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하현. 2025. 9. 6. 15:39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에스라 10:1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시 86:5-6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서로의 속엣 얘기를 하는 것이 부담이 되는 일이다. 알면 알아서 부담스럽고, 모르면 몰라서 서운하기도 한 게 개인사다. 어릴 적에는 순수하게 털어놓던 말과 말 사이의 감정이 점점에 세월에 닳고 닳아서 나이가 든다는 일은 무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예민해지는 것 같다. 대수롭지 않게 듣고, 공감하고, 할 수 있는 위로로 족하였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시절을 거치면서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 아는 일이 흠이 되고, 나중에는 약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가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고,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시인 정현종의 묵직한 외침이 그래서도 무게감을 더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선을 긋고 어른이 되는 게 편한 줄 알았다. 적당한 거리에서 ‘친절한 타인’으로 늙어가는 게 ‘슬기로운 노인 생활’이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다 주 앞에 다시 돌아오고, 서로의 마음을 직고하여 서로가 성도의 기도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능력이 있음을 알았다.

 

먼저는 자신의 내용으로,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2).” 다음은 서로의 기도로,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그리하여 서로가 고백하고, ‘병이 낫기를 위하여’ 이는 육신의 질병뿐 아니라 상한 영혼으로도 포함이 된다. 하여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15).”

 

오늘 본문에서 나는 우선 에스라의 기도를 본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1).” 여기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하나님의 전 앞에서 엎드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전 마당을 가리킨다. 만일 에스라가 성소 안에서 기도했다면 백성들이 에스라의 기도 모습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기도하며 에스라가 운다. ‘엎드려 울며’ 기도할 때 이는 쓰러져, 넘어져, 엎드리는 것으로 극도의 슬픔을 나타낸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던지듯 납작하게 엎드려 슬퍼하는 모습을 종종 장례식장이나 극한 슬픔의 현장에서 보게 된다. 이때의 울음은 통곡이다. 이에 성경의 관점은,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렘 22:10).”

 

역사적으로 ‘죽은 자’란 요시야를 가리킨다. 요시야는 주전 609년의 므깃도 전쟁에서였다(왕하 23:29-30). ‘잡혀간 자’란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말한다. 요시야가 죽자 그의 뒤를 이었으나 오래지 않아 애굽의 바로느고에 폐위되고 석 달 후에 애굽으로 잡혀갔다(31-35). 이러한 직접적인 사실을 통해 영적인 암시로는 먼저 세상을 떠나는 육체의 죽음에 대하여, 잡혀갔다 하는 것은 주를 멀리하고 교회를 떠나간 영혼을 의미한다. 고로 죽은 자는 죽은 자들의 곳으로 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만 산 자를 위해 울어서 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오늘 에스라가 엎드려 극도의 슬픔으로 주 앞에 기도한다. 설령 그것이 자신과 상관없는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고백한 것이다.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9:6).” 이렇듯 공감하고 통회하여, 남의 일인데도 ‘같은 성도로서’ 주의 백성으로 서로가 중보하는 기도가 값지다.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 하고 에스라는 주께 아뢰었다.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하고 주의 은혜를 갈망하며,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하고 주께 간구하여 묻는다(8-10).

 

에스라는 죄에 대해 외적으로 비통해하였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9:3)” 여기서 이 일은 서로가 이방인들과 통혼하였던 사실이다.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1-2).”

 

에스라가 페르시아 왕의 정치적 사법권을 소유한 자이다.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7:25).” 그런 자로 세상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지만, 저가 오늘은 통곡한다. 에스라의 신앙적 태도에 대한 적극적 반응을 주목하게 된다.

 

신앙으로 주를 사모하면서 우리 같이 주를 사모하는 자의 사연과 그 속엣 얘기는 더 이상 남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누가 그 남편으로 인해 혹은 자식으로 인해 극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눈물로 주께 호소하다 기도를 부탁할 때도…. 또는 주를 멀리하다 교회로 돌아와 신앙을 회복하려는 데 있어 오히려 생활이 더 어려운 지경에 놓여서 갈등하게 되는 이의 기도부탁이나…. 가령 누가 신앙으로 말씀을 사모하는데 안 믿는 남편이 극한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면서 덩달아 신앙생활을 거부하게 함으로 힘들어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종종 누가 기도를 부탁하여 이런저런 사연을 들으면 나는 저의 이름을 따로 적고 그때마다 주 앞에 아뢴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것도 앞에 9장에 나타났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타락에 대한 에스라의 공감이다. 서로의 신앙을 돌이켜 종교 개혁을 이루려는 데 있어 이방나라와의 통혼 문제는 생활을 통틀어 어렵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이 가정을 이뤄 사는 일에서 신앙이 다르거나 섬기는 신(神)이 같지 않을 때 그에 따른 갈등은 가히 살인적이다. 겉으로는 좋은 사이 같으나 영적으로는 막힌 담을 헐 수가 없다. 에스라는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인도한 제2차 귀환의 결과로 여호와께서 택하신 백성을 영원토록 지켜주실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려면 우선은 스스로의 허울과 그릇된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

 

사실 본서 저자인 에스라는 앞장을 통해 백성들의 영적 실상을 낱낱이 폭로했다. 그리고 본문에서 자신이 백성들의 ‘영적 질병’을 위해 기도한다. 곧 이스라엘을 위한 에스라의 애도와 언약을 상기하고(1-5), 에스라가 단행한 종교 개혁에 대해 언급하면서(6-17), 이를 위해 당시 종교 개혁의 관건은 이방 여인을 취한 자들의 청산을 우선하는 일이었다(18-44).

