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하현. 2025. 8. 31. 18:08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

에스라 4:24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 80:6-7

 

 

모든 게 내 맘 같지 않다. 주여, 하고 구하였던 내용과 실제가 사뭇 다를 때 우리는 당황한다. 주의 뜻이 무엇인가? 하고 더 깊이 묵상하게 된다. 내가 구하였던 것이 참으로 주의 뜻에 합당하였나? 생각한다. 대놓고 철학관에 오듯 와서 이런저런 말을 편하게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하니 이를 더 들어야 할지 물리쳐야 할지, 백 번을 같은 이야기로 해도 못 알아듣고 자기 말한 하려하니 이걸 더 이어가야 할지 멈추어야 할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하는 말씀이 목에 걸려 더듬거리듯 묵상글로 읊조리게 된다.

 

오늘 본문은 앞 장에서 성전 재건이 가능하여져 작업이 시작되는 장면이 나왔다. 얼마나 희망적이고 기쁜 일인가? 무려 70년 동안 방치하였고 포로로 잡혀 가 있다 돌아와서 할 수 있는 기쁨의 소식이라고 그저 놀라웠다. 하지만 성전은 결국 약 20년 후 다리오왕 때에나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공 되었다.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6:15).” 그럼 오늘 본문은 성전 공사에 있어 이를 지연시키는 세력에 대해 눈여겨보게 한다.

 

저들을 지칭하여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라 하였다. 유다와 베냐민은 분명히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도 굳이 ‘유다와 베냐민’이라 지칭하는 까닭은, 그 지파 사람들이 귀환자의 주종을 이뤘기 때문이다. 또한 레위 지파 사람들은 보통 인구 계산할 때도 제외되는 등 특례적으로 다뤄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귀환한 백성들이 주로 거했던 곳이 ‘유다와 베냐민’이라, 저들 유다와 베냐민 사람들에게 기업으로 주어졌던 땅으로 그리 지칭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저들의 ‘대적’이라 하는 것을 ‘포위하고 있는’ 또는 ‘고민하게 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런 의미로 확대하면 ‘해를 끼칠 목적으로 오는 원수’를 가리킨다. 예전에 그곳 원주민들에 대하여,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민 33:55).” 하신 말씀에 이에 증명이 되는 셈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시 129:1).

 

하는 시인의 표현과 같이 당시 각 지파에서 분배 받은 땅의 원주민 일부를 몰아내지 않은 것이 이처럼 ‘대적’이 되어 존재하고 있었다. “에브라임의 질투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질투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사 11:13).” 그리하여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원수가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63:18-19).”

 

어떤 이유로나 우리가 스스로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세상이 곧 그러하여서 “그러므로 너를 먹는 모든 자는 잡아먹힐 것이며 네 모든 대적은 사로잡혀 갈 것이고 너에게서 탈취해 간 자는 탈취를 당할 것이며 너에게서 노략질한 모든 자는 노략물이 되리라(렘 30:16).” 이에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나 1:2-3).”

 

이를 나름의 가치관으로 보면 성경이 참 편협한 것 같다. 하나님의 사랑이 왠지 의심이 되기도 한다. 하나 성경은 엄연히 모든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다 사랑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즉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23).” 하여 들을 귀 없는 자들은 배제하였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하심으로 들은 자만이 행할 것임을 밝히셨다.

 

또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그리 창세전에 예정하고 택정하신 자가 따로 있음을 분명히 하신다. 고로 오늘 본문의 ‘대적’은 구체적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가리킨다. 원래 팔레스타인 땅에는 이런 민족이 살지 않았다.

 

이들은 앗수르 왕 살핫돈이 북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면서(주전 722년) 그 백성들을 앗수르 땅으로 끌고 가는 대신 바벨론, 구다, 아와, 그리고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들을 옮겨옴으로써 생겨난 민족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왕하 17:23).” 즉 사마리아 사람은 타지역에서 옮겨 온 사람과 북국 열 지파사람들 중 끌려가지 아니한 사람들 사이의 혼혈족이다. 이들은 이방의 우상들을 섬겼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여호와를 땅의 신으로서도 섬겼다.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들이 거주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왕하 17:29, 33).”

 

그렇게 오늘도 가장 큰 대적은 교회를 안 다니거나 타 종교인들이 아니다. 교회도 다니면서 여느 토속신앙도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교회 안의 대적이 교회 밖의 대적보다 거세다. 이들이 오늘 사로 잡혔던 자의 자손들로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을 동시에 의미한다. 하여 스룹바벨과 족장들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정치적으로 이끌던 지도자들이었다.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스 2:2).” 뿐만 아니라, 성전 재건 사업의 주체 세력들이기도 하였다.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3:2).”

