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하현. 2025. 9. 5. 17:41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에스라 9:1-2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시 85:1-2

 

 

사람들 속에는 저마다 독기(毒氣)가 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아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이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으로 ‘행위 언약’을 저버리며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죄의 속성’을 자처하였다. 그들 속은 오염되었고, 독기는 퍼져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 6:2).” 그 속에 더는 주체할 수 없는 독기가 퍼졌다. 곧 구원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그러하다.

 

그리하여 수명은 단축되었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3).” 하여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이를 빼내는 과정이라 하겠다. 즉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길이 애굽에서의 노예근성을 뽑아내는 최소한의 시기였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화구원도 필요하다. 그때 하나님은 당부하셨던 것을 오늘 본문에서 학자 에스라는 다시 기억한다.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 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그들의 딸들을 너희 아들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화와 행복을 영원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물려 주어 영원한 유산으로 물려 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스 9:11-12).”

 

이를 문자적으로 남자, 여자 성별을 운운하는 것은 어리석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이라 하여 그리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여 모 종교는 버젓이 기독교 행세를 하며 ‘어머니 하나님’을 운운하기도 한다는데… 최소한의 문해력도 없는 이들의 그릇된 교리에 대해서는 굳이 말을 말자.

 

다만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순간 우리 안의 독기를 운운하는 것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하시는 말씀으로도 연관이 된다. 결국은 처음 사람 아담조차도 그러하여서 우린 모두 저마다의 독을 품고 산다. 독은 자신의 영혼에 퍼지는 것은 물론 곁의 사람들로도 옮겨져 너무 자연스럽게 전이 된다. 하여 오늘 본문의 서두에서도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1-2).

 

여기서 “이 일 후에”란 문자적으로는 ‘이 일들이 마쳐진 후에’란 의미다. ‘이 일’은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가져온 예물들을 성전의 제사장에게 바친 일 및 제사를 드린 일을 말한다. “제사일에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은과 금과 그릇을 달아서 제사장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의 손에 넘기니 비느하스의 아들 엘르아살과 레위 사람 예수아의 아들 요사밧과 빈누이의 아들 노아댜가 함께 있어 모든 것을 다 세고 달아 보고 그 무게의 총량을 그 때에 기록하였느니라(8:33-34).” 그리고 에스라가 왕의 조서를 총독에게 보내어 큰 도움을 받은 일을 두고 하는 것이다. “무리가 또 왕의 조서를 왕의 총독들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들에게 넘겨 주매 그들이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을 도왔느니라(36).”

 

곧 에스라를 위시하여 귀환한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한 때가 5월이었다.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7:9).”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을 그 해 9월 20일에 모으는 동안, 그 시간적 공백이 에스라가 도착 후 4개월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바사 왕 고레스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1차 귀환시켜 성전을 재건하게 하고, 2차로 에스라를 위시하여 저들이 돌아와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는 그 시점이다.

 

방백들 곧 이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일반 백성 등 각 계층의 대표들로 지도자 행세를 하였고, 에스라가 귀환하기 전부터 그러한 관료 위치에 올라 있었다. “이제 온 회중을 위하여 우리의 방백들을 세우고 우리 모든 성읍에 이방 여자에게 장가든 자는 다 기한에 각 고을의 장로들과 재판장과 함께 오게 하여 이 일로 인한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나(10:14).” 그러니 그때의 “이 땅 백성”들은 누구인가?

 

이는 가나안 원주민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인근 지역의 거주민들을 가리킨다. 여러 족속들, 곧 “이 땅 백성들”로서 소위 방백들이란 위정자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1-2).” 곧 저들과의 통혼은 단순한 교류 그 이상의 관계를 의미하여, 이를 오늘 ‘가증한 일’이라 칭한다.

 

내가 사뭇 나의 아이들의 결혼에 대해서만큼은 믿는 가정의 믿는 배우자를 놓고 기도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더러는 어쩔 수 없이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안 믿는 자들이나 타종교인들과의 교류를 전혀 회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나 결혼은 다른 문제다. 오늘에 이르러는 주의 은총이 나의 그릇됨에도 넘치게 부어주신 바, 나의 처가와 장모는 무속과 불교의 집안에서 탈피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지만 종종 어려움을 느끼기는 한다. (나 같은 자가 할 소리는 아니겠으나) 더러는 목회에서 또는 신앙적으로 의지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극한 외로움을 느끼는 게 사실이다. 섣불리 이러한 글로 표현하기는 어려우나 나로 더 고약하게 무뎌지게 하는 것은 있다.

