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현. 2025. 9. 1. 17:32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에스라 5:1-2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시 81:10

 

 

우리의 문제는 망각인 듯하다. 아쉬울 때는 조바심을 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잊기 일쑤다. 더욱이 기억은 왜곡되기 일쑤여서 자기 좋을 대로 판단하고 생각하다 망상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심리적으로도 망상이 가장 무섭다. 그리 여기면 실제 그런 줄 안다. 이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다. 자신이 그리 여김으로 그런 것이다. 오늘 날 우리 사회의 현상이 그러하고 각자의 논리에서 상대를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에,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시 81:11-12).

 

그러니 오늘도 성전을 건축하는 데 있어 그 방해 요소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공격 때문이다. 앞서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전을 재건하는 데 있어 게을리 하는 것에 대한 질책성 선포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훼방으로 인하여 성전 재건이 중단된 상태였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4:4-5).” 저들이 누구인가 하면 “그 밖에 백성 곧 존귀한 오스납발이 사마리아 성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다른 땅에 옮겨 둔 자들과 함께 고발한다 하였더라(10).”

 

그러니 참 난감한 노릇은 성전 재건을 중단한 후 대적들의 방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염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타성에 젖었던 옛 생활의 태도 때문일까? 저들은 여러 핑계를 대며 이 고귀한 사업을 재개하지 않고 있었다.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학 1:1-2).”

 

그런 가운데 또한 ‘이 예언’의 소중한 의미도 있었다. 그것은 소망의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9).” 즉 “그가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라 하니라(슥 1:17).”

 

이런 걸 보면 당시 백성들은 얼마나 큰 축복의 시기에 살았던가? 저 유명하고 신실한 두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동시대에 인물로서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슥 2:12-13).” 하는 말씀의 선포를 들을 수 있는 것이 복이지 않겠나? 하여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3:4).”

 

이와 같은 선포와 함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있었던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날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8:9).” 하심으로, 다시 성전 재건 사업이 재개된 때는 다리오 왕 2년 6월 24일이었다(주전 520년).

 

선지자 학개는 그 이름의 뜻이 ‘축제’이다. 추론하면 ‘여호와의 축제’를 뜻하는 ‘학기야’란 단어를 그 이름으로 쓴 것이 분명하다. “그의 아들은 시므아요 그의 아들은 학기야요 그의 아들은 아사야더라(대상 6:30).” 학개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우리들은 그가 주전 520년에 활동한 선지자로,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그는 솔로몬의 성전을 목격했을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2:3).”

 

더하여 잇도의 손자 스가랴도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다. 스가랴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는 의미다. 이 사람 또한 학개처럼 같은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로서 스가랴서를 썼다. 그는 제사장 가문의 후손이었다. “잇도 족속에는 스가랴요 긴느돈 족속에는 므술람이요(느 12:16).” 그는 잇도의 직계 손자가 아닌 그 후 먼 후손일 것이다. 그 이유는 손자라는 단어가 자손 및 후손이란 뜻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잇도는 분열 왕국 초기의 선지자였음으로, “이 외에 솔로몬의 시종 행적은 선지자 나단의 글과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과 선견자 잇도의 묵시 책 곧 잇도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 대하여 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대하 9:29).” 하는 것으로 보면 그러하다.

 

저 둘,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을 하는 데 있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는 것과 이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데 주목하게 한다(스 5:1). 즉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서 이스라엘 즉 언약 공동체를 위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강조하는 호칭으로,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3:11).” 곧 ‘이름을 받들어’ 즉 ‘이름으로’ 그리 행하고 전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한 사람을 대할 때, 남은 물론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 해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이름을 받들어서 상대하고 존중하는 일이란 귀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자칫 자신의 감정과 비이성적인 논리에 사로잡혀 상대와 불화를 유발시킬 수 있다. 더욱 가족들 사이의 관계는 더더욱이나 그리할 필요가 있다. 이는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함부로 선을 넘고 침범하여 간섭하고 주관하려 든다. 부모는 자식에 대해 더욱 그러하고, 자식들은 부모에 대해 그와 같은 선입견으로 몸에 밴 습성을 따른다. 뭐라 이르면 이걸 다 고깝게 듣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은 오늘도 아내와 장모의 사이가 서늘하였다. 어젯밤 늦게 뜬금없이 자정을 넘겨서 아흔 살의 장모는 자신이 입었던 바지를 찾았고, 그 속에 휴지가 있는데 이를 어쨌냐는 게 발단이었던 것 같다. 아내는 바지를 빨려고 세탁실에 두었고 휴지는 쓰던 것이라 버렸다고 하는데도 장모는 깨끗한 것이라며 그 휴지를 찾겠다고 위태로운 몸짓으로 세탁실로 갔던 모양이다. 이 아주 사소한 것에서 아내도 장모도 서로는 늘 감정이 상한다. 제 3자 입장에서 볼 때는 서로가 별 것 아닌 듯 하나 아내는 평소 그러한 장모의 쓸데없는 절약에 스트레스를 받고, 늙으신 장모는 너무 헤프게 버린다며 뜬금없이 찾고는 한다. 실은 사용한 귀이개, 휴지, 특히 물티슈 등에 대한 집착이 병적이기는 하다.

