그 대상을 우선 지정한 후에 “이제 너희는 성결하게 하고 또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성결하게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애라(대하 29:5).” 하는 것으로 성소의 성결을 요구한다.
부정하고 더러운, 타협과 여러 문화적 교류 등 우리네 교회 안에 아무렇지 않게 자리 잡은 비성경적인 것들이 여럿 있다. 그 가운데 하나로 누가 그러는데 요가나 명상 따위의 바르지 못한 것이 버젓이 교회에서 행해지기도 한다. 흔히 요즘들 성격유형을 따지는 MPTI가 무엇인가? 하고 젊은 세대나 그 이상의 경우도 흔히들 이를 가지고 16가지 성격 유형을 비교하는데, 실은 이게 9가지 성격유형의 에니어그램에서 세분화되었다. 이는 기원전 2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바벨론에서 유래하여 중동지역에 전해졌다. 유대인들은 이 기원을 아브람 때로 보고 이를 매우 철학적 고찰이라 운운하는데 엄연히 이교도의 철학과 사상이 그 유래다.
이를 천주교가 가져와 서로를 이해하는 데 교본으로 쓰면서 그것이 더 세분화되어 요즘은 16가지 유형의 성격으로 MPTI 검사 등이 성행하게 된 것이다. 그럴 수 있지,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잘 활용하면 유익하지 하는 생각이 자기주장이다. 성경은 엄연히 ‘나 외에 다른 신’을 거부한다. 곧 성경 외에 다른 교리나 사상은 허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히스기야는 먼저 성소의 성결과 함께 “우리 조상들이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얼굴을 돌려 여호와의 성소를 등지고 또 낭실 문을 닫으며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하시고 내버리사 두려움과 놀람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신 것을 너희가 똑똑히 보는 바라(6-8).” 하고 조상들의 과오를 바로 잡아야 함을 일깨웠다.
왜냐하면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조상들이 칼에 엎드러지며 우리의 자녀와 아내들이 사로잡혔느니라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와 더불어 언약을 세워 그 맹렬한 노를 우리에게서 떠나게 할 마음이 내게 있노니 내 아들들아 이제는 게으르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미 너희를 택하사 그 앞에 서서 수종들어 그를 섬기며 분향하게 하셨느니라(9-11).” 즉 하나님은 하나님 외의 그 무엇도 경건하다 하지 않으신다. 우리 스스로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희생이 있다 해도,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능숙한 모든 레위 사람들을 위로하였더라 이와 같이 절기 칠 일 동안에 무리가 먹으며 화목제를 드리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였더라(30:22).” 모든 다 하나님으로다.
이처럼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의 자세가 먼저 바로 서야 한다. 저들은 ‘거룩한 궤를 전 가운데 두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자들이다. 사악한 므낫세나 아몬에 의해 파기 되었을 것을 요시야가 성전을 복구하면서, 거룩한 궤가 옮겨지는 것을 금했다. “또 여호와 앞에 구별되어서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에게 이르되 거룩한 궤를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한 전 가운데 두고 다시는 너희 어깨에 메지 말고 마땅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섬길 것이라(대하 35:3).” 곧 이를 모실 성전이 있는데,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하던 것 같이 법궤를 이리저리 옮기는 것은 옳지 않다.
곧 오늘의 중심, 나의 한 날의 기준이 말씀이 되고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우리가 주께 붙은 각 마디와 같아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16).” 그러므로 기준은 결코 움직이거나 이동할 수 없다. 중심은 언제나 한결같아야 한다.
이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있어 오늘의 환경과 여건이 우리를 얽맬 수 없다. 이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하여 우리의 삶이 설령 우리를 노엽게 한다 해도,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히 11:17).” 고로 성경이 믿음의 중심이다. 교회가 이 구심점을 잃으면 헛되다.
언젠가 우린 다 주 앞에 서서 성적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0-11).” 그러므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하여 오늘도 주 앞에 나를 앉히고 고하기를,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
(시 75:1-3).
곧 이때라, 하실 때가 오나니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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