 

어쨌든 “떠나지 아니하고” 사는 것들, 이를 단정적으로 ‘독기’라 하기는 어려우나 이를 나누어 분리하는 일은 너무 더디고 다툼도 인다. 오늘도 무슨 일로 아내와 장모 사이에서, 아내의 독소어린 짜증과 말투에 내가 마음이 상했다. 나름은 자주 언급하여 주의를 주고 당부를 하는데도 그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나 역시 욱, 하고 치미는 독기어린 감정으로 부딪치기 전에 일찍 교회로 나와 버렸다. 그리고 내내 마음이 어려운 것은 이걸 어찌 말로다 해결할 수 없는 일인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오늘 본문의 이들 또한 당시 자신들과 교류하고 통혼하여 한데 모여 사는 이들과 ‘완전한 절교’는 불가능하였다. 단절할 수 없는 죄에서는 끊임없이 독이 스며든다. “아므람의 아들들은 아론과 모세이니 아론은 그 자손들과 함께 구별되어 몸을 성결하게 하여 영원토록 심히 거룩한 자가 되어 여호와 앞에 분향하고 섬기며 영원토록 그 이름으로 축복하게 되었느니라(대상 23:13).” 이를 어찌 따로 잘라내기란 쉽지 않아서 그저 덮고 또 덮으면서 이해와 타협으로 묵인하거나 부딪쳐야 하는데, 특히 아내와의 관계에서는 어찌 외면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일이라 더욱 어렵다.

 

결코 내가 저보다 낫거나 저들의 어떤 점으로 내가 마치 피해자인 것처럼 표현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내 안의 독기가 마치 바닥에 가라앉았다가도 욱, 하고 긁었을 때 금세 뿌옇게 부유물이 떠다니며 탁한 심정이 되는 일이라…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11).” 내가 이를 두고 속상해하는 것도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15).”

 

그러므로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6-17).” 그래서 바울 사도도 그렇게 절규하여 애통해하였는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 그러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2-24).”

 

이럴 때 나는 상한 감정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데, 오늘 에스라가 그러하다.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7).” 욱, 하고 화가 올라와 아내에게 막말을 하듯 장모를 더 이상 모시지 말든가, 우리가 별거를 하든가…. 하는 소리를 해놓고는, 나의 이 슬픈 감정을 말씀이 아셨는가? 에스라의 심정을 헤아리다 눈물이 핑, 돈다.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8).” 나의 영혼의 이 작은 불씨 같은 것에서 나의 이 ‘가증한 일’을 주 앞에 회개하며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여러 번 입을 삐쭉거리게 된다. 스룹바벨의 인도 하에 1차 귀환한 사실에 이어 에스라가 인도한 2차 귀환을 언급하고(7-10장), 지금까지 귀환의 역사적 배경(7:1-26)과 귀환자들의 명단(7:27-8:14)과 과정 등 나름 순조로운 귀환 여행을 상상하였다.

 

그러다 영적으로(8:15-23) 또한 물질적으로(8:24-36) 준비해야 하는 것을 생각하다, 오늘 본문의 실상은 영적으로 저들이 어떤 상태인지를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에스라가 주도하는 종교적, 사회적 개혁 운동(10장)을 앞두고, 그러한 개혁 운동의 원인과 이유에 대해 오늘 본문이 복선을 깔듯 암시하는 것 같다.

 

1차 귀환 때는 성전을 다시 재건하는 게 급선무였고, 2차 귀환 때는 백성들의 신앙 개혁 운동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직감하게 된다. 곧 오늘 본문의 의도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우리 모든 인간의 공통된 문제, 우리 영혼에 퍼져 있는 독기(毒氣)를 빼내야 하는 심각성을 일깨우는 것 같다.

 

죄로 인해 영혼의 통로가 막혀서는 기도가 안 나온다. 말씀을 묵상하거나 증거할 수 없다. 미움과 원망으로 남을 탓하게만 된다. 결국은 이 독기, 즉 죄의 심각성을 깨달을 때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겔 18:31).” 이와 같은 심각한 경고의 말씀이 가슴에 꽂혀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 7:9).”

 

하여 나는 나의 영혼을 위해서도 아내를 위해 기도한다. 그 사이가 신앙 안에서 하나 되길 구한다. 그러기 위해서도 내가 늘 말씀으로 각성하고 이와 같은 말씀에서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하여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신 30:8).” 오늘의 나의 감정이 누구 때문이 아니라, 본래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죄성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하여,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 119:11).

 

아니면 무엇으로 나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 오늘은 무슨 은행 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정예배도 드리지 않고 그냥 교회로 온 것도 실은 나의 감정이 상해서였다. 상한 영혼으로는 말씀을 나눌 수도 이를 증거하지 못함으로 기도할 수도 없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아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사 66:5).”

 

그래서도 마치 서둘러 말씀 앞에 앉히고 묵상글을 쓰면서, 부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하심에 의지한다. 그러므로 에스라의 기도와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15).”

 

이를 다시 오늘 시편의 고라의 자손의 기도와 같이,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시 85:1-2).

 

오늘의 나로 이처럼 주 앞에 앉게 하신 것도, 그리하여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4, 6).

 

이는,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9).

 

그러할 때,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10-11).

 

이에,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