 

같이 예배를 드리고 눈치껏 서로를 갈라놓느라 아내와 운동하러 간다면서 산책을 나갔다. 아내는 장모가 그럴 때마다 미칠 것 같다며 짜증을 냈고, 앞서 장모는 왜 남의 것을 함부로 버리냐며 화를 내는 일이라… 정말이지 별 것 아닌 것인데도 그 잦은 싸움으로 골은 점점 깊어진다. 그러니 나의 일과는 식사를 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장모 편을 들며 그의 지청구를 들어주고 아내를 뭐라 나무라듯 하는 것이고, 아내와 산책을 하면서는 장모의 그러는 것을 이해시키고 같이 걷다, 아내가 좋아하는 카페라떼 아이스를 한 잔 사주는 것으로 일정이 늘 똑 같다.

 

오늘 이 말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하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 가까울수록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는 보다 권위적인 표현으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하심으로, 두 선지자 모두 이를 명확히 사용하였다.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학 1:13).”

 

스가랴 역시 “다리오 왕 제이년 여덟째 달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슥 1:1-2).” 그래서도 바울 사도는 우리를 일컬어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고,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더하여 우리의 삶이 곧 문장과 같아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그만큼 그리스도의 냄새로 삶의 향기가 돼야 하고, 그리스도의 문장으로 짜임새 있는 절제가 필요한 것이겠다. 그 대상은 물론 온 세상을 향한 것이겠으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사람’을 위한 것이다. 즉 가족이라는 공동체와 교회와 믿는 자들로서의 합력이 궁극적으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보증된다. 곧 그만큼의 절제와 인내가 요구된다. 여기서도 ‘유다 사람’을 언급한 까닭은, 그들이 포로 귀환 후에 이스라엘 역사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곧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이 세상이 평안한 것은 우리들, 이 소수의 ‘남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으로이다. 이는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사 11:16).” 그러므로 “유다의 남은 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두고 하신 말씀에 너희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 하셨고 나도 오늘 너희에게 경고한 것을 너희는 분명히 알라(렘 42:19).” 우리로서는 그와 같이 가치 있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가운데 늘 ‘뜻하지 않은 방해자들’ 곧 ‘훼방하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 어느 시대에나, 어떤 개인의 삶에서나 꼭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 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스 5:3)” 이처럼 시비 아닌 시비를 걸고, 감정을 상하게 하고, 그것으로 강한 스트레스를 받게 하는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기질 때문에 혹은 상대의 지나친 참견 때문에 낭패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오늘 이 학개와 스가랴의 활동은 복이다. 뜻하지 않은 사마리아 총독의 호의는 오히려 성전 건축을 저해한다. 이때의 ‘현명한 답변’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하여질 때, “그들이 우리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예전에 건축되었던 성전을 우리가 다시 건축하노라 이는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건축하여 완공한 것이었으나(11).”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유다의 장로들을 돌아 보셔서’ 성전 재건 공사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게 하셨다.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5).”

 

이에 학개와 스가랴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전하여주는 예언이 값지다. 곧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전을 재건하는 일, 곧 한 사람을 한 영혼으로 마주하고 주의 이름으로 대하는 일이 곧 오늘 우리의 깊은 과제가 아닐까? 요즘은 다들 자기 방식의 판단과 기준으로 생각하고 섣불리 참견하거나 해석하여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는 것은 물론 스스로의 망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듯 사느라 전전긍긍한 때에…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말씀으로 곁에 두는 일. 학개와 스가랴와 같은 신앙의 어른을 함께 하여 말씀으로 집중하며 사는 삶.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서로에게 각자의 주의 전으로 재건해야 할 영적인 당위성을 알리시고 있는 것이다.

 

이에 오늘도,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시 81:1).

 

우리로 외쳐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길 바라시는 주의 뜻을 묵상하며,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

(6-7).

 

그러므로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8).

 

곧 우리 주의 뜻은,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13).

 

그렇지 않고 여전히 자기 고집으로 살면,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12).

 

이보다 더 큰 불행이 또 있을까? 부디,

 

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

(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