 

즉, 종교 개혁의 진행 과정은 늘 논란이 있는 잡혼이 문제였다. 실제 이는 오늘 우리 현실의 신앙에도 연관이 있다. 안 믿는 상대와 결혼을 하거나 심지어는 타종교인과의 혼인은 필시 어느 한 쪽으로 쏠리게 돼 있다. 당장은 서로가 좋아서, 사람만 보고 결혼이란 걸 하는 게 급선무인 것 같지만 결혼까지도 우리에게는 신앙과 성화의 과정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뭘 이런 것까지 공개하는가 싶을 정도로 접혼자의 명단을 공개하는데 실은 그만큼 심각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이 있다. 이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번성하게 하셨으므로 너희가 오늘날 하늘의 별 같이 많거니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신 1:10-11).” 그런데 이를 저해하는 것 중에 가장 직접적인 문제는 잡혼이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뿐 아니라, 영적으로 허용하고 화합하는 모든 타협과 일치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늘 에스라는,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10:4-5).”

 

이를 구분하여 이방인과의 결혼에 대한 타개책을 찾는다.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11).”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아는 아무개는 살면서 이를 깨달았고, 돌이켰을 때는 신앙을 지켰던 홀어머니와 둘만 남았다. 서로가 좋아 결혼을 할 때는 저가 믿든지 안 믿든지, 다른 잡신을 섬기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친정엄마는 권사님으로 이를 두고 그렇게 만류하며 기도로 엎드리셨다. 그렇게 결혼 생활 20여 년 동안 반주자로까지 헌신하던 교회도 떠나고, 그렇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떤 과정이었을지는 잘 모르지만 결국은 이혼하였고, 남편은 재혼을 하였고 두 아이는 각각 성인이 되어 그 부모를 떠났을 뿐 아니라 어릴 적 신앙도 버렸다.

 

물론 그리하여 안 믿는 배우자를 주 앞으로 인도하는 사례도 있는데 그게 참 보기 드물다. 천하의 솔로몬도 그 신앙과 지혜를 이방 여인들을 사랑함으로 우상을 섬기며 노후를 맞았다. 오늘 본문도 백성들이 이방 여인과 통혼하는 것을 범죄 사실로 규정하고, 에스라는 이 사실에 대해 애통해 하면서 회개하는 것이다. 저의 애통한 기도는 그 같은 범죄가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임을 분명히 알게 한다. 무지함으로 백성들이 선택한 일의 결과는 참혹하여서 한 민족이 남북으로 갈리고, 각각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에스라는 계속 기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로 죄의 자리에서 단호히 삶의 방향을 전환하게 해야 했다. 이는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1).” 비록 저가 음행하는 현장에서 잡혀왔다 해도, 에스라는 오늘 백성들로 하여금 이와 같이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돌이켜 통혼한 이방 여인들을 추방케해야 했다. 사실 이와 같은 개혁은 에스라가 바벨로으로 귀환하는 목적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목적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앓고 있는 영적인 문제, 그 상한 심령을 위해 죄의 환부를 과감하게 도려내는 일이었다. 이를 문맥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요즘은 서로가 상대의 신앙이나 그 가정공동체의 종교까지 보면서 자녀들의 결혼에 대해 부모가 관여하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무속과 토속종교는 애교스러울 정도이고 하나님을 아예 배척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이를 ‘영적 환부’라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 나의 결혼도 그 자체로 보면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른 게 사실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오늘의 이 모든 게 은혜일뿐이지만….

 

그래서 나는 누가 결혼을 알리며 그 배우자의 경우를 말할 때 깊은 관여는 엄두도 낼 수 없다. 특히 요즘은 젊은 세대들이 점점 더 결혼연령이 늦거나 대놓고 비혼주의를 천명하는 시절이라…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성을 유지하기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심은 점점 이제 묘연해지는 현실인 것 같다. 혼전관계나 동거가 아예 자연스러운 게 되었고, 이혼이라는 게 이제 허물이 아니라 당당한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가 되었으니까!

 

결국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그래서도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소망하게 된다. 분명 우리 스스로의 판단으로는 안 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저들을 향해 사탄의 자식이라 하셨으면서도 저들의 ‘병적인 의’보다 더 강한 추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삶의 영위를 위해 기도와 영적 투쟁은 필연적이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19-21).”

 

이렇듯 자기하고의 싸움이 그 어느 시대보다 절박하다. 그런 가운데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전 5:12-13).” 세상이 이제 어떻다, 하는 말에 타협해서는 교회에서조차 하나님의 거룩은 지켜질 수 없다.

 

이에 오늘도 시편으로 기도한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시 86:3-4).

 

그렇게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1).” 그의 심정도 그러했을 것으로,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5-6).

 

우리는 오늘도 주 앞에 기도하며 간구한다. 우리 의지와 노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11).

 

하여,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12-13).

 

하여 세상에 증거하기 위해서도,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17). 아멘.