 

그런 그들이 적이 되어 공격하고, 종교적으로 경배하며, 어떤 목적으로 가까이 왔다. 저들의 특별한 목적은 드러났다.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4:1-2).” 차라리 자신들이 안 하거나 대놓고 반대하는 게 아니라 같이 하겠다며 그 뜻을 어지럽히는 것이어서,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3).”

 

이를 같이 수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너희는, 상관이 없느니라.” 하고 거절하였다.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 재건을 하는 데 있어 신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역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참된 여호와 신앙과 무관한 혼합주의적 종교를 신봉했다. 이스라엘과 종교적 연관성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 고레스로부터 성전 재건 사업에 동참하라는 조서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연관성이 없었다. 저들은 이방인 내지 혼혈족이었다는 점에서 혈통적으로도 연관성이 없었다.

 

고레스의 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토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라는 것이었다.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1:2-3).” 그런 가운데 바벨론 백성들은 성전 재건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물을 지원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4).”

 

이에 이스라엘 백성, 유다와 베냐민은 “우리가, 홀로 건축하리라.” 하고 그 취지와 목적에 맞게 신앙 안에서 성전 건축을 소망하였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혼합주의나 다신론적인 관점으로 교회가 연합할 수 없다. 결코 국수주의나 분리주의적 사상에 기초한 결론이 아니다. 신앙적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여호와를 향한 열심이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민 25:11).”

 

그런데 오늘 날 여러 교회들이 교회로서의 가치관과 그 의미를 희석시키는 일에 크게 문제의식이 없는 듯하다. 전에도 놀란 바 있듯이 친구 교회에서는 여러 문화행사를 지역주민과 함께 하는데 그 취지는 알겠으나 요가나 집단 심리상담 가운데 최면이나 명상 따위도 아무렇지 않고 여러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끼워 넣었다. 그저 건강을 위한 운동일 뿐이고, 명상이나 묵상이나, 심리치료나 최면치료나 하는 식으로 그러한 혼합주의에 문제를 제기하면 그걸 오히려 이상하게 여긴다.

 

그러니 어쩌겠나? 오늘 날 이 ‘대적’ 곧 우리 곁의 ‘사마리아 사람들’이 여전하지 않던가? 믿음 안에서 함께 신앙으로 잘 자라던 아이가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 상대가 안 믿는 배우자와 그 가족들이다. 그러다보니 결혼 날짜도 일요일, 시간도 하필 예배시간에 딱 걸리는 바람에 서로가 난감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주체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으로 결정하면 좋을 텐데… 오늘 여기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와 베냐민은 그럴 힘이 없었다. 하여 저들의 주장에 휘둘리게 되고 그렇게 해서 성전 재건은 20년을 지체하며 간신히 건설되기는 하는 게 아니었나?

 

오늘 본문 4절에서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러하듯 오늘 우리 믿음으로 살고자 하나 그 손을 약하게 하여 ‘어쩔 수 없이’ 환경과 사정에 의해, 서로의 이견에 따라 온전하지 못하거나 미뤄지거나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4)” 그러니 믿음의 힘을 길러야 한다. 우리로 약하게 하는 것을 제하거나 과감하게 이겨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내가 아이에게 뭐라 할 수 있겠나? 야단을 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억지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은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6:22)” 다른 방법이 없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왕상 18:46).” 나는 아이에게 말하길,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하자. 처가 될 그 친구에게 예수 믿으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내자. 손잡고 교회로 올 수 있는 힘을 내자… 이는 우리가 주의 힘으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난들 뭐라 말로 힘과 용기를 줄 수도, 권면하여 강제할 수도 없는… 그러나 할 수 있다 하시는 이가 하실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그리 권하였고 나 역시 괜히 슬프고 속상한 마음을 주 앞에 그리 아뢰었다. 대수롭지 않은 듯… 그저 그럴 수 있는 일로 여기면, 너무 먼 길을 돌아 광야 40년의 세월이 너무 잔인하다. 부디 그 시절이 오래지 않기를.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시 80:3-4).

 

오늘도 시편의 목소리로 주께 구하며,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8-12).

 

조금은 우울하고 슬픈 심정으로 주께 아뢰어 구한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4-15).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